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바다 여행 (1) (28/210)


28화 바다 여행 (1)
2022.10.31.


말을 타고 달려도 며칠은 걸릴 거리를 와이번은 반나절 만에 가로질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웨코스 남부의 항만도시였다.

유리아를 향한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거 벤야와 좋은 인연을 쌓은 상선의 선장 ‘레온 로빌리오’가 동쪽으로 향하는 항행에 둘을 태워주겠다고 흔쾌히 나선 것이다.

유리아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고, 그다음에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결국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난 아가씨가 조카딸마냥 익숙하다오. 벤야 그놈이 만날 때마다 은근슬쩍 자식 자랑을 하는 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 선장들 불러다가 이거저거 협의를 하던 시기에 시간만 남으면 떠들어댔지. 그 특유의 정이라고는 소똥만큼도 없어 보이는 희멀건 표정으로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하면서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푸흡! 아, 아빠가 정말 그랬어요?”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겠소? 그러니 사양하지 마시오. 아가씨는 내게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오.”

둘의 대화를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며 자이안은 내심 안도했다. 지난 며칠간, 자이안은 유리아의 곁에서 적잖이 무력감을 곱씹어야 했다.

아무리 강해져도 마음의 상처를 타인이 치유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렸을 적 나이아가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유리아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지금 그녀의 모습이 눈부셨다.

‘제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괴로워했겠죠. 마음이 강한 사람이에요.’

「……듣다 보니 가관이네 이거.」

어이가 없어진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쟤가 저만큼 회복되는 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 놈이 지금 뭐라는 거냐?」

‘……누구요? 저요?’

「그래요. 너요.」

「아하하하하. 우리 자이안이 자기 평가가 좀 많이 낮기는 하지이.」

「웃지 마, 인마. 자이안, 그건 겸손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다. 자기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건, 널 믿고 의지하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과 똑같다.」

그 말에 자이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다. 자기 가치를 자신이 똑바로 인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건 오만이 아닐까?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항상 지켜보면서, 좀 삐끗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혼낼 테니까.」

「엥? 나도?」

「그럼 넌 여기 밥이나 축내러 왔냐? 여기 내 집이거든? 쫓겨나고 싶냐?」

고민하던 자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도, 아르스도, 아직 보지 못한 다른 각성자들도 자이안에게는 제2의 스승이며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하룻밤을 보낸 둘은 로빌리오 선장의 상선, 아주 작은 희망 호에 올라탔다. 부두에 정박한 그 배는 선체의 길이가 100미터에 달했고 4개의 거대한 마스트가 우뚝 솟아 있었다.

선체 외부는 빠짐없이 강철로 뒤덮여 있었다. 근처의 다른 배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내가 바로 이 녀석의 선장이자, 선주라 이거지. 뭐, 반은 벤야 놈 덕분이지만 말이오. 벤야 그놈, 하여간 난 놈이었다니까. 그놈 말 무시한 놈들은 죄다 쫄딱 망했고 그놈 말대로 한 놈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놈들이 됐거든. 나처럼 말이오.”

둘에게는 외국 귀족 등 귀빈에게만 제공하는 최고급 객실이 배정되었다. 이제는 유리아도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선장에게 크게 인사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 아빠 진짜 바보 같아.”

출항 직전. 유리아는 자신에게 배정된 1인실에서 나와 구태여 자이안의 방에 그와 함께 있었다.

사실 자이안은 다 큰 남녀가 한 방에 있는 게 꺼림칙했으나,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도저히 내쫓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런 짓이나 하고. 바보, 멍청이.”

「……똑똑한 사람이 언제나 똑똑하고 올바른 선택만 하는 건 아니지.」

객실 바닥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희망 호가 부두를 벗어나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웨코스가 멀어진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나라였다.

* * *

지옥은 실재하며, 바로 바다 위에 있다.

“으으… 어어…… 에에……….”

항해 사흘째, 자이안은 그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자이안, 괜찮아?”

객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유리아가 들어왔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시퍼렇게 죽은 얼굴로 신음만 흘리던 자이안은 흐리멍덩하게 눈을 떴다.

“천사님…… 저 죽일 거면 그냥 빨리 죽여 주세요……. 더는 고통 받기 싫어요…….”

“뱃멀미 갖고 엄살은. ……엄살 맞지? 진짜 죽는 거 아니지?”

“어윽……. 미, 미안해요. 농담이 조금 과했죠.”

“그래도 농담할 기운은 남아있네. 수건 갈아줄게.”

자이안의 사과에 유리아는 피식 웃으며 침대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 작은 진동마저도 자이안은 죽을 맛이었다.

「신기하구만. 각성자는 멀미 같은 거 거의 안 겪는데.」

「우리 자이안은 감각이 되게 예민하잖아? 그게 좀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자이안도 뱃멀미가 이렇게 심할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애초에 배를 탄 경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자이안이 생각하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다 위라서 MP 농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요.’

두 각성자는 그 추측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맹점이었다.

지구는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대기 중의 MP 농도가 폭증하고, 이게 시간을 두고 퍼지면서 대부분의 지역이 균등한 MP 농도를 가지게 됐다.

자이안의 세계는 달랐다. MP 농도 자체가 지구에 비해 옅었고, 그마저도 마물이 출몰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농도 차가 컸다.

하물며 해양 마물은 목격자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해양 마물을 전설상의 존재로 여겼다.

대기 중에 가득 찬 잉여MP를 흡수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이안의 특성은 이런 상황에서 독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마물이라도 좀 나타나 주면…….’

거기까지 중얼거린 자이안이 돌연 눈을 떴다.

“……마물 냄새.”

“응?”

벌떡 일어난 자이안이 감각을 집중했다. 평소였다면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정도로 옅은 냄새였다. 그러나 3일을 내리 멀미에 시달린 탓인지, 오히려 마물을 감지하는 감각은 더없이 예민해져 있었다.

자이안은 비틀비틀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이안, 어디 가려고? 아, 화장실? 사람 불러올 테니까 그냥 누워서 쉬고 있어.”

“마물이…… 올 거예요.”

상상도 못 한 말에 유리아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자이안은 힘없이 객실을 나섰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리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따랐다.

“마물이라니? 이런 바다 한복판에?”

“아직 거리가 멀지만…….”

항해 중인 배가 마물에게 습격당하는 건 그야말로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편으론 다행스럽게도 냄새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마물이 가까워지고 있다.

「나나 아르스를 소환할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 해양 마물은 워낙 편차가 커서, 네 힘으로 버거운 놈이 튀어나올지도 몰라.」

멀미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부족한 MP를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목숨과 저울질할 것은 아니었다.

자이안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아와 함께 선장실로 향했다.

“오, 작은 친구 양반! 멀미는 좀 괜찮아졌소? 뭐, 안색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구만그래.”

“마물이 다가오고 있어요.”

맥락 없이 내던진 경고에 선장은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작은 친구가 망상증이 좀 있구만. 바다 마물은 미신이오.”

“자이안은 마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 능력으로 오크의 접근을 미리 알아내기도 했고요.”

유리아의 첨언에 선장의 표정이 굳었다. 마물이 오고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대비하는 것이 선장의 의무였다.

이런 망망대해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지니까.

“이런 빌어 처먹을. 어디서부터 오고 있소? 거리는? 크기는? 혹시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도 알 수 있소?”

“방향은 남쪽, 거리는 3킬로미터, 크기는 20미터 정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염병할. 바닷사람이 바다에서 죽는 거야 당연한 거라지만 그래도 그게 오늘이 될지는 몰랐는데.”

“마물은 제가 토벌할게요. 선장님은 승객과 선원에게 미리 안내를 부탁드려요. 사람들이 겁먹고 소란을 일으키지 않게.”

자이안의 단호한 말에 선장은 뭐 잘못 집어먹은 표정이 됐다.

“……작은 친구가? 마물을? 토벌해?”

그렇게, 해양 마물 요격전이 시작되었다.

갑판 위에 100여 명의 선원들이 무기를 든 채 모였다. 저마다 비장한 얼굴로 망망대해를 노려보고 있었다. 해수면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천적의 접근을 직감해 숨죽인 초식동물 같았다.

그 선두, 벤야와의 연줄로 어렵게 구한 휴대용 마도포의 포신을 매만지던 로빌리오 선장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자이안이 있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선수 끄트머리에 서 있는데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첫인상은 영 별로인 친구였다. 너무 어린 데다가 유약해 보였다. 고작 뱃멀미로 쓰러져 빌빌대는 모습도 그 인상을 확고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그 등에서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쯧.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해양 마물이 온다. 농담이라면 악질적이었고 진담이라면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안심이라는 유리아의 표정, 그녀가 열변한 자이안의 실력에 선장은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에게 전해졌다. 먼 곳에서 무언가가 물살을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잠하던 해수면이 거칠게 넘실거렸다.

“속도를 늦춰야겠어요. 선공을 부탁드립니다. 맞출 필요는 없어요. 잠깐 놀라게만 하면 됩니다.”

“좌현, 전 포문 개방! 순서 기다리지 말고 준비된 놈부터 쏴버려!”

쾅, 쾅! 폭음과 함께 날아간 포탄이 마물의 근처 해수면을 때렸다. 물보라가 솟구치고, 놈이 당황한 듯 우왕좌왕했다.

자이안은 한 손으로 펜던트를 쥔 채 그 움직임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최적의 타이밍이 곧 찾아올 것이다.

-카아아악!

‘지금!’

참지 못한 마물이 포효하며 수면 밖으로 몸을 곧추세운 순간, 자이안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펜던트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2미터가 넘는 장창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투웅. 현을 튕기는 것 같은 가벼운 소리 직후,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 장창이 놈의 아래턱에 꽂혔다. 한 박자 늦게 그 궤적을 따라 폭발하듯 광풍이 몰아치며 바다를 뒤흔들었다.

“이제 더 공격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자극하면 놈이 배를 부수려 들 겁니다!”

공중에서 반동으로 밀려난 자이안이 갑판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디며 소리쳤다. 동시에 어그로 관리 기술 ‘도발’을 사용해 마물의 주의를 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개를 휙 돌린 놈이 사납게 자이안을 노려보았다.

자이안은 놈을 마주 노려보며 허공을 움켜쥐고 힘껏 잡아끌었다. 마물의 턱에 깊숙이 꽂힌 장창이 줄이 묶인 것처럼 자이안을 향해 되돌아갔다.

-키에에아아아악!

턱에 창이 꽂힌 채 속절없이 끌려오던 마물이 기다란 몸을 미친 듯이 뒤틀며 난동을 부렸다. 결국 30미터 정도 거리를 남기고 장창이 마물의 아래턱에서 뽑혀 나왔다.

피와 살점, 부서진 비늘 조각을 철철 흘리며 놈이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자이안은 실망하지 않고 갑판 모서리를 박차며 다시 뛰어올랐다. 창을 붙잡은 순간, 이번에는 아래쪽에 기다란 쇠사슬이 달린 거대한 워해머의 형태로 무기의 모습이 변했다.

“흡!”

원심력을 한껏 실은 일격이 마물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천둥소리를 닮은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수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잠시 공중에 떠 있던 자이안은 쇠사슬을 난간에 걸어 무사히 갑판 위로 돌아왔다.

「아직 안 죽었다.」

‘네.’

사태가 끝난 줄 알고 환호성을 터뜨리려는 선원들을 자이안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다음 순간, 해수면이 부글거리더니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마물이 등을 보인 자이안에게 쇄도했다.

몸을 비틀어 회전시키며 자이안은 워해머로 마물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굉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갑판에 처박혔다. 정신을 못 차린 놈이 버둥거리는 사이, 훌쩍 뛰어오른 자이안이 무기를 대검으로 바꿔 그대로 눈알에 찔러 넣었다.

안구와 뇌가 함께 헤집어진 마물이 미친 듯이 경련했다가 별안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는 힘없이 늘어졌다.

“……후우.”

MP 흡수 현상을 통해 마물이 완전히 죽었음을 확신한 자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의 머리 위에 서서 갑판 위에 모인 선원들을 한차례 돌아보고, 이윽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

짧은 침묵.

다음 순간, 환호성이 갑판을 뒤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