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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선행의 결과 (1) (34/210)


34화 선행의 결과 (1)
2022.11.06.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 클라비수스 황자와 일행은 묵묵하게 정해진 길을 나아갔다.

내륙 정찰은 애초에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쟈라는 악마에게 제국 전체가 유린당하는 꼴을 뜬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정찰은 특히 심했다.

그 분위기의 중심에 오만상을 쓰고 있는 클라비수스 황자가 있었다.

“전하.”

“음, 소아레스. 왜 그러느냐.”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어차피 그 소년은 떠나지 않았습니까?”

“…음?”

문득 고개를 든 황자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동료들이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아레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 어차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의 헛소리 아닙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전하!”

“맞습니다! 그냥 잊어버리자구요!”

“증류주 한 병 어떠십니까? 시름을 털어내기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상심한 황자를 위로하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정작 그 중심이 된 황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소란이 좀 잦아들자,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난 화낸 적 없다.”

“조금 전까지 오만상을 쓰셔놓고 그리 말씀하시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내가 그랬느냐? 하하핫! 미안하다. 너무 깊게 생각에 몰두한 모양이로구나.”

소아레스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10년 가까이 그를 보필한 소아레스의 경험을 기반으로 추측컨대, 황자는 화가 안 난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대체 뭐가 그를 세상 모든 고뇌를 짊어진 것 같은 표정으로 몰두하게 만든 것일까?

“이번에 선택된 제물들이 언제쯤 볼드를 출발할 것 같으냐?”

갑작스런 질문에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누군가가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제물들이 준비를 마치기까지 평균적으로 그 정도 걸리는 것 같더군요.”

“어, 전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번 제물이 150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많아야 40명 정도였는데 말이죠. 규모가 3배 넘게 차이가 납니다. 아마 그만큼 준비에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일주일은 너무 짧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보름은 걸리지 않을까요?”

“……보름. 시기를 맞출 수 있겠구나.”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매만지며 먼 곳을 바라보던 황자가 이윽고 결심을 내렸다.

“경로를 조금 바꾸지. 보름 뒤 한 번 더 볼드에 들른다.”

“예? 하지만 볼드에서 구할 건 다 구했는데요?”

“아직 구하지 못한 게 하나 남아있지 않느냐.”

그 말에 소아레스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전하, 설마! 제물들을 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오오! 역시 소아레스야.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잘 안다니까! 이 정도면 사실상 부부 아니냐?”

“또 시답잖은 농담으로 얼버무릴 생각이십니까? 이번엔 안 됩니다.”

“남자의 순정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치부하는 건 너무하지…….”

“전하.”

소아레스가 단호하게 황자의 말을 끊었다. 입을 다문 황자는 나쁜 장난을 하려다 부모에게 들킨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자격지심에 빠져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지도 않다.”

짧은 한숨 뒤, 황자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생각 말라고 일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소아레스는 우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자이안이 떠난 뒤부터 지난날을 되짚어보았다. 우리가 오늘처럼 제물이 선택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 횟수로만 53번째다. 우리가 과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그들을 구하려 했다고 확언할 수 있느냐?”

“그건, 하지만……! 잊으셨습니까?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을 리가 있겠느냐.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오른다. 고함, 쇳소리, 피 냄새, 그리고 비명.”

그때는 나쟈의 세뇌가 지금처럼 제국 전역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전이었다. 그 탓에 황자와 동료들은 나쟈의 세뇌 능력이 얼마나 끔찍한지 가늠하지 못했다.

무기 밀수를 위해 들른 마을에서 죄 없는 백성 20명이 나쟈에게 목숨을 바치기 위해 차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황자는 주저 없이 그들을 구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제물 20명을 구하러 뛰어들었으나, 반대로 그 20명 모두가 거세게 반발했다.

나쟈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그들에게, 나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일생을 바쳐서라도 이뤄야 할 사명이며 위업이었다. 결국 구출대는 무력 제압을 시도했다.

20명 중 한 명이 죽었다. 불행한 사고였다. 한 명이 죽자 남은 19명은 목줄이 풀린 광견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하는 구출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였다.

패주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료 세 명이 죽었다.

두 명은 보장된 부귀영화를 박차고 나온 대귀족의 자제였고, 한 명은 나쟈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으나 황자와 만난 뒤 이를 극복한 늙은 귀족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쟈의 지배력이 손 쓸 수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뻗쳤다. 마치 황자가 그런 일을 겪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뒤로 황자는 나쟈의 칙령으로 선택된 이들을 구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렇게 구하지 않고 잘라낸 이들의 숫자와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비극이 되풀이될 뿐입니다!”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다. 방법을 달리하면 결과도 달라질 수도 있지.”

“왜 정체도 알 수 없는 소년의 말을 그리도 신경 쓰시는 겁니까?”

“자이안의 말도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고작 한 번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고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다니,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깨닫고 보니 토론은 어느새 황자와 소아레스 둘의 언쟁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다른 이들은 조용히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반군의 지도자는 황자였으니까.

잘못된 선택을 한다 싶을 때는 거침없이 직언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황자의 판단을 따를 것이다.

소아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아레스는, 엄밀히 말하면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려하는 것이다.

이 인정 많은 남자가 비슷한 실패를 또 겪게 된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될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어디, 소아레스 말고 또 반대하는 사람 있느냐?”

황자가 다른 동료들을 돌아보며 묻자, 그들은 저마다 쓴웃음을 지으며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라고 나쟈에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을 좋아서 그냥 방치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좋다!”

모두의 의견을 확인한 뒤 황자는 환하게 웃었다. 항상 그렇듯 자신감이 넘치는,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보름 뒤, 제2차 제물 구출 작전을 결행하겠다.”
 

* * *

「아티팩트를 만드는 거야.」

유리아에게 숨기는 것 없이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혼란에 빠진 그녀가 간신히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뒤. 자이안이 솔직하게 도움을 구하자 아르스가 말했다.

“아티팩트……? 가 뭐야?”

“펜던트와 비슷한 물건이에요. 근데 그걸 만든다고요?”

「뭐어, 펜던트도 아티팩트의 일종이기는 하지이. 지금 자이안의 실력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도 못 내는 고도의 아티팩트지만. 네가 만들 건 펜던트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단순한 거야.」

“그럼 다행…… 네? 제가요? 아르스 님이 만드는 게 아니고?”

아르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펜던트의 소환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던 자이안은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삼촌은요? 삼촌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나요?”

「난 파괴 마법의 지배자이지, 모든 마법의 지배자가 아니다. 정신 간섭, 세뇌, 뭐 그런 건 내 관할이 아냐.」

자이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불안해졌다.

“전 아티팩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황자한테 돌아갈 거냐?」

자이안은 잠시 갈등했으나 프레이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도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 자이안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이 누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저어언부 가르쳐줄 테니까아. 누나만 믿으면 아무 문제 없단 말씀!」

속성 과외와 실습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론. 이는 펜던트를 통해 교신하며 간략하게 이루어졌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기초, 그리고 세뇌 해제용 아티팩트 제작에 필요한 이론만 빠르게 짚고 넘어갔다. 깊이 파고들기엔 시간이 없었다.

자이안이 이론을 익히는 사이 아르스는 여러 번 소환되어 주위를 탐색했다. 나쟈의 세뇌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똑같은 세뇌처럼 보여도 최면이나 암시 같은 방식일 수도, 술자가 직접 대상의 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방식이 다르면 대응하는 아티팩트 역시 달라진다.

그런 모든 경우의 ‘세뇌’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아티팩트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필요 최저한의 지식만 벼락치기로 익혀야 하는 자이안이 손대기에는 버거운 영역이었다.

‘아주 강력한 암시, 그리고 감정 유도. 역시, 교만이 자이안에게 사용했던 것과 거의 똑같아. 범위가 넓어서 그런지 교만이 썼던 것보단 훨씬 약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각성자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거고, 일반인도 MP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저항할 수 있는 강도야. 아마 황자나 그 동료들이 그쪽이겠지?’

분석을 마친 뒤엔 견적을 짤 차례였다. 설계도, 필요한 소재, 이를 기반으로 자이안이 완제품을 만들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까지.

‘빠르면 2주 정도 걸리겠는걸. 하지만 그러려면 마물 소재가 필요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물이 멸종 직전인 지구와 달리 자이안의 세계에는 마물이 많았다. 복잡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도 아니니 하위 몬스터의 소재면 충분할 것이다.

“나쟈가 눈치챌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제국 내의 마물들이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사람들을 덮치지 않고 얌전히 숨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프레이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참에 응용 도발을 좀 배워 놓자. 어차피 아티팩트 제작에는 섬세한 MP제어가 필수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응용 도발은 마물을 자극해 자신을 공격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도발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복잡한 기술이었다.

익숙해진다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마물 중에서 목표 한 마리만을 끌어오거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적으로 인식되게 해 공격 대상에서 벗어나거나, 마물의 주의를 일시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리거나 하는 등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응용 도발을 익히고, 이론을 복습하고, 아르스가 가져온 소재로 기초적인 아티팩트 제작 실습을 하며 자이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유리아는 볼드의 상황을 정찰하고 음식과 야영 물품을 구해오는 등 잡다한 일을 도왔다.

“150명은 지금 한창 준비 중이야. 사람이 꽤 많아서 그런지, 볼드를 출발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는 모양이야. 내가 보기엔 한 12일 정도?”

“12일…… 다행이네요. 유리아 덕분에 마음이 좀 놓였어요. 고마워요.”

“이 정도야 별 거 아니지. 헤헤.”

별 탈 없이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자이안은 빠르게 기술을 배웠고 날짜는 아직 넉넉했다.

그러나 2주 차에 접어들고, 본격적으로 세뇌 해제용 아티팩트 제작에 돌입한 자이안은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앗, 아아……!”

복잡한 회로를 그려나가던 MP의 선이 아주 잠시 흐트러진 순간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판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자이안은 안타까운 탄성을 터뜨리며 필사적으로 MP를 제어했으나 이미 회로는 엉망이 된 뒤였다.

잠시 침묵하던 자이안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렵네요.”

“그러엄, 아티팩트를 만든다는 게 쉽지는 않지이. 괜찮아, 자이안은 잘하고 있어. 네 엄마였으면 거기까지 만들지도 못 했을걸?”

실제로 자이안이 실패한 것은 회로의 90% 이상을 완성했을 때였다. 그러나 실패는 결국 실패다. 완성을 목전에 둔 핵심 회로와 거기에 쓰인 소재는 쓸모없는 쓰레기더미로 화한 뒤였다.

“됐다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리아의 환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유리아는 남는 시간에 아르스에게 아티팩트의 기초를 틈틈이 배우고 있었다.

며칠 동안 감을 못 잡고 끙끙거리더니, 마침내 노력이 결실을 맺은 모양이었다.

“자이안, 이거 봐! 불이 켜져!”

유리아가 만든 건 스위치를 올리면 밝은 빛을 내는 램프였다. 아르스 왈, 기초만 확실히 배우면 각성자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아티팩트라는 모양이다.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에 따라 아티팩트 제작에 재능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벌써 만들었어? 유리아도 재능이 있네에. 제대로 가르쳐보고 싶을 정도야.”

“헤헤, 고마워요 언니! 그러면 전 볼드 정찰 좀 갔다 올게요!”

환하게 웃은 유리아가 홀가분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부러운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이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눈앞의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미리 준비해둔 소재들을 가져왔다.

지켜보던 아르스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말했지? 잘하고 있다고.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실패할까 봐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하면 완성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렴.”

“……네.”

마치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와 같은 말에 자이안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무념무상으로 회로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모아놓은 소재도 바닥을 보일 즈음, 깊게 집중하던 자이안은 멀리서 유리아의 기척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옆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데 오히려 먼 곳의 움직임은 명확히 느껴지다니.

다급하고 불안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자이안은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 다급하고 불안?

“유리아?”

자이안이 고개를 든 것과 급하게 달려온 유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멈춘 것은 거의 동시였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아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볼드에서 사람들이 출발했어.”

“……!”

자이안은 눈을 부릅떴다. 예상보다 1일 빨랐다. 그러나 유리아의 말은 아직 뒤가 남아있었다.

“그, 그리고…… 황자 전하가 사람들을 막고 있어.”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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