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코르니카 사변 (1)
(24/210)
24화 코르니카 사변 (1)
(24/210)
24화 코르니카 사변 (1)
2022.10.27.
“피할 수 있었는데!”
유리아는 빽 소리치며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익숙지 않은 방이었다. 유리아는 이마를 매만지며 기억을 되짚었다.
“……아빠!”
화들짝 놀라며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절? 기절한 거야? 어, 얼마나 지났지?”
창밖은 아직 밝았으나 시간이 제법 지난 듯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니 아예 모르는 공간은 아니었다. 아마도 저택 별관 3층의 요양실.
“이럴 때가 아냐……!”
유리아는 급히 방을 나가려 했으나 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지만, 지상 3층은 잘못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다.
사실 꾸준히 MP 증강제를 복용해 각성자나 다름없게 된 유리아라면 부상을 좀 입는 선에서 그칠 테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신체 능력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나가야…… 밧줄. 밧줄로 쓸 게 있나? 침대보를 찢어서 길게 묶으면…….”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누구야?!”
초조해 있던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되물었다. 곧 문이 열리고 부하 직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낮에 유리아의 계획에 협조했던, 자신의 세력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무스트! 아빠는 어디 있어?”
“회장님은 회장실에서 서류 업무 중이신 걸로 압니다만…… 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갑자기 아가씨가 쓰러지셨다면서, 요양실에서 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회장님이랑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이럴 때가 아냐. 무스트, 나 좀 도와줘. 여기서 당장 나가야 돼.”
“저 낮에도 회장님한테 둘러대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아가씨 부탁이어도 하루에 두 번이나 회장님 눈 밖에 나는 건 좀…….”
초조해진 나머지 유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사실을 감추고 그를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한들 과연 믿어줄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벤야가 선거에서 이기려고 마물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스트, 부탁이야. 이대로…… 이대로 있으면 큰일 나. 얼른 아빠를 막아야 해.”
“진짜 크게 싸우셨나 보네.”
“아오! 그게 아냐! 그게 아니라, 아빠가……!”
발을 동동 구르던 유리아가 돌발적으로 자리를 박찼다. 그가 들어오느라 문이 열려 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오크를, 비록 명령 때문에 제약이 걸려 있었다고는 해도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죽인 그녀의 신체능력이 여지없이 빛을 발했다.
무스트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유리아는 흐르는 물 같은 움직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어어? 아, 아가씨?!”
“미안! 사정은 나중에…….”
“꺄아아아악!”
그 순간, 바깥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아아!”
“갑자기 이 괴물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도망쳐! 도, 도망, 으아아악!”
유리아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다급히 창문에 다가간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공황에 빠진 상류층 거리 일각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천적의 습격을 받은 곤충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마물들이 그 뒤를 쫓으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방금 무슨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은데……?”
유리아를 쫓아 나온 무스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아는 헛바람을 삼키며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스트, 의사당에 연락해서 내 이름을 대고 마물 경보 발령을 요청해. 그리고 상회의 가용 인력을 모조리 동원해서 시민 대피를 지원해.”
“예? 갑자기 마물이라뇨?”
“마물이 나타났다고! 도시 한복판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리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책임은 전부 내가 질 테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유리아는 그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죽을 수도 있는 높이라는 사실은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착지와 동시에 가볍게 굴러 충격을 분산하고, 시큰거리는 발목의 통증을 무시하며 그녀는 알즈레드 상회 본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빠!’
더 늦기 전에,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전에 벤야를 막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약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죽여서라도.
* * *
홀가분한 마음으로 코르니카로 돌아온 자이안이 가장 처음 느낀 것은 더없이 불온한 분위기와 마물의 냄새였다. 그것도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강렬하고 진한 냄새.
「……이런 젠장. 끝이 아니었나?」
자이안과 비슷하게 마물의 기색을 감지한 프레이가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소환진은 분명 파괴했는데…….’
「아하하…… 어째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더라고.」
「그 깐깐한 인간의 계획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제길, 계획이 이중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거다. 아니, 어쩌면 바깥의 소환진은 처음부터 미끼였을지도 몰라. 자이안, 바로 너 같은 장애물을 치워놓기 위한 미끼 말이다.」
프레이의 말을 듣던 자이안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우리가 밖에서 헛고생하는 사이 벤야는 충분히 준비를 마치고 주력 병력을 소환한 거다. 도시 한복판에서.」
“그건 미친 짓이에요!”
이를 악문 자이안이 몸을 떨며 소리쳤다. 거센 노호에 두 각성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숲속에 마물을 소환한 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적어도 당장 피해가 발생하는 건 아니고, 벤야 님이 마물을 제대로 통제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최소한의 피해로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걸 양보하면 어떡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하지만 도시 한복판이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지도 모르는데! 이건, 이건 안 돼요. 그 어떤 선한 이유가 있어도, 제아무리 숭고한 목적이 있어도, 이런 일은 결코 용납되어선 안 돼요.”
크게 심호흡한 자이안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벤야 님은 잘못됐어요.”
소동의 근원지, 알즈레드 상회 본부.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냄새의 주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
프레이가 나직하게 웃었다. 돌아보니, 아르스도 자신과 별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아르스. 저 녀석 표정 봤냐?
-응, 봤어. 정말…… 정말 나이아랑 판박이네. 어떡하지. 나 지금 눈물 찔끔 나온 거 같아.
-꼴사납게 울긴 왜 울어?
-정말로 나이아가 살아 돌아온 거 같아서. 프레이 너, 그동안 이런 기분이었구나.
-언제는 나한테 나이아랑 자이안을 겹쳐 보지 말라더니.
-그건, 으…… 사과할게. 나도 이런데, 넌 분명 더 힘들겠지.
-흥. 알면 됐다. ……음? 잠깐.
그 순간, 그의 눈이 이상 징조를 포착했다.
‘이상 징조’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거의 20년 동안 마물과 싸워 왔지만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MP의 움직임이었다.
도시 전체에 충만한 MP가, 마치 태풍처럼 한 곳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이동하는 듯한…….
「자이안, 뭔가 온다!」
프레이의 경고와 미증유의 힘이 자이안을 덮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방어 태세를 취한 순간,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엄청난 충격이 자이안을 후려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날아간 그의 몸이 민가 한 채를 박살내고 잔해 속에 파묻혔다.
“훌륭하구나. 그 찰나의 순간에 반응하다니.”
더없이 감미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해를 파헤치며 간신히 일어선 자이안은 그의 기괴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에 쓴 왕관은 수백 개의 뼈를 엮어 만든 것이었고, 붉은 망토는 피처럼 일렁거렸으며, 몸을 감싼 정복은 온갖 마물의 피부를 꿰매어 만든 듯 섬뜩한 빛깔이었다.
인지를 초월한 남자의 미모와 절묘하게 맞물려, 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흐음.”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땅을 디딘 남자가 자이안을 빤히 보며 턱을 매만졌다.
“너는 아주 강건한 정신을 지녔구나. 어리고 약한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애완동물을 죽인 것이 우연은 아니었구나.”
“애완, 동물……?”
“발뺌하려 하느냐? 포기하려무나. 나의 눈은 모든 거짓을 간파하고, 나의 입은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
남자의 말을 자이안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뇌가 남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귀담아들으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자이안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로 놀랍구나. 아직도 내 지배에 저항할 수 있다니. 조금 전의 인간도 그렇고, 너희 종족은 실로 흥미로워.”
자이안이 명확히 이해한 사실은 단 하나였다. 코르니카를 가득 채우는 방대한 MP의 주인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것이다.
‘삼촌, 저것도 마물인가요?’
「아니, 저건…… 마물은 아니다.」
‘하지만 마물의 냄새가 끊임없이 나요. 너무 달콤한 냄새가.’
「어쩌면 마인이나 그런 비슷한 종류……. 자이안,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저도 모르게 자이안이 남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가진 장비를 모두 전개해 남자의 정체를 분석하고 있던 아르스가 그 순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안 돼! 자이안, 당장 그 괴물한테서 떨어져야 돼!」
“이리 오려무나. 나는 네게 관심이 많다.”
한 걸음 더 내디딘 자이안의 몸이 다음 순간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이를 악물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이안은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직도 저항할 수 있다니.”
남자가 직접 움직였다. 스르륵 미끄러진 그의 몸이 삽시간에 자이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자이안이 명치를 노리고 정권을 내질렀다.
공격은 보이지 않는 역장에 튕겨 나가고, 이번엔 남자가 부드럽게 손을 뻗어 자이안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예절을 조금 배워야겠구나.”
폭음이 고막을 찢어발길 듯 사방에서 몰아쳤다. 자이안은 좁은 상자 속에 갇혀 아무렇게나 굴려지는 듯한 어지러움에 사로잡혔다. 고통은 한 걸음 늦게 찾아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자이안은 산산이 부서져 잔해만 남은 거리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기억이 불확실하게 뒤엉켜 있었다. 공격을 받은 것이라고 간신히 추측했다. 전력은 아니었을, 아마도 가벼운 공격. 겨우 그 일격에 저항조차 못 하고 쓰러졌다.
“쿨럭, 쿨럭…….”
반격해야 한다. 자이안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가만히 있으려무나. 허락하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자애롭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강력한 정신 간섭 현상을 확인.]
그 순간 펜던트가 거세게 떨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패턴 ‘데몬’과 동일한 간섭 현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대 데몬 간섭 방어 프로그램 실행.]
파열음과 함께 남자의 손이 튕겨 나갔다. 남자는 신기한 듯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따뜻한 빛이 자이안의 온몸을 감쌌다.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자이안은 정신을 잃었다.
* * *
갑자기 모든 통신이 끊어졌다. 통신기를 조작해도 원인 불명의 오류를 알릴 뿐이었다.
직전까지 자이안이 위기에 빠진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프레이는 패닉에 빠진 나머지 입만 뻐끔거리며 아르스를 돌아보았다.
“묻지 마. 나도 지금 분석 중이야.”
모든 지식과 장비를 총동원해 현상을 분석하며, 아르스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펜던트의 통신 방식은 정신 감응 능력을 베이스로 한 일종의 텔레파시야. 그런데 저 괴물이 자이안의 정신을 지배하려 했고, 나이아가 펜던트에 미리 심어 놓은 방어 프로그램이 실행됐어. 통신이 끊어진 건 그래서야.”
“나이아가 펜던트에 방어 프로그램을 심었다고?”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프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홀로 추측을 이어나갔다.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걸 그 녀석은 미리 알고 있었다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야 올마이티니까 예지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놀라진 않겠지만, 그 녀석이 그런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잠깐.’
그 순간, 프레이는 과거 나이아가 마계에 대해 말했던 내용을 불현듯 떠올렸다. 지구에서 본 적 없는 무수한 몬스터가 마계에 존재하며, 그중에는 인간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고 했다.
‘코르니카에 나타난 그 괴물이, 나이아가 그때 말한 인간형 몬스터라면…. 이런 맙소사!’
터무니없는 추측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사이 아르스는 분석을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굳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우리 자이안은 일단 무사한 것 같아. 근데 통신이 언제 복구될지는 모르겠네. 순전히 그 성격 나쁜 고물 펜던트 마음이라.”
“전엔 네 자식이라면서 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내 자식이잖아. 난 욕해도 되지.”
한 차례 쓴웃음을 짓고, 프레이는 손에 쥔 통신기를 초초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르스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방이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 * *
“우리 자이안, 키가 많이 컸네?”
처음엔, 아르스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투명한 공간이었다. 한 번 주위를 둘러보자 새하얀 공간이 되었고, 눈을 깜빡거리자 추억 속에 남아 있던 정원이 되었다.
정원 한쪽, 익숙한 위치에 익숙한 티 테이블이 있었다. 자이안이 스승 신스 웰플레인에게 수업을 받을 때, 그의 어머니 나이아 알레프는 거기에 앉아 천진하게 자이안을 응원하곤 했다.
바로 그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자이안은 짧게 숨을 들이켜고,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시선 끝에 보이는 자신의 손발은 어린 시절의 작고 미덥지 못하던 그것과는 달랐다.
이건 환상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자이안은 어리석지 않았다.
“어머니.”
자이안은 고개를 들고 그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