소설리스트

37화 심야의 티 타임 (37/210)


37화 심야의 티 타임
2022.11.09.


‘이게 어떻게……?’

나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옥좌에서 일어섰다.

‘복종의 사슬이 끊어졌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쟈는 초조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마족은 크든 작든 인간에 대한 정신지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일족은 그중에서도 특출한 지배 능력을 가졌고, 나쟈는 타고난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더 이를 갈고닦았다.

자신의 주인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 결과가 주인께 직접 받은 ‘복종의 사슬’이라는 이름.

제도를 중심으로 제국 전역에 뻗은 수백만 개의 사슬 중 끊어진 것은 단 150개에 불과했다. 비율로 치면 보잘것없는 수치.

문제는 비율이 아니라 사슬이 멋대로 끊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다소 저항하는 인간이 존재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5년 전 자력으로 황궁을 탈출한 제5 황자 클라비수스처럼.

그러나 이는 황자의 저항력이 지배를 완전히 벗어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쟈가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지배가 완전히 끊어졌고, 재차 사슬을 뻗었으나 튕겨 나갔다.

정신지배에 대해서는 나쟈와 적어도 동등, 또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음욕 님께 알려야 하는데…… 아아, 하지만 분명 실망하시겠지.’

아름다운 얼굴이 짙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아냐. 그분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야…….’

그 순간, 나쟈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사고보다도 먼저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눈앞의 허공이 일그러지고, 공기가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낮게 신음했다.

버티지 못한 공간이 우악스럽게 찌그러졌다가 다음 순간 해부된 개구리처럼 배를 벌렸다. 드러난 혼돈 너머에서 팔과 다리가 뻗어 나오고, 이윽고 전신이 드러났다.

“…주인님.”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력을 힘겹게 견디며 나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앞에 발을 디디고 선 존재가 미소를 머금었다.

“시킨 일은 어디까지 진행됐니?”

“……!”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쟈는 숨을 들이켰다. 흐트러지는 감정을 수습하고 뭐라도 답하기 위해 입술을 뗀 순간, 그녀의 주인이며 창조주 되는 자, 음욕이 말했다.

“방해꾼이 나타났니?”

“괜찮……습니다! 주인님, 나쟈는 괜찮아요! 결코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이리 오렴.”

나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성과 감정과 본능을 무시한 채 그녀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윽고 나쟈는 음욕의 앞에 섰다.

모두를 감탄케 하고 홀리는 경국의 미녀가 나쟈라면, 모두에게 두려움을 심고 이윽고 미쳐버리게 만드는 게 음욕이었다.

무섭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인지를 초월한 것,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의 근원이며 광기의 씨앗이다. 아름다움도 다르지 않다.

인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은 경탄보다도 먼저 이지를 잃게 만든다.

“하아, 하아…. 주인님…….”

나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비교하면 늦으냐 빠르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흥분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점점 달아오르는 두 뺨을 보며, 음욕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후후. 숨기지 말고, 내게 전부 말해보렴?”

나쟈의 얼굴을 붙잡은 음욕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나쟈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몸이 형체를 잃고, 내용물을 잃은 옷가지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김을 피워 올리는 분홍빛 액체가 그 아래로 흘러나왔다.

“어머나…….”

음욕이 안타깝다는 듯 탄성을 냈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바닥에 퍼져나가던 분홍빛 액체가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올랐다.

고개를 기울이며 이를 바라보던 음욕이 액체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목을 울리며 전부 마시고, 이윽고 열띤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아이.”

나쟈가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한 모든 것이 음욕에게 전해졌다. 그 현상을 ‘먹었다’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본래 나쟈는 음욕의 일부를 떼어 빚어낸 존재였다. 나쟈만이 아니라 그녀의 일족 전체가 그랬다.

나쟈는 기특한 아이였고,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직접 이름을 내렸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었다. 동등한 존재도, 하다못해 부하조차 아니었다.

몸의 일부에 불과했다.

“흐응.”

나쟈의 기억을 음미하던 음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냈다. 나쟈가 대행하던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존재가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얼마 전 중간계로 향한 칠종주 중 한 명 ‘교만’이 갑작스럽게 죽었음을.

“우후후.”

나쟈와 비슷한 존재를 빚어 계획을 맡기려던 음욕은 생각을 바꿔 옥좌에 앉았다. 다른 칠종주는 교만의 죽음을 무정하리만치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음욕은 달랐다.

인간의 몸으로 칠종주를 죽일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비정상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목마름을 자극했다. 모처럼 직접 중간계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라면 만족할 수 있을까……?”

가슴 안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감당하지 못하고 흘러넘친 감정이 황궁을 뒤덮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곳곳에서 도저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야만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우후후. 후후후후.”

그 중심에서 음욕은 기대감으로 가슴을 부풀리며 아이처럼 무구하게 웃었다.

* * *

깊은 밤. 소아레스는 모두가 잠들어있는 것을 귀로 느끼고는 조용히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불침번은 기본적으로 2인 1조로 돌아가지만 소아레스의 차례만은 예외였다.

소아레스가 황자의 동료들 중 가장 강하기 때문이고, 홍일점인 그녀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황자가 그녀를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덕분에 움직이기 쉬웠다. 황자의 신뢰를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게 불편했으나 필요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는 여러 번 신중을 거듭하며 야영지 외곽, 1인용 천막이 펼쳐진 곳으로 향했다. 자이안이 쓰는 천막이었다. 소리로 전해지는 정보로 보건대, 자이안도 지금은 조용히 자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안으로 들어간 소아레스는 자이안이 깊이 잠든 모습을 눈으로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죄책감과 갈등이 엄습했다.

‘전하께서는…… 이런 행동을 원치 않으시겠지.’

황자의 뜻에 반하더라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원대한 목표를 위해 자이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둬야 하는 존재였다.

밤중에 자이안과 황자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언약을 나눈 것을 소아레스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선의로부터 비롯되는 약속은 때로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진다. 그게 언약이건, 물증을 동반한 계약이건 마찬가지였다.

소아레스가 인간의 선한 마음을 아예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선한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무작정 상대의 선함을 믿는 것보다 욕망을 충족시키고 이익을 보장하는 더 확실했다.

‘전하께 바친 목숨, 전하의 앞날을 위해 쓰이는 게 당연한 일.’

결심을 마친 소아레스가 투박한 상의의 단추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소아레스는 심신 모두 강한 여성이지만, 두려움도 아픔도 모르는 철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황자에의 존경심과 충성심이 그를 웃돌았다.

“소아레스 님. 그러지 마세요.”

자이안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

소아레스는 터져나올 뻔한 비명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턴가 눈을 뜬 자이안이 몸을 일으키며 안쓰러움과 의혹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신 건가요?”

“그, 그건…….”

소아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더듬었다. 사실 자이안도 아예 아무 것도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성에 서먹하긴 하지만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윗단추 두 개만 풀었을 뿐이지만, 깨어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찔한 상황이 되었으리라.

“전하께서 시키셨나요?”

“그건!”

거의 노호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소아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시 대답을 기다린 자이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러네요.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쐴까요?”

“…….”

거부권이 없었다. 소아레스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천막을 나와 아직 환하게 불타고 있는 모닥불 곁으로 향했다.

“클라본 차예요.”

잠시 자리에서 멀어져 무언가를 준비하던 자이안이 투박한 나무 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언젠가와 반대의 상황이 됐다. 소아레스는 황망히 잔을 받아들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차를 마셨다.

독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미친 것은 이미 두 모금, 세 모금 마시고 작은 한숨을 내쉰 뒤였다.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런 일을 시키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클라본 차에는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깨닫고 보니 소아레스는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는 전하를 잘 몰라요. 함께 지낸 시간은 한 달도 안 되고, 그 전에 뵀던 건 거의 10년도 더 과거의 일이니까요.”

“모두 제 독단입니다. 알코스 님, 부탁드립니다. 전하를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주섬주섬, 소아레스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일, 그런 행동을 결심한 의도. 낯 뜨거운 얘기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자이안은 끝까지 들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코스 님.”

말을 마치고 나서야 소아레스는 깨달았다. 황자를 위하고자 했던 그녀의 행동은 황자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이안의 선량함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시야가 좁아져 있던 것일까. 죄책감에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싫은데요? 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네?”

그래도 설마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소아레스 님, 몇 살이세요? 전 열여섯인데.”

“스물여덟……입니다만.”

“와, 그럼 제가 한참 어리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솔직히 그동안 많이 불편했거든요. 앞으로 저 편하게 대하시면 용서해드릴게요.”

“…….”

어쩐지 자이안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가벼운 화제로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것이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직업병과 같은 것이라고.”

선을 긋듯 대답하면서도 소아레스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를 경계했던 게 참으로 부질없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병은 고칠 수 있어요.”

“그럴 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병을 고치려면 환자가 자신은 나을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는 게 가장 중요하대요. 그러니 같이 노력해 봐요, 소아레스 님. 저도 도와줄게요.”

뜬구름 잡는 소리였으나, 이상하게도 의심하고 따져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이안은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아레스만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둘은 편한 마음으로 얼마간 두서없는 대화를 나눴다. 소아레스가 주도할 때도, 자이안이 주도할 때도 있었다. 황자와 제국, 일리움과 알레프 백작가, 코르니카의 사건, 떠오르는 많은 것들이 그때그때 화두가 됐다.

그 길지 않은 시간만으로 사람은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만 들어가 주무시지요. 곧 다음 번 불침번이 깨어날 겁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이거 소아레스 때문에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어쩌죠? 그땐 소아레스가 책임지는 거예요.”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 없도록 제가 확실히 깨워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후후, 편히 주무십시오, 알코스…… 자이안 님.”

소아레스의 배웅을 받으며 자이안은 다시 천막으로 돌아왔다. 잠들기 위해 기분 좋은 얼굴로 자리에 누웠다가, 문득 그의 머리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자이안은 벌떡 일어나며 머릿속으로 외쳤다.

‘잠깐만요! 삼촌! 삼촌?! 삼촌 처음부터 보고 있었죠?!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왜 가만히 계셨어요?!’

「응? 어? 뭐가?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몰랐는데?」

당연히 자이안이 자고 있을 때부터 소아레스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프레이가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자이안은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요! 만일 그랬으면 내일부터 소아레스 님 얼굴을 어떻게 봤을지……!’

「결국 아무 일도 없었구만 무슨 호들갑이냐? 누가 들으면 소아레스가 네 앞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춘 줄 알겠다.」

“그……!”

반사적으로 그 모습을 상상한 자이안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이놈도 남자는 남자구나. 프레이는 태평하게 웃었다.

“으으. 으으으으……. 저, 전 잘게요.”

「잘 수는 있겠냐?」

“아무튼 잘게요!”

버럭 소리친 자이안이 억지로 담요를 덮어쓰고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푹 잠들었다.

“모두 주목. 전할 얘기가 있다.”

다음 날. 야영지 중앙에 선 황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전하? 오랜만에 아침 연설이라도 하시려고요? 그런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우리에게 그런 쓸데없는 의례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지금부터 전할 건 아주 중요한 얘기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황자가 담담하게 선고했다.

“지금부터 우리 반란군의 제국 정상화 계획을 바닥부터 뜯어고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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