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마녀, 나쟈 (31/210)


31화 마녀, 나쟈
2022.11.03.


딱 두세 명 정도가 살기 적당한 너비의 방에서 조촐한 환영회가 열렸다.

테이블에 놓인 요리는 만든 이의 실력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게 조리되어 있었으나, 요리에 쓰인 소재나 향신료는 결코 비싸다고는 하지 못할 것뿐이었다.

「이런 젠장. 이쯤 되니까 나도 사정이 궁금해지네. 황자란 놈이 자기 이름을 걸고 호언장담했는데, 나온 게 이 정도야?」

「아하하하~ 프레이는 먹는 거에 쓸데없이 까다로우니까아. 그래도 바위섬에 굴을 파서 생활하는 것치곤 호화롭지 않아?」

「그래, 그건 맞지.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을 황자가 고작 이런 식탁에 자기 이름을 걸 만큼 만족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라고! 저거 증류주로 병나발 불고 있는 거 봐라. 저게 황자냐 아니면 해적 나부랭이냐?」

프레이의 의문은 지당했으나 자이안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코스 구분도, 엄격한 예절도 없는 식사 시간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둘은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이안의 얘기는 담담하고, 간결했다. 말을 마친 본인이 이렇게 말할 내용이 적었나? 하고 놀랐을 정도였다.

벌써 세 번째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후계자로서 알레프 가문에 머물렀던 과거는 지금의 자이안에게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옛날 일일 뿐이었다.

“미오네 그 육시럴 년이!”

그러나 자이안의 얘기를 처음 듣는 황자는 담담하지 못했다.

자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버럭 소리치며 식탁을 거세게 내리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커흠. 험, 으흠! 며, 면목 없구나. 내가 말이 좀 헛나왔다. 그, 뭐냐, 해적 연기를 오래 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과몰입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 그거다. 메소드 연기! 내가 연극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지. 하하하!”

「아닌데? 아무리 봐도 자연스러웠는데? 저게 본성이 맞는 것 같은데?」

프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자이안은 어색하게 웃었고, 유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느라 인내심을 총동원해야 했다.

자기도 상황이 웃긴 걸 아는지,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는 둘의 반응에도 황자는 화제를 돌리느라 바빴다.

“그, 그래서 그 뒤는? 유리아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

일리움을 벗어난 이후는 얘기할 게 많지 않았다. 괜한 불신감을 주지 않으려면 지구의 각성자나 마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암살자 숫자는 좀 줄이자. 너덧 명 정도면 적당하겠군. 넌 암살자 너덧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밤중에 기습을 당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하인이나 병사들을 모두 잃고 만 거다. 홀로 살아남은 너는 자유를 찾기 위해 공화국으로 떠났고, 그 여정에서 유리아의 행상과 만나게 된 거지. 그다음엔…….」

즉석에서 거짓말을 짜내는 것도 자이안에겐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방면의 프로가 곁에 있었다. 프레이와 아르스였다.

덕분에 얘기는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됐고, 자이안과 유리아는 황자의 연민 어린 시선을 받는 처지가 됐다.

“둘 모두 큰일을 겪었구나. 이런 곳에 처박혀 혼자 처량함을 곱씹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이제 황자가 배턴을 이어받을 차례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래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어디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자가 증류주를 한 모금 삼키고는 탄식을 토하듯 말했다.

“지금 제국은 뿌리부터 썩었다.”

시간은 약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국 황실에 ‘나쟈’라는 이름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에게는 수많은 별명과 가면이 있다. 처음 그 여자가 황실에 나타났을 때는 당대 재상의 딸을 자칭했다. 재상도 긍정했고, 서기관도 실록에 그리 적었지. 그러나 정작 재상은 딸은커녕 아내조차 없는 홀몸이었다.”

나쟈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황실에 녹아들었다. 정치를 배우기 위해 재상의 일을 돕는 듯하더니, 언제부턴가 황실 중진만이 모이는 어전회의에 나타나고,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고 황제와 독대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매료되어 정무를 내팽개쳤고, 어전회의는 그녀의 말에 복종하는 꼭두각시들의 모임이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은 마치 해가 아침에 뜨고 밤에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정작 실록의 내용은 미치광이의 일기처럼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웠다.

나쟈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열변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만으로 도배된 부분마저 있었다.

“나는…… 끔찍하게도, 그게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여자가 40년째 변함없는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황실 전체가 그 여자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것도. 황제가 매일 잠에서 깨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그 여자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일인 것도. 매일 황실의 시녀 중 한 명을 택해 산 채로 모든 피를 뽑아 그 여자에게 갖다 바치는 것도! 그게 뭐가 이상한 건지,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이다!”

황자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격하게 소리쳤다. 그것은 분노를 토하기보다도, 엄습하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증류주를 들이켠 그가 빈 병을 아무렇게나 식탁에 내던졌다.

취기로 달아올라야 할 그의 얼굴은 겁에 질린 것처럼 창백했다.

“나는 대체 뭐가 달랐던 것이냐?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언젠가부터 그 여자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한 번 눈에 밟히고 나자 모든 것이 이상해 보였고……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았지. 아니, 아니다. 모두가 미치광이인 그 안에서 나 혼자서 비정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황자는 꼬박 2주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방에 틀어박힌 채 악몽과 환각에 시달렸다. 이대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즈음, 나쟈가 그를 찾아왔다.

고혹적인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 여자…… 그 마녀가 내게 이러더구나. 나처럼 멋진 장난감이 왜 멋대로 망가지려고 그러냐고. 그러고는 뭔가를 먹였다. 피였는지, 살점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장이었는지. 거짓말처럼 활력이 돌아오더구나.”

황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자책했다. 나쟈의 목적이 무엇이든, 결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놔둬서는 안 됐다.

유일하게 비정상인 자신이 허망하게 목숨을 버릴 것이 아니라, 나쟈의 앞길을 틀어막을 변수가 되어야 했다.

“근위부 몇 명만을 대동하고 야음을 틈타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 안에서는 마녀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으니. 다행히도 마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지 않은 이들이 근위부에 적게나마 존재했다. 소아레스도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였지.”

황자의 계획은 지방 귀족들을 설득해 일종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황실 전체가 나쟈의 꼭두각시 신세였으므로 반란이라는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쟈의 대응이 생각보다 빨랐다. 황실에만 그쳤던 나쟈의 마수가 제국 곳곳으로 뻗치기 시작했고, 황자와 소수의 동료들은 미처 행동할 틈도 없이 떠밀리듯 남쪽으로 도망쳤다.

“포기한 것은 아니다. 허나 거사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 법이다. 사람과 돈, 자원,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이지. 반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결과가, 그대들이 보는 대로다. 바로 약탈이지.”

그들의 약탈이 실제 해적들처럼 악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공통된 대의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니까.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빈곤한 자에게서 빼앗지 않으며, 바다 위에서 살아 돌아갈 수는 있을 만큼의 분량은 반드시 남겼다.

“그런 것들을 면죄부로 삼을 생각은 없다. 약탈은 약탈일 뿐, 빼앗긴 자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자 한다는 핑계로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이를 대의로 포장할 생각도 없고, 후안무치하게 용서를 빌 생각도 없다. 그저 아주 조금만 나중에, 제국의 모든 것이 정상화된 뒤에 죗값을 받기를 바란다. 그때 가서 빼앗긴 자들이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목을 내밀겠다.”

담담하게 얘기를 마친 황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안은 그의 얘기를 처음부터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말문을 뗐다.

‘제 추측이 옳다면, 아마 나쟈라는 여자는…….’

「마족일 거다.」

자이안의 추측을 프레이가 이어받았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세 각성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어느 정도 노화를 억제할 수는 있다. 그럴수록 더 말년에 큰 반동이 찾아올 뿐이지. 40년 동안 외모가 변함이 없다고? 마법만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

「마법으로 불로장생이 가능했으면 지금쯤 지구 쪽 마법사들은 MP가 쪽쪽 빨려서 다 말라 죽었을거얼. 사람의 욕심은 원래 끝이 없는 법이니까!」

「흥! 그런 놈들은 그 전에 내 손에 붙잡혀서 재만 남았을 거다. 아무튼, 40년 동안 외모가 똑같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원래 수백 년 넘게 장수하는 생물이거나, 애초에 정상적인 생물이 아니거나.」

‘하이엘프일 가능성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 하이엘프가 범인일 거라고 믿고 싶지는 않아요.’

나쟈가 마족일 거라고 확신한 가장 큰 이유는 황실 전체를 조종하는 매료, 즉 세뇌 능력이었다. 교만과 싸웠을 때도, 펜던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세뇌당해 자멸하고 말았으리라.

‘전하께도 마족에 대해 얘기해드려야겠습니다.’

「쯧, 이런 비밀이 쓸데없이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지. 일반인만 가지고서는 수백 명이든 수만 명이든 마족 상대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니까.」

합의를 마친 자이안은 일리움을 떠나 유리아를 만난 뒤 코르니카에서 있었던 일들을 정정해서 다시 얘기했다. 끝까지 들은 황자는 쉽사리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마족이라니. 그러니까 그 마녀가 마물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냐?”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단 한 번 마주쳤을 뿐이니까요. 아마 마물과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마물보다 더 상위 격의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마물보다 더 위의 존재…… 끔찍한 일이로구나.”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고, 그만큼 영토 곳곳에서 벌어지는 마물 사태는 오래 전부터 큰 과제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마물보다 상위의 괴물이 존재한다는 건 국방에 지금 이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마녀가 나타난 뒤부터 영토 전역에서 올라오던 마물 목격 보고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쟈라는 마족이 마물을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니, 헤아려봤자 의미가 없겠구나.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될 건 명약관화하니 말이다.”

황자는 미간에 주름을 새기고는 길게 탄식을 뱉었다. 반면, 자이안은 상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오히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나쟈라는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지 않습니까?”

자이안이 단순명쾌하게 말했다.

“그럼 그냥 직접 찾아가서 때려잡으면 그만 아닐까요?”

“…….”

황자는 자이안이 몰래 증류주라도 마시고 취했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16674652323578.png

1667465232358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