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상인, 벤야 알즈레드 (4) (22/210)


22화 상인, 벤야 알즈레드 (4)
2022.10.25.


“그게, 여긴 내가 어렸을 때 만들어서 놀던 비밀 통로인데, 요즘 아빠 행동이 좀 수상해서……. 여자라도 생겼나 궁금해져서 며칠 전부터…… 그런데 자이안 너는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어?”

설명을 들은 자이안은 손뼉을 치며 납득했다. 어쩐지 지나치게 잘 만들어진 비밀 통로다 싶었다.

“저는…… 저도 유리아랑 비슷하긴 한데.”

자이안은 난감한 나머지 대답을 얼버무렸다. 네 아버지가 마물과 결탁한 것 같으니 감시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아빠가 무슨 나쁜 일 했어?”

“네, 네?”

자이안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좋은 일 때문에 온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자이안 너, 나쁜 일엔 오지랖 잘 부리잖아?”

「자이안, 거기서 동요하면 안 되지이. 그러면 유리아 말이 맞는다고 대답하는 셈이잖아?」

아르스의 조언에 자이안은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나저나 섬뜩하기까지 한 관찰력이었다. 본래도 빼어날 정도로 좋았던 유리아의 눈은 훈련을 거듭할수록 상식을 일탈하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좀 석연치 않은 점이 몇 가지 있어서.”

“그래? 그럼 됐고.”

유리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의 말을 믿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를 너무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한발 물러났을 뿐이다.

「저 아저씨 정말 뭐가 있긴 한가 보네에. 지금도 꽤 동요하고 있어.」

비밀 통로 바닥, 갈라진 틈 너머로 보이는 벤야는 누구 한 명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 업무를 붙잡고 있었다.

간간이 펜을 멈추고 인상을 쓰거나 분을 삭이듯 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태도였다.

“여자가 생긴 건 아닌 모양이네.”

함께 지켜보던 유리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이안은 뭔가 알고 있지? 아빠한테 무슨 일이…….”

“이런 제기랄!”

별안간, 책상을 내려치는 거친 소리와 함께 사나운 욕설이 들려왔다. 유리아가 숨을 삼켰다.

“……아빠가 저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봐.”

“누구냐? 누가 자꾸 방해를 하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자이안? 그 소년인가? 내가 판단을 그르쳤나? 이제 마지막 한 걸음 남았는데…… 뜻대로 안 되는군. 젠장.”

자리에서 일어난 벤야는 회장실 여기저기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흠칫 놀라며 긴장했으나, 다행히 그들이 숨어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회장실 한쪽에 비치된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이것저것 건드리자, 바닥 일부가 교묘하게 접히더니 숨겨진 계단이 드러났다.

“어…… 저건 내가 만든 거 아닌데.”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벤야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핀 다음 문을 잠그고 계단으로 내려가 사라졌다. 그제야 자이안과 유리아는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겠네.’

발뺌할 수 없는 완벽한 물증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전의 모습에서 미루어 보아 코르니카 바깥에 마물의 대군을 준비한 것이 벤야임은 거의 확실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뻔히 보이는 정황을 부정할 만큼 자이안은 낙천적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너무 늦지만 않으면 바로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은…….’

“유리아, 피해요!”

“어?”

자이안이 급하게 유리아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시커멓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갈랐다. 위험을 느낀 유리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자이안은 남은 손으로 장검을 뽑으며 오감을 집중했다.

‘마물의 냄새…… 왜 여태까지 눈치 못 채고 있었지?’

「이런! 나이트 크롤러잖아!」

아르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이트 크롤러요?’

「전투 능력은 고블린이랑 비슷하지만, 그림자에 동화되는 귀찮은 성질을 가진 마물이야. 조심해! 이렇게 깜깜한 곳에서는 하나하나가 오크보다도 위험하니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마물이었다. 어쩌면 특수한 성질 탓에 자이안의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유리아. 꽉 붙잡아요. 조금 거칠게 움직일게요.”

“어, 어어?”

한 손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은 채 자이안이 바닥을 박찼다. 방금 공격으로 나이트 크롤러의 냄새를 기억했다.

주변에서 감지되는 마물의 수는 넷. 하나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조금 떨어진 곳에 쥐 죽은 듯 숨어 있었다. 자이안의 목적은 그 셋이었다.

「나이트 크롤러가 귀찮은 점은 또 있어. 핵을 정확히 파괴하지 않으면 잘 안 죽는다는 거야. 정중앙을 확실히 노려야 해.」

어려운 요구였지만 아주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정중앙을 노려 한 놈을 찌르자, 어둠 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감은 잡은 자이안은 즉시 다른 마물에게로 향했다.

“자, 잠깐! 자이안! 뭐야?! 서, 설마 암살자야?”

“암살자보다 훨씬 끔찍하고 위험한 거죠.”

“내, 내려줘! 나도 싸울 수 있어!”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요.”

연달아 세 놈을 재빠르게 처리한 자이안이 뒤쫓아 온 한 놈을 요격했다. 두 팔이 잘리고 정중앙을 꿰뚫린 마지막 나이트 크롤러가 무너지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

「자이안, 뭐 하는 거야! 방심하지 마!」

아르스의 호통에 자이안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이트 크롤러는 넷이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기척을 숨기며 잠복해 있던 마지막 한 놈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두 팔을 휘두르며 등 뒤에서 급습했다.

몸을 틀어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내고, 불안정한 자세로 재차 휘두른 칼날은 놈의 어깻죽지를 긁는 데 그쳤다. 자이안이 혀를 찬 순간 유리아가 움직였다.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들려는 놈의 정중앙에 호신용 단검이 번개처럼 꽂혔다. 움직임을 멈춘 마물의 몸이 무너졌다.

“어, 어라.”

유리아의 얼빠진 탄성이 고요해진 비밀 통로에 울렸다.

「우리 자이안, 내가 말 안 해도 알지?」

‘……네.’

아주 잠깐의 방심. 그 실낱같은 틈이 자이안은 물론이고 유리아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 뻔했다.

‘제가…… 제가 어느새, 교만에 빠져 있었네요.’

「……어? 교, 교만…… 아니, 그, 그 정돈 아닌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 자이안도 마찬가지고? 괜찮아, 괜찮아. 다행히 큰일이 난 것도 아니잖니.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이안은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기는 자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일격이 우연이라면 놀라웠다. 하지만 과연 우연이었을까?

자기 손을 내려다보는 유리아의 두 눈동자에는 희미한 보라색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안이잖아!」

아르스가 눈을 부릅떴다.

‘마안이라면, 삼촌과 같은 힘이란 말씀이세요?’

「같은 계통이긴 해. 성능은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래, 조짐은 있었네. 유리아가 눈이 좋다고 그랬지? 원래부터 마안을 개화할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우리 자이안이 시킨 훈련, 꾸준히 복용한 MP 증강제, 마지막으로 마물과의 접촉이 계기가 된 거고.」

유리아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보라색 불꽃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본인은 애초에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혹시…… 주, 죽은 거야? 내, 내가 죽인 거야……?”

“죽였죠. 마물을.”

자이안이 마법으로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어두운 비밀 통로가 밝아지고 마물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잿더미 같은 것이 통로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마물?”

“유리아가 방금 죽인 건 마물이었어요. 그림자 속에 숨어서 사람을 습격하는 위험한 놈이죠. 그런 마물이 여기 다섯 마리 있었어요.”

“마물이, 왜 여기에?”

유리아의 의문은 지당했다. 인구 10만에 달하는 대도시 한복판에 마물이 나타난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고, 만약 일어난다면 도시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질 무시무시한 사태다.

“잠깐만, 이거…… 아빠랑 관계있는 일이구나. 그렇지?”

뭐라 둘러대기도 전에, 유리아의 관찰력이 서슴없이 핵심을 꿰뚫었다. 자이안은 동요를 숨기며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이안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어. 마치 여기 마물이 나타날 걸 예상한 것처럼.”

맹점이었다. 조금 전 아르스의 조언을 생각해 초연함을 유지한 것이 반대로 독이 됐다.

「아하하하! 우리 자이안이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네에. 괜찮아, 괜찮아. 정직하다는 건 미덕이라고?」

이제 와서 얼버무려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문제는 ‘진실을 어디까지 알리느냐’다.

「어쩔 수 없네. 차라리 전부 알려주고 도움을 구하자. 마침 일손도 부족했는데 잘됐다.」

‘자칫 유리아가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벤야와 유리아는 가족이잖니. 유리아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그리고 마안이 개화한 이상, 우리 자이안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할 거야. 실전 경험이 조금 문제인데, 방금 전에 크롤러 한 마리를 거침없이 죽인 걸 생각하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고.」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 자이안이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건 확실한 게 아니에요. 대부분이 제 추측이고, 아직 물증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이안은 지난 2주 동안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유리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길지 않은 설명이 끝난 뒤, 그녀는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빠가, 마물이랑……? 대체 왜?”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정황상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대통령 선거다. 그러나 자이안은 벤야가 고작 권력 때문에 마물과 손을 잡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이안, 권력을 우습게보면 안 돼. 사람은 권력을 위해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도 있는 생물이거든.」

‘벤야 님이 정말 그런 분일까요?’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그 말이 정답이었다.

“아빠를 막아야 돼. 더 늦기 전에.”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위험할 거예요.”

“나도 알아. 방금 네가 싸우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 하지만…… 가족의 잘못은 가족이 바로잡아야 해. 어렸을 때 아빠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아빠한테 돌려주는 거야.”

자이안은 내심 감탄했다. 가족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도 좌절에 빠지지 않고 앞을 향하는 그 모습은 눈부시기까지 했다.

“우리, 역할을 분담하자. 자이안은 지금까지처럼 바깥에 모여드는 마물을 상대해 줘. 하지만 절대 무리하면 안 돼.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쳐야 돼. 나는 상회 내부의 내 세력을 움직여서 물증을 확보하고, 그걸 가지고 아빠를 설득할게.”

“벤야 님이 설득을 들을까요?”

“나도 몰라.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리 반문하는 유리아의 두 눈동자에는 확고한 결의가 어려 있었다.

“알았어요. 벤야 님에 대한 건 유리아에게 맡길게요.”

“응!”

둘은 벤야가 다시 회장실로 돌아오기 전에 몰래 상회 본부를 빠져나왔다. 머뭇거릴 여유 따윈 없었다. 유리아는 자기 세력을 모아 지시를 내리기 위해 곧바로 상회 본부 정문으로 향했다.

자이안도 코르니카 바깥으로 향했다.

「자이안, 그쪽 상황은 아르스한테 대충 들었다.」

가는 도중, 프레이의 통신 마법이 걸려 왔다. 자이안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삼촌! 마물들은 어떻게 됐어요?”

「아…… 그게 말인데. 안 좋은 소식 하나, 더 안 좋은 소식 하나, 좀 좋은 소식 하나. 이렇게 있다. 뭐부터 듣고 싶으냐?」

“무슨 선택지가 그래요?”

「잔말 말고 고르기나 해.」

“더 안 좋은 소식부터요.”

「일단 눈에 보이는 마물들은 다 쓸어 놨는데, 의미가 없더라고. 마물들이 또 잔뜩 모여들고 있다.」

끔찍한 소식이었다. 자이안은 신음을 터뜨리며 재차 물었다.

“안 좋은 소식은요?”

「소환 한계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앞으로 1분도 안 남았다.」

“……그럼 좋은 소식은 대체 뭐예요?”

프레이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정말 좋은 소식을 전했다.

「마물들이 대체 어디서 이렇게 바글바글 솟아나는지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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