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바다 여행 (2)
(29/210)
29화 바다 여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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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바다 여행 (2)
2022.11.01.
항해는 순조로웠다. 날씨도 좋았고, 선내 분위기도 눈에 띄게 밝았다.
그전에도 결코 어둡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승객들과 선원들 모두 무슨 일이 닥쳐도 괜찮을 거라는 낙관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전설로나 전해지던 해양 마물의 습격을 극복했다는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자이안은 며칠 정도 버티나 싶다가 다시 뱃멀미로 드러눕고 말았지만,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해양 마물이 재차 나타났다. 항해 23일 차의 일이었다.
요격전에 나선 선원들 중 불안해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골골거리던 자이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마물을 쓰러뜨렸다.
‘이 무기도 많이 익숙해졌네요.’
펜던트와 융합되어 있던 나이아의 검, ‘스펙트럼’은 사용자의 MP 제어에 반응해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을 가졌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MP 제어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정교하게 변형시키는 것부터 일단 어려웠다. 게다가 변형에 성공해도 형태를 유지하는 데에 MP를 무식하게 빨아먹었다.
애초에 오직 나이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보니, 에너지 효율 따위는 내다 버린 결함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무기이기는 했다. 평범한 무기로는 그 거대한 해양 마물을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으리라.
「있잖아, 프레이? 난 가끔 우리 자이안의 재능이 무서워. 나이아도 스펙트럼에 익숙해지는 데 꼬박 이틀은 걸렸는데…….」
「내가 보기엔 걔나 쟤나 다 똑같은 괴물 같다. 애초에 나이아가 처음 썼던 건 조정도 하다 만 프로토타입이었잖아. 그러고 보니 그거, 실전에 한 번 썼다가 중간에 폭발하지 않았냐? 응? 개발자 양반?」
「어어…… 그, 그렇게 옛날 일은 기억 안 나는데에~.」
의문점도 있었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해양 마물이 두 번이나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 프레이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아무래도 마물이 널 좋아하는 것 같다.」
“…….”
자이안은 자신과 프레이 사이를 차원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다.」
「나도 나름대로 좀 생각해 봤는데에, 아무래도 우리 자이안한테 마물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하다고 봐.」
아르스의 첨언까지 뒤따르자 자이안도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을 시작한 뒤로,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 위주로 다녔다고는 해도 너무 자주 마물과 만났다.
‘제 각성자로서의 특성이 마물을 끌어들이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네가 각성자인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지.」
「마물은 원래 인간을 우선적으로 공격하잖아? 통계적으로는 그중에서도 일반인보다 각성자를 우선하는 경우가 더 많거드은. 그리고 우리 자이안은 그쪽 세계에서 유일한 각성자잖니?」
「이제 유일하진 않지. 유리아도 각성자니까.」
「아, 그렇지. 우리 유리아도.」
어느 쪽이든 앞으로도 마물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강해지기 위한 여행이고 마족의 존재도 알게 됐으니 그 사실 자체는 상관없었지만, 자칫 주변 사람들이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점은 걱정이었다.
극복하는 방법은 쉬웠다. 더 강해지는 것. 무고하게 휘말리는 이들까지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다.
꾹 쥔 주먹을 내려다보던 자이안이 결심한 표정으로 객실을 나섰다. 바로 옆 유리아의 객실로 향한 그는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하고, 대답이 들려오자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리아, 우리 훈련해요.”
“……헤?”
유리아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항해 25일 차. 동이 틀 무렵부터 하늘이 흐렸다. 항해사의 보고에 의하면 풍랑이 몰아칠 조짐은 없었으나, 선내 분위기는 비에 젖은 헝겊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갑판에서 새벽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자이안과 유리아도 이런 분위기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부디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자이안의 바람을 배신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정오를 지날 무렵에는 긴장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선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땡땡땡땡땡!
급기야 날카로운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기어코 불행이 배를 덮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찾아온 것은 풍랑이 아니었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다급한 외침이 확성관을 타고 선내에 울렸다.
* * *
갑판 한복판에 선 로빌리오 선장은 쌍안경으로 바다 너머를 노려보며 크게 혀를 찼다. 객실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자이안과 유리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해적이라뇨?”
“말 그대로요. 전방에서 세 척, 후미에서 두 척, 좌우에서 각각 한 척. 정체불명의 함선 총 7척이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소. 염병할, 자기네 앞바다에서 해적이 활개 치고 다니는 걸 그냥 놔두고 있어? 잘나신 제국의 질서도 똥통에 처박혔구만.”
선장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토해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습격이 분명했다.
아주 작은 희망 호는 공화국의 기술을 아낌없이 때려 박은 초대형 갤리온이었으나, 그래 봐야 대포 몇 문 탑재된 상선에 불과했다.
7척의 배로 둘러싸인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군. 자이안, 선제공격이다. 적들이 가까워지면 아무 배나 한 척 침몰시키고, 놈들이 당황한 틈에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 거다.」
프레이가 작전을 제안했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저 배에도 사람이 타고 있잖아요.’
적이 마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못 하겠다고? 널 죽이려고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는데, 상대가 마물이 아니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맞아주겠다?」
프레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자이안도 자신이 바보처럼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사람인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단을 섣불리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적함이 다가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어요. 그때까지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생각해보죠.’
「아오, 이 답답한 놈. 어떻게 한 번을 쉬운 길로 갈 생각을 안 하냐.」
‘쉬운 길로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프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그는 직감했다. 이 말싸움은 자신이 졌다.
「젠장. 그래, 오랜만에 같이 머리 좀 맞대 보자. 아르스, 장비 그만 만지작거리고 너도 이리 와라.」
즉석에서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건 좀 아니다, 저건 별로다, 몇 가지 의견이 오가기를 몇 분.
「이쪽에서 건너가서 인질을 잡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해적선장이라든지.」
아르스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냈다.
「선장을 인질로 잡아도 놈들이 아랑곳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거세게 날뛸 수도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죠.’
잠시 갈등한 자이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자이안이라도 그렇게까지 달려드는 적에게 관용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좋아. 적의 기함이 어느 건지 알아야겠군.」
「그렇지, 그렇지이.」
‘선장님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자이안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질문을 들은 선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방법이 있소?”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은 선장에게 계획을 간단하게 전했다.
“……미친. 난 그 계획 반대요!”
뜻밖에도 그가 거세게 반대했다.
“이런 젠장. 내가 살다 살다 바다 위에서 해적 놈들 목숨 걱정하는 또라…… 크흠, 성인군자는 또 처음 보는구만. 자이안 경, 해적이란 건 말이오. 우리랑 비슷하게 생기고 사람 말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는 마물이오. 경처럼 훌륭한 분이 목숨 걸고 나서도 좋을 놈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지! 도망치지 못하면 그땐 싸우고! 자이안 경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목숨을 걸고.”
“그러면 많은 선원들이 죽거나 다치겠죠. 승객들한테도 큰 피해가 미칠 겁니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선장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배와 함께 바다 위에서 죽는 건 각오한 바였다.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애초에 바닷사람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승객들은 잘못이 없었다. 덩치만 큰 상선이 7척의 배를 상대로나 싸워 이긴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쓰러지면 승객들은 모두 해적의 전리품이 될 터.
“괜찮아요. 해적이 아무리 무서워도 해양 마물보다 무섭겠어요?”
말문이 막힌 선장을 뒤로하고 자이안은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일이 잘 풀리면 바로 돌아올게요.”
“일이 잘 안 풀리면? 우리 버리고 혼자 가려고?”
“어…… 자, 잘 안 풀려도 돌아올게요. 꼭이요.”
짓궂은 농담이었다. 히히 웃는 유리아를 보니 자이안도 긴장으로 죄어 있던 마음 한편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냐. 너무 긴장하지 말자.’
아주 작은 희망 호는 최대 20노트라는, 그 거대한 몸집으로는 믿기지 않는 빠른 항속을 내는 배였다. 문제는 해적들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함에 공화국의 최신 기술이라도 쓰인 게 아니라면, 항속을 보조하는 마법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어딜 가든 대접받는 귀한 인재인데, 고작 해적질이나 하고 있다니.
‘마법사를 먼저 제압해야 하나?’
직접 닥친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마침내 적 기함과의 거리가 백여 미터로 좁혀진 순간, 자이안이 펜던트를 움켜쥐며 자리를 박찼다.
‘도약으로 좁힐 수 있는 거리는 3~40미터 정도. 나머지는…….’
펜던트를 쇠사슬이 달린 장창의 모습으로 변형시킨 자이안이 사슬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있는 힘껏 창을 내던졌다.
창이 굉음을 내며 기함의 메인마스트에 꽂히고, 후폭풍에 해수면이 난폭하게 요동쳤다. 적의 갑판 위에서 공포와 경악이 섞인 고함 소리가 들렸다.
쇠사슬 끝에 매달려 함께 날아간 자이안은 마스트에 두 다리를 박아 속도를 죽였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마스트가 불길한 소리를 내더니 벌채된 거목마냥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통일감이 느껴지는 제복을 입은 채 해적답지 않게 질서정연한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적들이 망연히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다들 얼이 빠졌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적을 제압할 기회다.」
프레이의 조언을 들은 자이안이 곧바로 움직였다. 다행히 선장으로 보이는 이는 아주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해적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이라도 벌였던 모양이다. 적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은 자이안은 그대로 선장의 등 뒤에 착지해 펜던트를 변형시킨 장검을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안녕하세요.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귀하께서 이 해적단이 선장이 맞으신가요?”
“…….”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곤혹스러운 시선과 침묵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두 각성자는 그런 적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칼 내려놓고 악수라도 요청하지 그러냐.」
“이런 니기미 호로 잡놈의 새끼를 봤나.”
그 순간 붙잡힌 선장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야 이 육시럴 놈의 개자식아. 뭐? 귀하? 안녕하세요? 오냐, 지금 귀하께서 제 목에 겨누고 계신 그 니미 XX한 쇠몽둥이 덕분에 안녕 못하시다. 어쩔 건데. 꼽냐?”
「오우…….」
상상을 뛰어넘는 직설적인 욕설에 두 각성자는 멍청히 탄성을 터뜨렸다. 오죽하면 지나치게 노골적인 욕설에 펜던트의 번역 기능이 이상을 일으켰을 정도다.
듣고 있던 자이안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가 놀란 건 욕설의 수위 때문이 아니었다. 선장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자이안이 슬쩍 물었다.
“……클라비수스 황자 전하?”
욕을 내뱉던 선장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이안을 바라보며,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