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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제국의 황자 (30/210)


30화 제국의 황자
2022.11.02.


적의 기함이 백기를 내건 채 천천히 다가왔다. 쌍안경 너머로 보이는 적병은 저마다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든 채였다.

기적과도 같은 그 광경에 로빌리오 선장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신세만 졌구만. 이럴 거면 처음부터 잘 좀 대해줄걸. 벤야 그놈도 그랬지? 선입견을 버리라고. 이거, 나중에 지옥에 가면 벤야 놈한테 욕 좀 얻어먹겠어.’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쌍안경을 내렸다. 이제는 육안으로도 갑판 위에 선 상대의 표정까지 보였다.

선두에 자이안의 모습이 보였고, 그 뒤에 아마 선장인 듯 보이는 30대 초중반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팔다리가 묶여 있지도 않았고 어디 다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일이 잘 풀린 게 맞겠지?’

선장의 불안을 뒤로하고 두 배가 거의 부딪칠 듯 가까워진 뒤 멈췄다. 갑판을 훌쩍 뛰어넘은 자이안은 기다리고 있던 선장과 유리아에게 향했다.

“어떻게 됐소? 협상…… 이걸 협상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잘된 거요?”

“네. 이제 해적들은 결코 이 배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흐린 자이안이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아, 아무래도 저희는 저쪽 배로 옮겨 타는 게 좋겠어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슬쩍 뒤를 돌아본 자이안은 난감해진 나머지 미간을 찌푸렸다. 고민하던 그는 유리아에게 다가가 빠르게 귓속말을 했다.

“저쪽 선장님이 프리엔 제국의 황자 전하세요. 아무래도 사정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황……?!”

기겁하며 소리치려는 유리아의 입을 자이안이 급하게 막았다. 유리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이 다시 손을 풀었다.

“정말로? 잘못 본 거 아니지?”

유리아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자이안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자가 왜 이런 곳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어?”

“그건 이제부터 들어봐야겠죠.”

“그것도 그러네. 알았어.”

이제 로빌리오 선장에게 사정을 설명할 차례였다. 거세게 반발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두루뭉술한 설명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고개만 주억일 뿐이었다.

“내가 말린다고 두 분이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나도 이래 봬도 눈치가 좀 있거든. 저놈들, 해적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해적이 아니라 다른 집단인 모양인데…… 내 말이 맞지 않소?”

“그건…….”

“곤란하면 대답할 필요는 없소. 반응을 보니 들을 필요도 없어 보이고. 그러면…… 언제 떠날 거요? 지금 당장? 아니면 조금 이따가?”

괜히 시간을 끄는 건 양쪽 모두에게 폐가 될 것이다. 자이안이 유리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쯧, 그렇구만.”

둘의 소리 없는 대화를 지켜본 선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특히 자이안 경. 짧은 항해였지만, 함께 했던 시간은 잊지 못할 거요. 정말 고맙소. 아가씨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오.”

“미안하다뇨! 저야말로 고마워요. 선장님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제국까지 올 수 있었잖아요. 범죄자의 딸인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흥! 내가 아무리 무식하고 배운 게 없어도 그럴 수는 없지. 난 그놈이 코르니카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잘 모르고, 솔직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게 아가씨는 범죄자가 아니라 벤야의 딸이오. 그러니까, 거 뭐냐……. 앞으로 힘내고, 지지 마시오. 아가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결코 잊어선 안 되오.”

인사를 마치고 자이안과 유리아는 해적의 기함으로 넘어왔다. 아주 작은 희망 호는 아쉬운 듯 그 자리에 얼마간 머물다가 천천히 선수를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괘념치 말거라. 보다시피 나는 스스로 황자라 칭하기 부끄러운 위치까지 전락했다. 그런 내가, 이런 망망대해에서 허례허식을 차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해적선장, 클라비수스 데인 가이가우스 융 하덴-프리엔 제5 황자가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얼굴은 살짝 붉었다. 조금 전 자이안에게 보인 모습이 부끄러운 것이다.

“지위는 물리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 어린 제게 하셨던 말씀이죠.”

자이안은 그 모습을 짐짓 모른 척하며 과거의 기억을 들췄다. 한차례 눈을 크게 뜬 황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런 사소한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알레프의 이름을 사칭하는 황실의 첩자는 아닌 모양이로구나. 일리움 유일의 변경백, 인류 수호의 마지막 보루, 알레프 백작가의 적자 자이안 알레프여.”

“지금은 자이안 알코스라 칭하고 있습니다. 거의 10년 만에 뵙습니다, 전하.”

자이안이 황자에게 자기 정체를 정직하게 밝힌 이유가 있었다.

우선, 여기까지 온 이상 미오네의 추적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하나. 웨코스에 들어설 즈음부터 안전이 확보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거리낌 없이 정체를 밝혀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상대와 진솔하게 얘기를 나누려면 먼저 자신부터 꾸밈없는 태도로 다가가야 한다.

“알코스라니? 알레프의 이름을 버렸단 말이냐?”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황자가 이윽고 조금 전보다도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이런 기이한 운명이 있나! 보아하니 그대가 품은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구나.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둘의 어깨를 두드리며, 황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들을 나와 친우들이 머무는 성에 초대하고 싶다. 와 주겠느냐?”

들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자이안과 유리아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7척의 배가 제국 연안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바위섬에 정박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한 섬이었으나 앞장을 서는 클라비수스 황자의 발걸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자이안과 유리아는 그를 뒤따라 인공적으로 깎은 어느 동굴에 들어섰다.

섬 내부에는 이런 동굴들이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동굴들은 저마다 식당과 부엌, 숙소, 병기창 등 여러 장소와 이어져 있었다.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겠다는 황자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럴듯한 비밀기지이기는 한데…… 대체 왜 황족이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거지? 아까 자이안을 보고 황실의 첩자 운운한 것도 좀 이상하고. 황위 쟁탈에서 밀려나기라도 했나?」

프레이의 의문은 지당했다. 하지만 단순히 황위 쟁탈에서 밀려났다기에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기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이런 외진 곳에 숨어서 살 이유가 없다.

모반을 일으켰다가 도망친 것이라면, 제국 앞바다에서 해적 행세를 하는 건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다.

「어째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은데. 자이안, 적당히 이유를 대서 빨리 여길 뜨는 게 낫겠다.」

‘왜요?’

「왜는 인마, 괜히 오지랖 부렸다가 상관도 없는 일에 발목 잡힐까 봐 그러지.」

‘하지만 보석탑으로 가려면 제도를 경유해서 제국을 가로지르는 게 가장 빠릅니다. 제도의 사정을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오, 그게 아니라……. 젠장, 이거 아무래도 불길한데…….」

프레이의 불안을 뒤로하고 통로를 걷기를 얼마간, 한 명의 여성이 일행 앞에 나타나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일은 잘되셨…….”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녀가 황자의 뒤에 선 자이안과 유리아를 보고는 말을 흐렸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유리아는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췄다. 반면 자이안은 그냥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의 태도를 본 유리아도 머뭇머뭇 경계를 풀었다.

“소아레스! 항상 이렇게 마중해주어 고맙다. 인사하거라. 자이안 알레프와 동료인 유리아 알즈레드다.”

“알레프? 일리움의 알레프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이름에 소아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복마전을 틀어막은 보루, 알레프 변경백의 이름은 바다 건너 한참이나 떨어진 제국에 전해질 만큼 유명했다.

“그래! 내가 이 둘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만났다. 대단한 우연이지 않으냐?”

황자의 설명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아와 자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작게 웃으며 묵례했고 유리아는 다시 경계 태세를 갖추려다가 자제했다.

둘에게서 시선을 거둔 소아레스는 황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했다.

“전하. 신분이 확인되지도 않은 자들을 들여보내다니요. 저들이 황실의 첩자라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괜찮다. 유리아는 나도 모르는 자이지만, 자이안은 본인이 확실하다. 유리아 역시 자이안의 동료라면 믿을 수 있을 터.”

“외모나 몸짓, 목소리 따위는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제국 첩보부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전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확실히 그대의 걱정은 옳구나. 허나 소아레스여, 그대들 근위부는 저 둘에게서 아무런 수상함도 찾지 못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대들의 능력을 믿는다. 그대들이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면,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수상하지 않다.”

그 말에 소아레스는 짧게 숨을 삼켰다. 표정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으나 눈동자는 감동을 받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는 길에 숨어서 기웃기웃 쳐다보던 놈들이 근위부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었나 보구만.」

아무렇지도 않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각성자 특유의 예리한 감각 탓에 본의 아니게 그들의 사정을 엿들은 처지가 된 자이안은 무안한 심정이었다.

유리아도 같은 이유로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따라온 게 아닐까? 생각보다 되게 사정이 복잡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떠날 수는 없어요. 일단 사정이라도 들어보죠.”

“으으. 너 막 그렇게 오지랖 부리다가 제 발로 말려들려고 그러지? 코르니카 때처럼.”

유리아가 귓속말로 투덜대자 프레이가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그렇지! 유리아가 말 한 번 잘하는구만. 자이안, 너 진짜 오지랖 좀 적당히 부려라. 그러다 제 명에 못 산다.」

‘그냥 사정만 들어보겠다는 겁니다.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너무 지레짐작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말이 안 통하네, 진짜. 하여간 이런 건 지 엄마를 쏙 빼닮았다니까.」

프레이의 푸념에 자이안은 소리를 내 웃을 뻔했다. 자이안에게 그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오오! 그래! 소아레스, 귀한 손님이 찾아왔으니 진수성찬을 준비하겠다고?! 하하하하! 그럴 필요 없다니까! 하지만 꼭 그러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좋다! 고기를 준비해라! 그렇지, 술도 가져오거라!”

불현듯 클라비수스 황자가 동굴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둘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런 대화가 오갔을 거라고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전하? 술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어……? 허, 허나 소아레스여. 모처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술조차 내주지 않아서야 내 인품이 의심받지 않겠느냐? 이런 경우에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제왕의 자질이 이라고 생각한다만.”

소아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황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어쩐지 황자의 등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이마를 짚은 소아레스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조리장에게 말을 전해두겠습니다.”

“오오…! 소아레스! 너의 충심이 눈부시게 빛나는구나! 사랑한다!”

“죄송하오나, 전하. 해적의 아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농담 섞인 고백을 단칼에 거절한 소아레스가 마지막으로 크게 묵례한 뒤 자리를 떠났다. 황자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기대하거라. 우리 조리장이 성격은 좀 까다롭지만 솜씨는 황실 조리장과 비교해도 지지 않는다.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마.”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하. 좋은 부하를 두셨네요.”

소아레스가 떠난 자리를 보며 자이안이 솔직하게 말했다.

“부하가 아니다, 자이안이여.”

황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잔잔하게 웃으며 반론했다.

“여기 있는 모두, 나의 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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