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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제국의 현실 (2) (33/210)


33화 제국의 현실 (2)
2022.11.05.


일행은 망연자실한 자이안을 반강제로 잡아끌어 볼드를 벗어났다. 대화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 자이안은 입을 꾹 다문 채 홀로 생각에 몰두했다.

“저대로 둘 수는 없어요. 사람들을 구해야 해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자이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얼빠진 표정이었다.

단 두 명, 유리아와 클라비수스 황자를 제외하고.

“그건 불가능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클라비수스 황자였다. 자이안은 의아함에 인상을 썼다. ‘불허’가 아니라 ‘불가능’?

“전하, 그 말씀은…… 나쟈에게 조종당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하는 볼드 사람들을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이안, 저들은 구할 수 없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자이안은 여러 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주 선 황자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통보하는 것처럼.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조종당하고 있다고. 정신을 조종당해 나쟈에게 진정으로 충정을 다하고,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려 하는 이들을 무슨 수로 막아야 하겠느냐?”

“그건…….”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말로 설득할까? 전혀 통하지 않으리라. 힘으로 제압한다면? 아까 전 볼드의 광란에서 예상컨대, 그들은 나쟈를 위해서라면 문자 그대로 죽음도 불사할 것이다.

강압은 끔찍한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유리아와 만나고 상단과 동행한 첫날 밤, 오크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녀는 포로로 붙잡은 도적들을 미끼로 쓰려 했다.

전체를 구할 수 없어서, 가장 쓸모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구하려 한 것이다.

“전하의 뜻은 알겠습니다.”

냉혹하지만 합리적이다. 자이안은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이의 각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지금부터 따로 행동하겠습니다.”

그러나 타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슨 말이냐?”

“전하께서는 동료분들과 함께 여정을 계속해 주세요. 저는 볼드에 남아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

담담함을 유지하던 클라비수스 황자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눈썹 끝이 뒤틀리고, 입매가 파르르 떨리고, 기어코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말했지 않느냐. 저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

“없는 게 아닙니다. 아직 찾지 못한 거죠.”

“뭘 어쩌겠다는 거냐? 설득도 협박도 통하지 않고, 나쟈의 명령을 완수할 때까지 결코 쉬지 않으며, 창칼이 심장을 꿰뚫는 순간에도 오직 나쟈만을 찬양하는 수백, 수천의 꼭두각시들을 대체 어떻게 구하겠다고?”

“방법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찾아봐야겠죠.”

“이런 니X럴! 귓구멍에 X이라도 박았냐! 무의미하다고! 불가능하다니까!”

“아직 해보지도 않은 일을 남의 말만 듣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러기 싫습니다.”

“이제 보니 참으로 고집불통이구나, 그대!”

“그러는 전하께서는 옛날에 비해 조금 변하셨네요.”

“……!”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언쟁이 자리를 피하고 대신 격해진 감정을 드러내는 거친 숨소리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자이안은 잠시 황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어쩌실래요?”

“으헿?!”

이런 상황에서 불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유리아가 요상한 탄성을 터뜨렸다.

“어? 나, 나? 나는 왜?”

“전하의 동료분들과 함께 행동하실래요? 아니면…….”

“자이안이랑 같이 갈게.”

척수반사가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른 대답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머리로는 황자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

“그러면 무리해서 저를 따라올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코르니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자이안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짧은 순간 자이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리아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하고 황자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자이안과 함께 할게요.”

“……그러냐. 그럼 마음대로 하거라.”

힘이 쭉 빠진 메마른 목소리로 답하고, 클라비수스 황자는 등을 돌려 자신의 동료들에게 향했다.

그 순간 자이안은 자신과 유리아, 그리고 황자와 그 동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기분이었다.

등을 보인 그에게 한 차례 깊게 묵례하고, 자이안은 유리아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10분 정도 걸었을까, 유리아는 이변을 알아차렸다. 자이안의 얼굴이 심상찮게 창백했다. 엄청난 실수라도 저지른 듯 보였다.

급기야는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 어, 어쩌죠?”

“왜 그래? 역시 아무 대책도 없이 따로 행동하는 건 좀 무모했던 거 같아?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근데 그렇게 떠나 놓고 돌아가면 황자 전하 엄청 화내지 않을까?”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요.”

“……엥?”

“옛날에 비해 변한 것 같다니, 저도 모르게 그런 심한 말을……. 전하께서 혹시 제 말에 상처 받으셨으면 어쩌죠? 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과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잠시 말문이 막혔던 유리아가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지금까지 그거 걱정하느라 그렇게 울상이었어?”

“웃을 일이 아니에요.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 처해 계신데 괜히 제 말 때문에 마음에 짐이라도 생기면…….”

“으음~ 자이안, 솔직히 말할게. 이미 늦었어.”

쿠웅!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자이안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아는 검지를 세우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생각해 봐, 자이안. 우리에게 볼드는 몇 명이 살고 있고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냥 지나가다 들른 도시야. 냉정하게 말하면 남남이야.”

무정한 단어 선택이었으나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이안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아는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전하에게는 어떨까? 볼드는 중앙에서 꽤 떨어진 곳이니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체감하긴 어렵겠지만, 볼드 사람들 역시 황족으로서 다스리고 보살펴야 하는 백성이잖아? 게다가 내가 보기에, 전하는 지배자답지 않게 백성을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성격인 것 같더라구. 그런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목숨을 버리려는 백성을 구할 수 없다고, 잘라내야 한다고 결단해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한번 상상해봐.”

솔직히 말해서, 자이안은 그 심정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은 결코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적어도 그 결단이 크나큰 고통이라는 사실, 그리고 마음에 깊게 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으리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자이안은 그런 사람에게 포기하지 않고, 잘라내지 않고 방법을 찾을 거라고 말한 거야. 네게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건 전하의 결단과 각오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어.”

“읏……! 전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 나는 알아. 코르니카에서 너를 봤으니까. 하지만 전하는 아니잖아?”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경솔했던 것이다. 황자와 논쟁을 벌인 것도, 그의 각오를 폄하하는 듯한 형태로 그와 헤어진 것도.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까요?”

“가장 확실한 건 아까 한 말을 전부 취소하고 전하의 방침을 따르는 거야.”

“그건…… 그건 할 수 없어요.”

볼드 사람들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자이안은 잠시 갈등했으나 결국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건 사과하지 않는 거야.”

곰곰히 생각한 유리아가 대안을 냈다.

“네?”

지금까지의 설명은 뭐였나 싶은 발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모든 분쟁이 사과와 화해로 해결될 필요는 없어. 화해는 타협이고, 양보이니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데 양보하는 건 이상하잖아? 네가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면 사과할 게 아니라 증명해야지. 네가 코르니카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구해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돼.”

“하지만 코르니카에서는…… 저는 실패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벤야 님도…….”

아,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꺼낸 그의 말에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경솔하게 황자와 언쟁을 벌인 것도, 그들과 떨어져 따로 행동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조금 전 황자와 헤어질 때 잠깐 드러난 어두운 표정도.

자이안의 의식 깊은 곳에 자신은 한 번 실패했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생각은 유리아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그를 괴롭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이안이 놀라울 정도로 잘 감췄기에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이래 놓고 뭐가 눈이 좋다는 거야? 이 바보.’

유리아가 그와의 동행을 결심한 이유는 그저 은혜 갚기가 아니었다. 타인을 위해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는 자이안의 올곧은 신념에 감동했다는, 그런 인간적이고 순순한 감정이었다.

때문에 그와 함께 행동하면서 힘들 때 지탱해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여태껏 이런 간단한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잘 들어, 자이안.”

유리아는 자이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당연히 슬퍼. 지금도 그래. 재판장에 세워지고, 얼굴도 모르는 온갖 사람들한테 욕을 들으면서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야.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온몸이 떨려. 무서워서 울 것 같아.”

유리아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이안. 그건 네가 실패해서 그런 게 아냐.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의 죄를 방관한 내가 짊어질 책임이야. 넌 실패하지 않았어.”

얼굴을 감싼 두 손에 힘을 더하며 유리아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 고향을 지켜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하지만 금지!”

자이안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아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두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넌 실패하지 않았어.”

자이안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마워. 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어.”

자이안의 고개가 또다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다시는 실패했느니 뭐니 하는 말 꺼내지 마. 알았지?”

자이안의 고개가 마지막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푸흡.”

결국 참지 못한 자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예요?”

“긍정하는 연습 시켜주는 거야. 너, 자기비하랑 부정이 습관이잖아?”

“습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맞아. 내가 본 거니까 확실해. 내 눈, 간파의 마안이라며?”

“……그럼 확실하네요.”

얼굴에 닿은 유리아의 두 손을 감싸 쥔 자이안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길게 숨을 내쉬고, 이윽고 자이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힘이 좀 나네요.”

“좋아. 그럼 볼드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보자!”

힘차게 말한 유리아가 다음 순간 불안한 표정으로 자이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방법 찾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나는 저렇게 단단히 세뇌된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지 상상도 못 하겠는데. 나중 돼서 무리였다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괜찮아요. 제게는 아주 든든한 조력자 ― 가족들이 있거든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잠깐만요. 금방 소개해 드릴게요.”

자이안은 펜던트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모든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그러나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고,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결국 지금까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삼촌, 아르스 님. 괜찮죠?’

「찬서어엉! 언제쯤 소개해주려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구우!」

「난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유리아 정도면 뒤통수 맞을 걱정은 없겠지. 뭐, 마음대로 해라.」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진심을 부딪친 유리아에게 이 이상 사실을 숨기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사실을 알게 된 유리아의 태도가 변한다고 해도 자이안은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유리아, 잠깐 손 좀.”

“손?”

유리아가 의아해하면서도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자이안은 그 손을 붙잡아 펜던트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유리아의 머릿속에 갑자기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지의 광경이 나타났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만.」

프레이가 먼저 심드렁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프레이 알코스다. 자이안의 삼촌이다. 아포칼립스라고 불러도 된다.」

“엥?”

뒤이어 아르스가 헤실헤실 웃으며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르시니아 트레인저야! 이름이 좀 기니까 아르스 언니라고 불러줘! 자이안의 영혼의 누나야!」

「참고로 얜 마흔아홉이다. 나보다 여섯 살 많지.」

“……엥?”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리던 유리아가 끼긱거리는 고개를 돌려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린 제 가족이에요.”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의문과 혼란을 모두 담아, 유리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에에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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