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공개 재판
(27/210)
27화 공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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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공개 재판
2022.10.30.
“……이상의 사실과 각 증인들의 소중한 증언, 그리고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의 총의를 근거로 판결을 내린다.”
수백 명에 이르는 참관자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침묵에 잠시 동참했던 판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즈레드 상회의 모든 영업을 폐하고, 상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 사회에 환원한다. 또한, 이후 같은 명칭의 상회 설립을 금하며, 주범인 벤야 알즈레드의 모든 혈족을 웨코스에서 영구히 추방하기로 한다. 이상.”
다음 순간, 재판장 내부가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소란으로 가득 찼다. 판결을 선고한 판사장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시민 참여 공개 재판은 벤야가 제안한 정책 중 하나였다. 그 기념비적인 첫 재판이 다름 아닌 벤야의 죄질을 판가름하기 위해 열렸다는 건 웃지 못할 희극이었다.
‘다행히도 형벌이 과하지 않았네요.’
아수라장이 된 재판장 일각에 자이안도 있었다. 자이안과 함께 재판을 지켜보던 프레이가 그 말을 듣고는 인상을 썼다.
「과하지 않다고? 동전 한 푼 없이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는데.」
‘일리움이었다면 유리아는 물론 다른 죄 없는 상회 간부들까지 전부 처형했을 겁니다.’
「그건 그 나라가 이상한 거고, 인마.」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사실, 비교적 온건한 형벌이 내려진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벤야의 죄가 실제보다 축소되어 밝혀진 점.
위험한 마법으로 마물을 불러 모아 조종하고, 실수였다고는 해도 ‘마족’까지 소환해 마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진실은 자이안과 유리아를 제외한 이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로 묻혔다.
사람들이 빠르게 대피한 덕분에 마인화한 벤야와 마족 ‘교만’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는 자이안과 유리아뿐이었다.
벤야는 도시 밖으로 통하는 토굴을 지하에 파 마물들을 불러왔을 뿐, 마법으로 직접 조종했다거나 하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 하나는 사태에 비해 피해 규모가 경미했다는 점.
사상자가 수백 명에 달했지만, 도시 한복판에 마물이 대규모로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경미하다는 표현이 옳았다.
재산 피해 역시 알즈레드 상회로부터 몰수한 재산으로 충분히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피해를 줄이는 데 가장 크게 활약한 이들이 바로 유리아와 알즈레드 상회의 직원들이었다.
유리아가 미리 무스트를 통해 지시를 내린 덕분에 빠르게 시민을 대피시킬 수 있었고, 이는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애초에 유리아는 공범도 뭣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피해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녀를 재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갑작스러운 재난에 들끓는 민심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국가전복 시도로 취급할 수도 있는 사건이라, 혈족까지 철저하게 심판하라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웨코스의 형법은 연좌제를 금했으나, 국가전복 등 몇몇 조항만은 예외였다.
‘이걸로 옛날 빚은 갚은 겁니다. 벤야.’
판사장은 유리아의 형벌을 최대한 낮추도록 애썼다. 진실을 아는 사람으로서의 책무였으며, 동시에 그가 젊었을 적 벤야에게 입은 큰 은혜를 갚는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가 개인을 제외한 ‘상회의 재산’ 몰수, 그리고 들끓는 민심으로부터 유리아를 지키는 ‘국외 추방’인 것이다.
「그래, 그러면…… 만약 정말로 그런 판결이 나왔다면 어쩔 셈이냐?」
‘그들을 구할 겁니다.’
「법에 의거한 정당한 판결인데에? 그런 짓을 했다간 자칫 사회 근간이 흔들리지 않을까?」
‘벤야 님은 어쨌든 유리아나 다른 간부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는 건, 그 법이 옳지 않다는 증거예요. 그릇된 법을 따르는 사회는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겁니다. 법이 잘못됐다는 걸 알리고 고쳐나가는 게 사회를 위한 일 아닐까요?’
대답하는 자이안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르스는 감탄했고, 프레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소란도 시간이 지나며 잦아들고, 지친 시민들이 하나둘 돌아갔다. 자이안은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간 뒤 자리를 지키고 서서 유리아를 기다렸다.
그를 쫓아내기 위해 다가오던 병사들은 자이안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말없이 멀어졌다.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자이안과 유리아가 이번 사태를 종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널리 퍼져 있었다.
“……자이안?”
유리아가 나타난 것은 사위가 어둑해진 시간이었다. 초췌한 얼굴의 그녀가 자이안을 보고는 힘없이 웃었다. 자이안도 미소로 답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아니, 뭐 그냥…… 좀 피곤하긴 하네.”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자이안이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감싸 잡았다. 유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자이안을 올려 보았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는다.
“걱정해주는 거야?”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아, 하하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좀 부끄럽네. 이, 일단 돌아가자. 길 한복판에서 이게 뭐 하는 거람.”
부끄러움을 숨기며 유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방 선고가 내려지기는 했으나 당장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았고. 유리아에게는 한 달의 유예 시간이 주어졌다.
약간의 개인 재산만 남은 유리아에게는 사실 한 달도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길에 막막한 절망만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상회에서 유리아를 보좌했던 무스트가 떠날 준비를 하는 둘 앞에 나타났다.
“목적지는 정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자이안과 유리아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선은 마법사들의 나라인 ‘보석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벤야가 마물과 마족을 불러낸 위험한 마법을 바로 보석탑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자이안의 최종 목적지인 하이엘프의 영역 ‘세계수의 숲’이 보석탑과 남북으로 맞닿아 있기도 했다.
웨코스가 대륙 남서부, 보석탑은 북동부에 있으니 대륙을 거의 통째로 가로질러야 했다.
가장 빠른 길은 웨코스에서 배를 타고 동방의 제국으로 향한 뒤 거기서 북상하는 것이지만, 재산이 몰수된 유리아와 애초에 무일푼이었던 자이안에게 뱃삯을 낼 돈은 당연히 없었다.
육로를 통해 몇 개나 되는 나라를 통과하며 대륙을 가로지르는 게 유일한 방책이었다.
“육로라…… 긴 여정이 되겠군요.”
얘기를 들은 무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놀리러 온 거야?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가.”
“아이고, 아가씨도 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 이제 아가씨 아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가씨 당신뿐일 겁니다. 제가 여정에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유리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마인이 된 벤야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이후에도 재판 등으로 이리저리 치이면서, 유리아는 가벼운 인간 불신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스트를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불안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선을 알아차린 자이안이 말없이 유리아의 손을 잡았다. 경직되어있던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어디로 가면 돼?”
* * *
“우와아아아아……!”
자이안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눈앞에 선 생물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몇 배나 되는 체구와 앞다리를 대신하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생물, 와이번은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양 심드렁한 얼굴로 작은 울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세계는 이세계구만. 저게 마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이라니.」
처음 봤을 때 마물인 줄 알고 경계했던 프레이는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사실 지금도 놈이 자이안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좀 불안했다.
자이안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부질없는 걱정인 것 같기는 했다.
“하,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움찔움찔하던 자이안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무스트의 친우이며 와이번 항공의 창업자이기도 한 남성은 곤혹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너무 흥분하시면 그 애도 흥분해서 돌발행동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아, 만지는 건 괜찮습니다. 조금 진정하신 다음에요.”
“제가 그렇게 흥분했어요?!”
“응. 너 지금 되게 애 같은…… 애 맞네.”
잊어버리기에 십상이지만, 자이안은 이제 겨우 16살이었다.
“으으, 알았어요. 지, 진정할게요. 후우, 하아, 후우. 됐다! 이제 됐죠?!”
“……하나도 안 됐거든?”
결국 유리아가 강제로 자이안을 끌어왔다. 자이안은 못내 아쉬워했으나 와이번의 몸에 기구를 설치하는 직원들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자제심은 남아있었다.
“와이번을 처음 보는 분들은 대부분 무서워하시던데, 그렇게 좋아해 주시니 제가 다 기쁘군요.”
“무섭다뇨! 이렇게나 멋있는데.”
자이안의 대답에 남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거 위법 아니에요? 정말 괜찮을까?”
유리아의 불안 섞인 물음에도 남자는 웃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차례 무스트를 바라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법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네? 아니, 그건…… 그, 그럼 아저씨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잖아요.”
“애초에 위법으로 판결될 여지도 없을 겁니다. 법전 어디에도 돈 안 받고 물건 파는 걸 금지한다고 쓰여 있지 않아요. 위법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까짓 벌금 좀 내면 그만이죠. 이건 그러니까…… 작은 은혜 갚기 같은 겁니다.”
10여 년 전, 그는 알즈레드 상회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 시절부터 그는 와이번 운항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벤야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비웃음당하기만 하던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다.
비용과 효용성 문제, 안전성 검증 등 많은 걸림돌을 벤야가 해결해줬고, 와이번 운항 상용화를 계기로 웨코스의 유통망은 일약 혁명을 맞이했다.
상회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뒤에도 그는 벤야의 지원을 잊은 날이 없었다.
“전 와이번 운항이 알즈레드 상회 소속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회장님이 단호하게 반대하더군요. 이런 중대한 산업을 상회 하나가 독점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정작 회장님은 제가 독립한 뒤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회장님 딴에는 몰래 그러셨겠지만, 아시다시피 그분이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은 아니잖습니까?”
“…….”
“겨우 이 정도로 그분께 받은 은혜를 다 갚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쯤은 떳떳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아빠는 마물을…… 많은 사람들이…….”
“회장님께서는 분명 큰 죄를 지었죠. 피해를 입은 분들은 결코 그분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아주 정당한 감정이고, 그 부분은 저도 회장님을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여태 해온 옳은 일들까지 폄하되는 건 안타깝지 않습니까.”
“……흑, 흐끅…….”
“저라고 눈과 귀가 없는 건 아닙니다. 두 분 덕분에 사태의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가 아주 적었다는 것도, 저택에서 성 상납을 받고 있던 데바인 상회장이 그 난리통에 운 없게 죽었다는 것도, 아가씨가 그 직전, 상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알고 있습니다.”
울음을 참는 유리아를 보다 못한 자이안이 그 손을 잡아준 순간,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고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순식간에 셔츠 앞섶이 축축해졌다.
자이안은 요즘 들어 셔츠가 남아날 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항 준비 끝났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준비하던 직원들이 와이번에게서 멀어지며 소리쳤다. 감정이 많이 진정된 유리아가 자이안에게서 떨어진 것도 딱 그즈음이었다.
둘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무스트가 히죽 웃었다.
“그래도 여행길이 외롭진 않으시겠습니다, 아가씨.”
“훌쩍……. 무스트, 그런 말은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 한 자신을 돌아본 다음에 해야 하지 않을까?”
“…….”
강렬한 카운터가 무스트의 멘탈을 와장창 부쉈다.
와이번의 복부 아래에 설치된 승차함에 둘이 앉고, 마지막 안전 점검이 이뤄졌다. 마침내 와이번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홰를 치기 시작했다.
체고 5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생물의 몸이 마법처럼 떠올랐다.
“아가씨! 이 나라에는 아가씨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아가씨의 아군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뒷말은 와이번의 날갯짓과 바람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내용일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차함에서 고개를 내민 유리아는 무스트와 그의 친우를 향해 힘껏 웃음을 지어 주었다.
적정 고도까지 날아오른 와이번이 서서히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