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선행의 결과 (2)
(35/210)
35화 선행의 결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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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선행의 결과 (2)
2022.11.07.
클라비수스 황자는 3년 전과 같은 실패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법사를 포함한 소수를 며칠 먼저 보내 준비를 해둔 뒤, 그는 남은 동료들과 함께 볼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매복했다.
“전하, 제물들이 볼드를 출발했습니다.”
정찰에서 돌아온 동료의 보고에 황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을 한차례 돌아본 뒤,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랬다.
“가진 걸 전부 다 뱉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흐하하하―!”
우선 황자를 포함한 스무 명이 도적단인 척 제물들을 습격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마법을 이용해 숫자가 훨씬 더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마법에 대해 해박한 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허술한 위장이지만, 반대로 마법에 무지한 일반인 상대로는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어디 한번 도망쳐봐라! 으하하하하!”
그다음은 포위망을 일부러 느슨하게 만들어 150명을 한쪽 방향으로 도망치게 유도하는 것이다.
상대는 훈련받은 병사가 아니라 민간인. 도적을 마주치면 저항하기보다 도망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다.
나쟈의 세뇌는 절대적이지만 사람을 아예 미치광이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상식과 지식은 그대로 놔두되 나쟈의 말과 행동만은 옳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식이다.
3년 전 황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고, 그 결과 무기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백성들이 악귀처럼 날뛰는 참사가 일어났다.
“쫓아라, 쫓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마음껏 빼앗고 죽이고 겁탈해라아!”
황자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에 맞춰 스무 명의 동료들이 양 떼를 몰 듯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았다.
거리를 가늠하던 황자는 150명이 모두 함정을 설치한 장소에 들어갔음을 확인하고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매복해 있던 마법사들이 호령에 맞춰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다. 미리 그려놓은 마법진에서 강력한 수면 안개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150명을 뒤덮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변변한 저항은 없었다. 나쟈에게 세뇌된 150명이 모두 의식을 잃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공한 건가……?”
수면 안개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채 지켜보던 황자가 쉬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소아레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전하.”
“그런가. 성공했나.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나.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았나.”
물론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세뇌가 풀린 것도 아니고, 마법에 의한 수면은 길어도 두 시간을 넘기지 못하니까. 그러나 적어도 당면한 가장 큰 고비를 넘긴 것은 확실했다.
“모두 전하의 용단 덕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하지 말거라. 끝까지 반대해 놓고서는.”
“제가 아니면 전하의 고삐를 쥘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뚱하게 입을 다물었던 황자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차례 모두를 돌아본 그가 홀가분하게 말했다.
“좋아. 뒤처리를 시작하자. 어서 사람들을 밧줄로 묶고 수레에 실어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뇌도 약해질 터.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20개의 수레와 말 40마리, 그리고 약초를 배합해 조제한 강력한 수면제까지. 반란을 위해 모은 물자들이었으나 이 자리에 이를 아까워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들은 남쪽으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성공했구나. 다, 다행이에요.”
상황을 설명한 유리아의 말에 자이안은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반대로 아르스의 표정은 얼어붙었다.
“이거 안 좋은데.”
“네? 하지만 전하의 계획은 성공했는데요.”
“그래, 성공은 했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어. 세뇌를 안 풀고 그대로 뒀잖아.”
아르스는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우리 자이안, 한번 생각해보자. 네가 세뇌술사야. 죄 없는 민간인을 세뇌시켜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뭔가 목표를 이루려고 해.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끼어들어서 자꾸 방해해. 그냥 보고만 있을래?”
“그건…… 아니죠.”
“언니, 나쟈가 이런 상황에 미리 대비해서 뭔가 세뇌를 걸어놨을 거란 말씀이세요?”
유리아의 날카로운 추측에 아르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원래 세뇌라는 건 이런 식으로 방해받을 걸 예상해서 2중 3중으로 암시를 걸어놓는 게 기본이야. 나쟈라는 마족이 그런 기본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럴 때는 최악을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겠지?”
상황을 이해한 자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이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아는 전하께 가 주세요. 동향을 보고 있다가, 상황이 급변하면 지금처럼 제게 와서 알려주세요.”
“자이안은 어쩌려고?”
“저는…….”
자이안은 아티팩트 제작을 위해 모은 소재에 시선을 옮겼다. 남은 양은 넉넉하게 잡아 2번 정도.
“아티팩트를 만들게요.”
2번 안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알았어. 그럼 갔다 올게.”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유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자이안은 지난 며칠간과 마찬가지로 편한 자세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소재를 하나둘 옮겨 눈앞에 쌓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아르스 님은…….’
아르스라면 아주 쉽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르스는 다 안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자이안은 그냥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내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 그러면 내가 해야지.’
여기까지 와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말로 상황이 급박해지면, 예를 들어 누군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매달릴 것이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자기 힘으로 시도해보고 싶었다.
‘이럴 때 의지하지 않는 건, 대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네에. 프레이도 이런 기분이려나.’
그 모습을 보며 아르스는 훈훈하게 웃었다. 아르스라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든 행동할 수 있도록 대비만 하면서, 우선은 자이안의 도전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후우우우.”
자이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시작하려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실패했다간 아르스와 유리아를 무슨 낯으로 보지? 만약 성공해도 시간을 못 맞추면? 그냥 얌전히 아르스에게 부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자이안.」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지난 2주간, 프레이는 의도적으로 대화를 최소화하면서 아르스에게 상황을 맡겼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당연한 말이었다. 동시에, 그만큼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게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었다면 인류 역사상 분쟁의 반 이상은 없어졌으리라.
「널 믿어. 넌 이미 경험이 있잖아. 코카트리스를 쓰러뜨릴 때 어땠는지 떠올려봐라.」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실제로는 겨우 석 달쯤 전 일이었다.
‘그때 나는…….’
이길 수 없는 적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했나? 실패하면 어쩌나 상상하고 불안에 떨었나?
‘그때, 나는.’
전부 아니었다. 그때 자이안의 머릿속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을 뿐.
지금도 똑같았다.
“…….”
천천히 손을 뻗은 자이안이, 이내 혼신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 * *
볼드의 목공장인 토니오 바렌치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감미롭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니오를 구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토니오는 목 놓아 소리쳤다. 그러나 깊은 어둠은 그의 목소리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사실을 알릴 수 있을까? 그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오직 자신이 모자란 탓이라고 어떻게 전해줘야 할까?
방법은 간단했다. 이 어둠 속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오오, 나쟈 님. 나의 주인, 나의 지배자.”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찬미의 말과 함께, 토니오는 눈을 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수레 위였다. 팔과 다리가 밧줄로 묶여 있었으나 그 상태로도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울타리가 낮았다.
토니오는 여러 번 눈을 깜빡여 안개가 서린 것처럼 뿌연 시야를 정리하고, 한 차례 주변을 훑어보았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둘 눈을 뜬 그들이 조용히 서로와 시선을 교환했다. 토니오도 그에 합류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일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쟈 님, 지금 당신께 가겠습니다.”
나직히 중얼거린 토니오가 망설임 없이 수레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 * *
무거운 물건이 떨어진 듯한 묵직한 소리가 났다. 수레를 몰고 있던 소아레스는 뒤를 돌아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법의 효과로 얌전히 잠들어 있어야 할 볼드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묵직한 충돌음은 그들 중 한 명이 수레 밖으로 뛰어내리며 난 소리였다.
“전하! 사람들이 난동을……!”
“수레를 세워라! 자칫 사상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클라비수스 황자가 명령을 내렸다. 20대의 수레가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이미 적잖은 인원이 밖으로 떨어진 뒤였다.
수레 위에 남은 사람들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밧줄을 끊기 위해 피부가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나무 바닥에 몸을 거칠게 문지르는가 하면, 이빨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밧줄을 물어뜯는 이도 있었다.
“이런 제기랄! 떨어진 사람들을 추스르고, 부상자가 있으면 치료해라! 난 밧줄을 풀어주겠다!”
다행히 목숨이 위중한 이는 없었지만, 팔다리가 부러진 정도의 중상을 입은 이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 고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광기나 다름없는 순수한 열망뿐이었다.
밧줄을 풀어주자, 그들은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얌전해졌다. 그게 황자의 말을 경청하게 됐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150명의 제물들은 서로 얼굴을 살피며 전원이 빠짐없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황자 일행에게는 한마디도 없이 제도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 자신들이 꽁꽁 묶인 채 수레에 실려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나쟈에게 가는 것이 급했으니까.
“막아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행들 사이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자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저들을 붙잡지 못하면, 지금까지 못 본 척 내친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
“전하,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아직…… 아직 뭔가 있을 거다. 있어야만 해.”
강하게 운을 뗐으나, 뒷말은 서글플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더 이상 방법은 없음을 황자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물자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2주 만에 급조한 계획이었다.
처음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하면, 중간에 뭔가 하나가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이었다.
남은 물자는? 가용 인력은? 이를 기반으로 저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단은? 온갖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공회전했다. 수식만 있을 뿐, 도출되는 답이 없었다.
캄캄한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몸을 던질 수밖에 없나.”
“……제정신이십니까, 전하?”
“제정신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냥 해 본 말이지 않느냐. 너무 노려보지 말거라. 이거야 원,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구나.”
“위에 선 자로서 해도 될 말이 있고 하면 안 될 말이 있는 겁니다.”
황자는 뚱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사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사태가 호전된다는 확신만 있다면 황자는 얼마든지 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의 무게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의 목숨 값, 그가 짊어진 죗값은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버릴 만큼 가볍지 않다.
“저기이…… 바쁜 와중에 죄송한데요.”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경계하며 돌아보니, 어느새 그들 틈에 섞여들었던 유리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멋쩍게 웃었고 있었다.
“전할 얘기도 있고, 상황도 좀 확인하고 싶어서요. 혹시 죽은 사람…… 아직 없죠?”
“중상자는 제법 있지만, 목숨이 위중한 이는 없다. 그런데…… 유리아. 그대는 분명 자이안과 함께하기로 했을 텐데?”
“아,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밝게 말했다.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곧 자이안이 올 거거든요.”
“……?”
황자와 소아레스는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