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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코르니카 사변 (2) (25/210)


25화 코르니카 사변 (2)
2022.10.28.


“피곤하지? 차라도 마시면서 푹 쉬렴.”

자이안이 자리에 앉자, 나이아가 언제 준비했는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나이아는 일리움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캐모마일 차를 매일 마실 정도로 좋아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그 향기는 오래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나이아가 떠난 뒤, 의식적으로 들춰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가, 결국 자이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작은 숨만 내쉬었다. 두 손바닥에 턱을 얹고 바라보던 나이아가 방긋 웃었다.

“말수가 많이 적어졌다. 우리 자이안, 철들었나 봐.”

“저는… 그게…….”

눈을 질끈 감은 자이안이 겨우 입술을 뗐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왜?”

“제가 이렇게 쉬고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을지 몰라요. 제가 그들을 막아야 해요.”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

“의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나이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미안해. 자이안.”

“어머니가 왜 사과를 하세요.”

“사실 나는 네게 펜던트를 맡기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생전의 나는 너무 아프고 지쳐서, 그래서 많은 걸 잊고 말았어. 너를 지키지 못하고 홀로 남기고 말았고, 본래 내가 끝맺어야 하는 일조차도 네게 넘기고 말았어. 전부 내 잘못이야.”

자이안의 표정이 점차 뚱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환상이라도, 다시 만난 나이아에게 듣고 싶었던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늙긴 하셨나 봐요. 그런 약한 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그러는 자이안은 독설이 많이 늘었네.”

“삼촌이랑 아르스 님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 싫어도 이렇게 되더라고요.”

“자이안? 오빠한테 너무 이상한 것만 배우면 안 된다? 오빠는, 그야 뜯어보면 좋은 사람이긴 한데, 솔직히 인간적으로… 좀……. 아무튼, 그 사람은 본받지 마. 아아, 하지만 아르스 언니도 성격 이상한 건 똑같고. 둘 말고 유민이가 있어야 했는데.”

자이안은 쓴웃음을 삼키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니는 옳은 일을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 아들인 걸 후회한 적도 없고,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없어요.”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키웠잖니.”

“맞아요. 어머니가 자식 교육 하나는 훌륭하게 하셨죠. 그러니까, 그런 약한 소리 마시고…….”

감정을 눌러 삼키며, 자이안이 말했다.

“칭찬 한마디만 해 주세요.”

자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제어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게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보고 있지 않으면, 그래도 조금은 더 참을 수 있으리라.

“혼자서 잘했다고, 장하다고…… 그냥 그 말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감정을 가다듬느라 자이안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이아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았어, 자이안.”

“사실은,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어요. 그래도, 그래도 저는…….”

“응. 알아. 넌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란다. 내게는 과분할 만큼.”

자이안은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나이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저는, 어머니 말씀대로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미안해하지도 마세요.”

나이아에게서 떨어져서, 자이안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길 수 있어요.”

“그래. 엄마는 믿어.”

멀리서 알 껍질이 깨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눈부신 빛이 어디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뻗어 나와 정원을 감쌌다. 자이안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의식이, 멀어진다.

* * *

“……우리 자이안. 너무 훌륭하게 컸네.”

빛으로 감싸인 새하얀 공간. 홀로 남은 나이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환상 속의 공간이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허상은 아니었다. 나이아의 의지는, 비록 아주 작은 파편이나마 분명히 존재했다.

“도망쳐도 된다고, 억지로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말도 못 꺼냈네.”

누군가가 나이아에게 다가왔다. 그녀와 쌍둥이처럼 닮은 빛의 형상. 나이아가 자신의 영혼을 쪼개 빚은 펜던트의 관리 AI, 혹은 정령이라고 불러야 할 존재였다.

[…….]

“이걸로 미련은 없어. 마지막에 자이안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

[…….]

“그래. 이제 우리 역할은 끝났어. 남은 건 자이안에게 전부 맡길 수밖에.”

[…….]

“괜찮아. 자이안은 잘할 거야. 그 애는 나와는 달리 혼자가 아니니까.”

일견 일방적인 대화 뒤, 나이아는 잠들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AI가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이윽고 둘 모두 환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새하얀 세계가 소리 없이 무너졌다.

* * *

“어머니…….”

눈가에 맺혀 있던 한 줄기 눈물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자이안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빛이 자이안을 감싸고 있었다. 인간을 닮은 그 마물, ‘마족’은 조금 떨어진 채 자이안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마치 그 빛과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주인의 모든 의사를 확인하였습니다.]

[최종 동기화 완료. 전 보안 해제. 모든 기능이 개방됩니다.]

[본 AI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의 모든 판단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의 의지로 당신의 길을 개척하십시오.]

[무운을 빕니다, 나의 주인.]

몇 개의 메시지 박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동시에 자이안은 많은 것을 이해했다.

펜던트는, 그 안에 깃든 나이아의 의지는 자이안이 도망치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 기능을 막아둔 것이었다. 마족과의 싸움을 결의하면 그때부터는 도망칠 수 없으니까.

“……이상한 힘이구나.”

이름 모를 마족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힘, 익숙하구나. 이상한 기분이야. 인간, 네 이름을 말해 보려무나.”

“자이안. 자이안, 알코스.”

“알코스. 알코스……?”

마족이 이마를 감싸며 인상을 썼다. 마치 격렬한 두통에 사로잡힌 것처럼, 억눌린 신음이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자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펜던트를 한 손으로 거머쥐었다.

「통신이……! 자이안, 정신을 차린 거냐?!」

“삼촌. 저 혼자서는 저 마족을 이길 수 없어요. 힘을 빌려주세요.”

「뭐? 마족이라니…….」

잠깐의 침묵 뒤, 프레이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아, 하지만 소환 제한이…….」

“아포칼립스!”

단호한 외침과 함께 펜던트에서 빛이 폭발했다. 동시에 자이안은 한 차례 크게 비틀거렸다. 여태까지는 펜던트에 저장된 MP를 이용해 그를 소환했지만, 이제는 자이안의 MP를 직접 사용하는 만큼 큰 부담이 따랐다.

그만큼, 자이안의 여력에 따라 언제든 각성자를 소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생겼다.

“진짜 됐잖아? 어떻게…….”

「잠깐! 나는?! 또 프레이만 부르는 거야?!」

“넌 지금 전투용 장비도 없어서 도움도 안 되잖아. 거기서 구경이나 해.”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우선 적을 쓰러뜨리는 데 집중하죠.”

그 말이 맞았다. 프레이는 모든 의문을 집어던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적을 향했다.

“강력한 MP 흡수 결계를 두르고 있군. 아마 놈은 마물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힘을 발휘할 거다. 반대로 주변의 마물들은 삽시간에 말라비틀어질 테고.”

“후후…… 후흐흐흐흐. 정말 흥미롭구나!”

마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얼굴은 흥분과 쾌락, 그리고 증오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 힘, 그 이름. 이 두려움, 이 갈증, 그리고 이 영문 모를 원한! 이 모든 게 나를 흥미롭게 하는구나!”

“하하. 혼잣말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로구만.”

프레이가 이를 갈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 아주,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통신이 끊긴 동안, 프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와 끝없이 싸우며 불같은 감정을 어찌할 바 없이 차곡차곡 쌓아두고만 있어야 했다.

“혼자 떠들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아주 좋은 곳을 하나 소개해주마.”

그 모든 격정을 폭발시키며 프레이가 격렬하게 두 손을 맞부딪쳤다.

“바로 지옥이다, 이 새끼야!”

아포칼립스.

그 위명이 아깝지 않게, 그의 등 뒤로 무수한 수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이어서 마법진 하나하나가 새하얗게 불타오르더니 이글거리는 불꽃의 채찍이 쏟아져 나와 마족을 덮쳤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에 땅이 뒤집히고, 태양처럼 환한 빛이 마족을 감쌌다. 반파되어 있던 거리가 삽시간에 원형조차 남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빛과 먼지가 걷히고 다시 나타난 놈의 모습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아주 작은 상처만 몇 개 새겨졌을 뿐이었다.

프레이는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쯧, 좀 민망한데? 마법 공격하고는 상성이 안 맞아.”

“제가 목을 치겠습니다. 삼촌은 적의 시선을 끌어 주세요.”

“타당한 작전이군. 맡겨라. ……야, 근데 너 아까 칼 부러뜨렸잖아?”

“무기라면 여기 있습니다.”

자이안이 펜던트를 두 손으로 쥐고 작게 시동어를 읊자, 펜던트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변형했다. 오로라가 일렁이는 듯한 독특한 빛의 검신을 가진 그 무기는 프레이에게 몹시도 익숙한 것이었다.

“……나이아의 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삼촌,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제길. 이따가 빠짐없이 다 설명해줘라.”

프레이가 다시 적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해일처럼 거대한 힘이 폭음과 함께 몰아쳤다. 아슬아슬하게 때맞춰 펼친 결계가 둘을 지키고는 유리창처럼 깨졌다.

“손이 다 얼얼하네.”

“이 ‘교만’이! 작고 하등한 너에게 진실로 흥미를 가졌다! 영광스럽지 않느냐!”

“쟤 왜 자꾸 너한테 친한 척이냐?”

가벼운 농담과는 반대로 프레이는 전력으로 마법을 흩뿌렸다. 사방에서 빛과 폭풍과 냉기와 고열이 몰아치고 공간이 찌그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교만이라 자칭한 적은 그 모든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들이며 오직 자이안만을 향했다.

프레이의 목적은 둘이었다. 많은 공격을 퍼부어 놈의 결계를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단 한 순간 놈을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것.

“자이안. 큰 공격을 할 거다. 여파가 미칠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잠시 공격을 멈춘 프레이가 손가락을 튕겨 간이 결계를 펼쳤다. 아마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건 찰나에 불과할 테지만, 모든 무장을 갖춘 프레이에게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라. 그리고 죽어서도 영원히 불타라. 이는 네 죗값이다.].”

고열의 불기둥이 솟구치고 플라스마로 화한 대기가 굉음을 내며 희게 불탔다.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불길의 십자가가 교만을 가두고 그의 전신을 불태웠다. 교만이 홍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흐하하하하하! 이게 바로 고통이구나! 나는 오늘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므로 고통을 지배할 수 있다!”

“자이안, 준비해라. 십자가가 꺼지는 즉시 놈을 구속할 거다.”

자이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자세를 취했다. 곧 십자가가 사라지고, 전신이 까맣게 불탄 교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눈은 형형하게 빛나며 오직 자이안에게 꽂혀 있었다.

완전히 불타버린 몸 역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삼촌. 혹시 어머니가 지구에 계실 때도 캐모마일 티를 좋아하셨나요?”

“없어서 못 마실 정도였지. 그건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작게 웃은 자이안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프레이도 다시 적을 향했다.

“지금!”

두 손을 교차해 휘두르며 프레이가 외쳤다. 열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번개의 실이 교만의 사지를 단단히 묶었다. 동시에 자이안이 달렸다.

콰앙! 한 박자 늦게 지면이 폭발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삽시간에 놈에게 쇄도한 자이안이 곁을 지나며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이안도 교만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억났다.”

목이 잘려 공중에 떠오른 교만이 말했다.

“알코스, 나이아 알코스. 찬탈자께서 너를 알고 계신다. 찬탈자께서 너를 기억하고 계신다. 찬탈자께서 너를 찾으신다!”

목이 바닥을 뒹굴고 머리를 잃은 몸이 무너졌다.

“너는 이제 도망치지 못한다!”

교만의 몸이 잿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운이 좋았군.’

적의 잔해를 노려보며 프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마안으로 측정한 교만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놈은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도 차원을 넘어온 몸이 환경 적응하지 못한 탓에 힘이 제한되어 있었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잉여 MP를 끊임없이 흡수하는 자이안의 특수성 역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놈의 방심이었겠지만. 흥, 꼴좋다.’

상성, 그리고 천운이 겹친 승리라 할 수 있었다.

“큭…….”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에 자이안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상념에 빠져 있던 프레이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고생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자이안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알즈레드 상회 본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벤야 님이, 아직…… 유리아도…….”

“제길. 그러고 보니 그랬지.”

욕설을 뱉은 프레이가 자이안을 업었다.

“조금이라도 쉬어라. 그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르니까.”

“죄송, 합니다. 신세 좀 질게요.”

둥실 허공에 떠오른 둘은 곧바로 알즈레드 상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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