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아버지, 벤야 알즈레드 (26/210)


26화 아버지, 벤야 알즈레드
2022.10.29.


계기는, 분명 선한 것이었을 터다.

-허얽…… 그릃…….

알즈레드 상회를 일구며 명망 높은 부호가 된 뒤로 벤야가 알게 된 것은, 웨코스가 상상 이상으로 부패한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시민의 총의에 의한 건전한 정치체계를 이룬 것 같지만, 실태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극소수의 손에 바로 그 시민의 총의가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독재 왕정 국가만도 못했다.

벤야가 정계에 발을 들일 결심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조국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해지길 바랐다. 고난의 길이었다.

가장 큰 벽은 데바인 상회였다. 본래부터 알즈레드 상회와 사이가 나빴다. 데바인 상회는 수십 년간 대상회로 군림하며 정계와도 깊은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올바른 일만 해서 이룬 명성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에게 알즈레드 상회와 벤야는 혼자 깨끗한 척하는 역겨운 위선자로 보였으리라.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모난 돌로도 보였을 것이다.

벤야가 출마를 선언하자 데바인 상회의 방해는 점점 노골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변했다. 기술이 유출되고, 특허를 빼앗기고, 직원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된 적마저 있었다.

벤야는 올바른 수단으로 그들을 이기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오래전, 벤야는 웨코스에 방문한 한 마법사에게 재능이 눈에 띄어 보석탑 유학을 권유받았다.

젊은 벤야는 희희낙락하며 이를 수락했고, 어느 날 보석탑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실험을 목도하고 공포에 떨며 도망쳤다.

마물을 소환, 세뇌, 통제하는 마법은 그 실험 과정에서 나온 여러 부산물 중 하나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마물을 항거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로 인식한다. 웨코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힘을 교묘히 이용하면, 데바인 상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인간의 형상을 한 그 역겹고 늙은 돼지를 영영 없애버릴 수도 있으리라.

처음 그 생각을 떠올린 날, 벤야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두려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래서야 자신이 데바인 상회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혹은 강해졌다.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돌리지 못했다. 정당한 수단만을 쓰자고 다짐하면서도 벤야는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마법을 준비했다.

본래 이 마법에 필요한 것은 인간의 목숨.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피와 살 일부를 바치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효율화했다.

최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데바인 상회였다.

도적 떼인 척 상단을 습격해 유리아를 납치하려 하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우라고 내심 생각했던 칼베도 체니 단장이 오래전에 배신했음을 알게 된 날.

벤야는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악마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유리아……. 못난 애비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벤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기괴한 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을 죽여라. 죽이고 피와 살을 먹어 치워라. 인간은 적이며, 식량이다.

‘나는…… 나는 인간이다.’

이제는 아니었다. 벤야는, 한때 벤야였던 마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오열하듯 포효했다.

-으오오오오오…….

“아빠! 아빠 여기 있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상회 건물을 부수고 지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마물들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인간이 아주 가까운 곳에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마물들이 발을 구르며 기뻐했다.

놈들이 유리아를 공격하게 둬서는 안 된다. 벤야는 주위의 마물들을 두 손으로 박살 내며, 뒤틀린 성대를 쥐어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유……릐앓! 오멵, 앍……돼!

“아빠 목소리!”

목소리가,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럴수록 머릿속의 목소리가 커지고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벤야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마물을 죽이며 날뛰었다. 유리아가 완전히 무너져내린 상회 본부에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아빠?”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무수한 마물의 시체 한가운데, 어설프게 인간을 닮은 마물 하나가 서 있었다. 그 마물의 어깨에 걸린, 넝마가 된 옷자락을 유리아는 바로 알아보았다.

두 가지 끔찍한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첫 번째는, 그 마물이 이미 벤야를 죽이고 먹어 치웠다는 것. 두 번째는…….

-유리아, 오지 말라고 내가…….

유리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검을 뽑았다.

“아빠.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 안 했어? 난 아빠 딸이잖아. 아빠가 나보고, 나도 어엿한 파트너라고 했잖아.”

-유리아, 나는 너무 늦었다.

“말이라도 해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아빠가 그런 모습이 됐는지!”

-내가 어리석었다.

“맞아! 아빠 진짜 바보야! 힘들면 힘들다고 나한테 말이라도 해 줬으면, 그럼 뭔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유리아. 내게서 도망쳐라. 더 이상 정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싫어! 난 이제 두 번 다시 도망 안 칠 거야!”

-그렇다면…… 나를 죽여라. 늦기 전에.

“이 바보야아아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유리아가 오열하며 소리쳤다. 벤야의 입에서 대답 대신 짐승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유리아가 단검을 들어 올렸다. 자이안에게 배우며 완전히 몸에 익은 자세를 취했다.

“아빠는 내가 막을 거야. 그리고 원래대로 되돌릴 거야.”

-미안하다.

“사과는 원래대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 해.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다 말해줘.”

-모두, 말하마.

흐려지려는 의식을 쥐어짜며 벤야는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전했다. 유리아는 울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을 들었다.

“왜 그랬어어……. 나한테는 항상 올바르라고, 그랬으면서…….”

-사람이 늙으면……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는 법이란다.

회한을 섞어 중얼거린 뒤 벤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계가 가까웠다.

-유리아. 어서 나를 죽여라.

“싫어. 아까 내가 말했잖아. 원래대로 되돌릴 거라고.”

-그런 방법은…….

그 순간이었다. 잔해 속에 파묻혀 있던, 운 좋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마물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와 유리아에게로 달려들었다.

유리아의 움직임이 덜컥 얼어붙고, 벤야가 다급하게 뛰쳐나가 유리아를 지켰다. 마물의 송곳니가 어깨에 깊숙이 박히고 벤야의 주먹이 놈의 머리를 부쉈다.

-커헉!

고통, 피 냄새, 우연히 입에 들어간 마물의 살점. 유리아와 대화하며 안정되어 있던 의식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잠잠하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뇌를 울렸다.

인간을 죽여라!

“아, 아빠.”

-유리아, 어서어어어어어어얽!

필사적인 외침이 사나운 포효로 변했다. 벤야가, 아니, 마인이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뒤늦게 팔을 들어 막은 유리아의 몸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아윽……!”

몇 번이나 바닥에 튕기고 구르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시야 가득 별이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새어 나왔다.

-워어어어어어억!

성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운 머리로, 유리아는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움직여야 돼!’

필사적으로 몸을 굴린 순간 마인이 내지른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곁을 스쳐 돌바닥을 부쉈다. 몇 번이고 발을 헛디디며 간신히 일어섰다가, 왼팔 안쪽이 부러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유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축 늘어진 왼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마인이 유리아를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이성을 잃고 번들거리는 두 눈가에 피가 마치 눈물처럼 맺혀 있었다. 자이안이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유리아의 눈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유리아는 울음을 삼키며 단검을 들었다.

‘아빠도 똑같이 아플 거야!’

마인이 깍지를 낀 두 손으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유리아는 자세를 낮추고 거체의 틈을 흐르는 물처럼 파고들었다. 마인이 그 움직임에 반응했다.

거세게 휘두른 주먹이 무방비한 측면을 후려쳤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유리아가 나가떨어졌다.

-그르르륽…….

마무리를 지으려던 마인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왼쪽 가슴,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에 단검이 칼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다.

-커읅.

마인이 무릎을 꿇었다.

-잘했다, 유리아. 합격이다. 이제 널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왈칵 피를 토한 뒤, 벤야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감싸며 무너졌다. 멀찍이 쓰러진 유리아를 바라보며 마지막 힘을 모아 단검을 더욱 깊이 찔러 넣었다.

-여행…… 얼마든지 떠나렴.
 

* * *

상회 본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프레이의 소환 한계가 다해 도중부터 두 다리로 뛰어온 자이안은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유리아! 벤야 님!”

폐허를 수색하던 자이안이 먼저 발견한 이는 벤야였다. 정확히는, 급격히 늙어버린 벤야의 시신이었다. 왼쪽 가슴에는 단검이 깊이 꽂혀 있었다.

「결국 마인이 되고 말았나.」

프레이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그 마족, 교만이랬나? 그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군. 하루아침에 마인이 될 정도로 마인화가 진행된 건 아니었으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자이안은 그의 시신 앞에 서서 짧게 묵례했다. 그 뒤 다시 주변을 수색했다.

“유리아!”

그녀는 근처 잔해 속에 파묻혀 있었다. 찰과상과 골절상이 몇 군데 보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치명상은 없었다.

“완치는 어렵지만, 자연 치유에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펜던트를 가볍게 쥐어 MP를 불어넣고, 그 펜던트를 다시 유리아에게 가져다 대자 그녀의 안색이 조금 편해졌다. 자이안은 안도한 나머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으…… 아, 아빠……?”

신음을 뱉으며 정신을 차린 유리아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

“벤야 님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자이안은 유리아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유리아는 그 침묵으로부터 많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빠는…… 그래, 그렇게 됐구나.”

자이안의 앞섶이 축축해졌다. 조금 뒤, 소리죽여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유리아는 두 팔을 들어 자이안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폐허가 된 건물 앞에서 둘은 오래도록 그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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