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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제국의 현실 (1) (32/210)


32화 제국의 현실 (1)
2022.11.04.


잡초가 무질서하게 자라난 도로를 자이안과 유리아, 클라비수스 황자, 소아레스를 비롯한 소수의 일행이 걷고 있었다. 행상용 짐마차 두 대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바위섬에 살면서 약탈만으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내륙에 발을 옮겨 물자를 보급할 필요가 있었다.

입을 것, 먹을 것, 반란에 쓰일 병장기 등을 이런 식으로 조금씩 구했다.

「제국의 자랑거리라더니, 관리 안 한 지 십 년은 된 것 같구만.」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제국 중앙대로는 ‘무궁한 영광의 길’이라고도 불리며, 제국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쟈가 황실을 장악하고 실권을 잡으면서 프레이의 말처럼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대로를 이용하는 사람도 자이안 일행 말고는 없었다.

「유통이 완전히 멈춘 것 같은데에?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과연 유지가 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다 무너진 상태로 껍데기만 남아있는지는 더 봐야 알겠지만…… 그것보다 자이안, 괜찮냐?」

내륙에 들어선 지 이틀. 그동안 자이안은 말수가 적어지고 평소의 밝은 표정 역시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마물의 냄새 탓이었다.

어디랄 것도 없이 감각에 닿는 모든 곳이 마물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정작 마물의 모습은 털끝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마물의 배 속을 헤매는 기분에, 신경이 곤두선 자이안은 사소한 일에도 과민 반응했다. 유리아를 제외하고는 알리지 않았지만, 이미 몇몇은 자이안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죄송해요, 삼촌. 아무래도 진정할 수가 없어서…….’

「미안할 거 없다. 각성자라면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일단 그리 타일렀으나, 좋지 않은 조짐임은 분명했다. 이렇게 24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는 언젠가 한계가 찾아오고 말 것이다.

-야, 크래프터. 뭐라도 좀 만들어봐. 저러다 애 쓰러지겠다.

-난 공학자야. 램프의 요정 같은 게 아니라구.

-그래서 만들 수 있냐 없냐?

-그거야 없지는 않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밑바닥부터 설계를 시작하고 재료를 어떻게든 준비한다 하더라도,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아티팩트를 만들어도 마음대로 저쪽 세계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 젠장. 아티팩트를 저쪽에 가져가려면 절차를 거쳐서 새로 등록해야 하던가?

-그렇지, 그렇지이. 안전 검증도 안 된 아티팩트를 가지고 넘어갔다가 펜던트 기능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

애초에 펜던트를 통한 소환은 엄밀히는 소환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었다. 먼저 소환 대상의 의식과 소지품을 데이터화해 복사한 뒤 클라우드로 백업한다.

통신기가 이를 펜던트에 전송하면, 펜던트가 임시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백업한 의식을 옮겨 심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지구의 실제 본인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소환이 이렇게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당연히 안전 문제 때문이었다.

무작정 한 명을 통째로 소환했다가 자칫 문제가 생겨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구 전체의 커다란 손실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너 조만간 한번 저쪽에 갔다 와라.

팔짱을 낀 프레이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고민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 진짜? 프레이 너, 자이안 독점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프레이는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싶어 아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쟤가 무슨 장난감이냐? 난 그거 독점하고 싶은 애새끼고?

-적어도 정신연령은 애…… 구엑. 노, 농담이야. 그렇게 가차 없이 여자를 때리다니. 힝.

-시끄럽고, 미리 견적이나 짜놔. 아예 저쪽에서 재료를 구해서 만들기만 하는 건 문제없겠지?

-아마도?

방침이 정해졌다. 프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신경이 곤두선 채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자이안의 모습을 보며 한 번 혀를 찼다.

-둘한테 연락을 돌려야겠군.

-아틀라스랑 세인트?

-그래. 둘 다 적잖이 바쁜 놈들이니 웬만하면 신경 안 쓰게 놔두려고 했는데…… 적어도 사정은 알고 있어야겠지.

다행히 여정 자체는 순탄했다. 마물은커녕 개판이 된 나라에서 흔히 나타나는 도적과도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

별 탈 없이 해가 지고, 일행은 가도에서 조금 벗어나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야영지 외곽,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쓸쓸하게 버려진 통나무에 자이안은 혼자 자리를 잡고 걸터앉았다. 야영 준비를 돕고 싶었으나 황자 일행은 한사코 만류했다.

유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인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고, 바꿔 생각하면 철저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결국 유리아는 야영을 준비하는 동안 훈련을 소화하고, 자이안은 이를 감독하며 마물의 습격을 대비하는 처지가 됐다.

‘슬슬 한계가 보이네.’

훈련에 매진하는 유리아를 바라보는 자이안의 눈에 우려가 깃들었다. 그녀의 실력은 괄목할 만큼 크게 늘었지만, 그만큼 한계에 부딪히는 것도 빨랐다.

이는 결코 유리아의 재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자이안의 훈련만으로는 그녀의 재능을 다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더 좋은 스승. 더 많은 실전 경험…….’

어느 쪽이건 당장은 여건이 되지 않았다. 유리아에게도 이를 설명했고, 그녀 역시 납득했기 때문에 성장을 실감하기 어려운 훈련을 이렇게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본래 유리아의 목표는 혼자서 여행할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

그리고 지금 그녀는 오크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이안만큼은 아니지만 마안 덕분에 색적 능력도 높다.

당장 자이안과 헤어져 홀로서기를 시작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삼촌, 아르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얘기는 절대 유리아한테 하면 안 돼, 자이안.」

아르스의 대답은 엄중한 경고였다.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자이안이 불현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야영지 쪽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떠신지요, 알코스 님?”

“소아레스 님.”

“편히 부르시지요. 곁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양해를 구한 소아레스가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멀다고도, 가깝다고도 하기 힘든 애매한 간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장검을 휘두르기엔 가깝고 단검으로 찌르기엔 적당했다.

“제국에서 자생하는 클라본이라는 허브를 우려 만든 차입니다.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지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뜻밖의 호의에 잠시 당황했으나, 자이안은 이내 작게 웃으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따뜻한 기운이 몸속에 스며들어 긴장된 근육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기분이었다.

“클라본 허브라는 이름은 처음 듣네요. 제국에서만 유통되는 허브인가요?”

“본래는 제국 내, 일부 지역의 특수한 환경에서만 자생하는 허브입니다. 5년 전, 전하께서 연구 끝에 안정적인 재배법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셨지요. 이 재배법을 공표해 제국의 새로운 특산물로 삼을 생각이셨습니다.”

그러나 나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브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황실을 탈출한 클라비수스 황자는 이 허브를 반군의 자금줄 중 하나로 활용하기로 했다.

“전하께서는 단순히 나쟈라는 여자가 황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반란을 결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황실을 지배함으로써 국정이 부패하고, 신민들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죄를 짊어지려는 것입니다.”

“그렇겠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마족이 제국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면 전하께서는 그 지배를 받아들였을 거예요.”

소아레스의 말을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소아레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경계심과 혼란이 드러나는 것을 자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전하와 함께 지낸 시간은 적지만,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있어요. 비록 잘못된 수단을 취하셨고 언젠가 그 죗값을 치르셔야 하겠지만, 순수하게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그 신념까지 깎아내려서는 안 되는 일이죠.”

“…….”

“어떻게 하면 저희를 믿어주실 건가요?”

고민 끝에 자이안이 선택한 것은 꾸밈없는 직구였다. 조심스럽게 접근해 은근슬쩍 떠보면서 진위를 파악하려 했을 소아레스에게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언제나 단정하게 묶은 매듭과도 같던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는 모습은 자이안의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모시는 분을 보필하며, 그분께 위협이 될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근위부의 직무입니다.”

희미하게 한숨을 토한 소아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업병과 같은 것이지요.”

“시간이 해결해 줄까요?”

“억만년이 지나더라도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평생 전하의 곁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경계하고, 의심하며, 검증하겠지요. 그것이 제 일이니까요.”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자이안은 뭐라 말을 꺼내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위로든, 걱정이든,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는 모욕에 불과하리라.

“그러니 알코스 님께서도 제게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소아레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지 않고 단검을 휘두르는 유리아를 잠시 바라본 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던 자이안은 작게 탄식했다.

“안타까워요.”

「모두와 진심으로 교감하며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건 과한 꿈이다.」

이성으로는 그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자이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프레이는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뭐, 꿈을 꾸며 산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자이안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이 사라지고, 대신 그의 얼굴에는 강한 결의가 엿보였다.

* * *

3일을 더 이동한 끝에 일행은 어느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동안 자이안은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하나는 날이 선 듯한 긴장감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점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매일 저녁 소아레스가 가져다준 클라본 허브티,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적응한 덕분이었다.

여전히 사방에 마물의 냄새가 가득했고 언제든 마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계심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그 상태가 그냥 익숙해진 것이다.

「내…… 내 시간은? 내 노력은?」

3일 동안 정신없이 아티팩트 제작 준비에 매진하던 아르스는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이안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재료 발주한 걸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고. 애꿎은 돈만 날리겠네. 힝.」

「너 돈 많잖아.」

「그거 내 돈 아니고 다 연구소 예산이거든? 내가 쓸 수 있는 건 손톱만큼도 안 되거든?」

「그 연구소 주인이 자기면서 앓는 척은.」

두 번째 변화는 자이안이 노골적으로 황자와 소아레스와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상대가 선을 긋는 것을 보고 실수로라도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던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자이안, 혹시 화났어?”

“글쎄요. 화가 난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상황을 만든 나쟈라는 마족에게요.”

황자는 적어도 겉으로는 자이안의 변화를 반겼다. 소아레스도 얼핏 봐서는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둘 모두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 뻔했으나, 자이안은 섣불리 그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무작정 다가간다고 진심을 나누고 친해질 수는 없다. 상대가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악의로 가득했던 저택에서 그나마 실낱같은 인연을 유지하며 자이안이 배운 사실이었다.

‘시간은 있으니까, 차근차근 하자.’

볼드라는 이름의 소도시는 자이안의 예상과 달리 사람도 제법 많고 행인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소도시처럼 보였다. 적어도 정오 무렵까지는 그랬다.

“사람들이…….”

행상인으로 위장한 황자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던 자이안은 문득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린다는 것을 느꼈다. 소아레스를 통해 한발 늦게 이를 알아챈 황자가 작게 인상을 썼다.

“쯧. 오늘이 그날이었나.”

“전하께선 뭔가 알고 계신가요?”

“설명을 듣기보다 직접 보는 것이 낫다.”

수천에 이르는 인파가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에 모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곳곳에서 노인이나 여인, 아이 등 노약자가 인파에 휘말려 쓰러진 채 짓밟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나쟈 님께서 새로운 칙명을 내리셨다!”

“프리엔 제국 만세! 나쟈 님 만만세!”

광장 중앙에 선 관리가 엄숙하게 소리치자 수천의 인파가 마치 한 몸처럼 만세를 외쳤다.

“하나! 볼드에 적용된 세수를 일괄 7할에서 8할로 인상한다! 나쟈 님께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다고 불쾌해하셨다! 하나!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500명을 징집한다! 나쟈 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전파할 새로운 동상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하나! 10세 이상 25세 미만의 여성 100명을 헌상한다! 나쟈 님께서 제도의 여자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 질렸다고 하셨다!”

“와아아아아!”

“나쟈 님께서 또 세수를 올리셨어!”

“이렇게나 볼드를 신경 써 주시다니!”

“오오! 나쟈 님, 나쟈 님을 위해서라면 이 심장을 꺼내 바칠 수도 있습니다!”

칙명을 모두 전파하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환호했다. 급기야는 서로 얼싸안거나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발에 차여 쓰러지고 짓밟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기쁨에 겨운 웃음을 끝까지 지우지 않았다.

“이게 지금 제국의 실태다.”

곁에 선 황자가 감정을 지워 없애버린 것만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은 끔찍한 악몽 속에 갇힌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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