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상인, 벤야 알즈레드 (3) (21/210)


21화 상인, 벤야 알즈레드 (3)
2022.10.24.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착하고 똑똑하지는 않지. 그런 놈들 중 일부는 마물과 손을 잡는다거나, 마물을 지배해 아군으로 삼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 놈들을 ‘마인’이라고 부른다.」

동녘이 희푸르게 밝아오는 이른 시간. 자이안은 유리아의 훈련을 지켜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두 각성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마냥 허황된 얘기도 아냐. 각성자도 MP를 사용해서 여러 능력을 다루는 거니까.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꿈의 에너지로 보이는 있지이.」

「원래 잘못은 과한 욕심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다. 마인도 마찬가지다. 과한 힘에 취해 인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물 편에 붙어버리지. 본말전도다. 아니면 뭐, 처음부터 인류를 배신할 생각으로 손을 대는 놈들도 있고.」

「MP라는 게 기본적으로 인간한테는 독극물이거든. 각성자가 멀쩡한 건 MP에 몸이 적응하는 ‘각성’이라는 과정을 거친 다음 용례를 지켜 사용하기 때문이고. 한두 번 실수한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지만, 과한 MP에 장기간 노출되거나, 자의로 그런 힘을 체내에 받아들이거나 하면…….」

「마물이 된다. 인간과 동등한 지능, 마물의 강력한 힘을 가진 채 본능대로 인류를 적대하는 끔찍한 존재가 탄생하지.」

자이안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토했다. 목제 단검을 들고 자이안이 지시한 동작을 반복하던 유리아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왜, 왜? 뭐 잘못됐어?”

“아뇨, 유리아는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조금 더 하체의 움직임과 발의 간격을 신경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요.”

물 흐르듯 펼친 자이안의 시범에 이번엔 유리아가 신음했다. 이제 겨우 입문한 그녀가 보기에도 완벽한 동작이었다.

백작가의 아들이라더니? 일리움의 귀족들은 다들 전투 민족이라도 되나?

“초조해하지 마세요. 유리아는 제가 가르친 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해요. 재능도, 노력하는 자세도.”

“저, 정말로?”

“물론이죠.”

참고로 자이안이 누굴 가르치는 건 유리아가 처음이다.

「문제는…… 벤야가 마인인지 아닌지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군.」

프레이의 ‘힘의 마안’은 모든 힘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강대한 능력을 가졌지만, 통신 너머로까지 그 힘을 모두 발휘할 수는 없었다.

하긴, 마물 감지 능력이 프레이도 인정할 만큼 예민한 자이안조차 코앞에 다가오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벤야의 위장이 뛰어난 것이다. 그도 아니면 아예 벤야가 마인이라는 전제가 틀린 것이거나.

프레이를 소환해 벤야의 정체를 간파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게 옳은 판단일지는 의문이 남았다.

현재 펜던트의 소환 기능 충전치는 95%. 매일 스무 마리씩 고블린을 쓰러뜨린다고 치면 약 두 달에 한 번 빈도로 프레이를 소환할 수 있다.

벤야가 마인이 아니고, 모두가 헛다리를 짚은 거라면? 두 달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는 셈이다.

‘만약 삼촌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이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택 최상층 벤야의 방 창문 언저리에 아까부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훈련을 받는 딸이 걱정되어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정작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물어보면서.

서툴고, 그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다. 정말 마인일까?

「나도 저렇게 인간적인 마인은 본 적 없다만…….」

창문 근처에서 우왕좌왕하는 벤야를 보며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내심은 자이안과 같았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벤야가 마인일 가능성 자체도 몹시 낮았다.

그럼에도 자이안에게 마인에 관해 알린 것은, 가능성이 0은 아니니 경계를 풀지는 말라는 의미다.

「뭐가 됐든,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아닐 거야. 마인화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지지는 않거드은. 짧아도 몇 달 단위로 진행되는 거니까,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되돌릴 수 있어.」

「그러니까 자이안, 마음 놓지 마라. 벤야의 동향에서 눈을 떼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뭐라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 한다. 여차하면 나나 아르스를 소환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만약 마인화가 진행 중이라면…… 마인이 되고 나면 모든 게 늦는다.」

‘알겠습니다.’

둘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며 자이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르스는 신중한 표정으로 공정을 진행해 나갔다. 겹겹이 둘러친 보안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벗기며 그때마다 드러나는 정보들을 뇌리에 담는다.

자정을 한참 지난 깊은 밤. 자이안은 말할 것도 없고 50일 넘게 깨어 있었던 프레이도 지금은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프레이가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한계 기간은 약 2달. 슬슬 수면 부족의 반동이 나타날 시기였고, 늦기 전에 푹 쉬라는 아르스의 제안을 그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됐다.”

공정을 시작하고 4시간 15분차. 무기질적인 두 눈동자에 환희의 빛을 담으며 아르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힘이 빠진 어깨가 축 늘어지고 표정 없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공학자로서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악전고투한 지난날을 보상받을 때였다. 아르스는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 쓰고, 모든 보안이 해제된 펜던트의 중추에 담긴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스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마침내 내용을 끝까지 확인한 뒤, 아르스는 작은 한숨을 토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이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기계적인 보안을 전부 해제했음에도 불구하고 펜던트는 모든 정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미리 선을 그어 놓고 네게 알려줄 건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건 선을 그은 나이아 본인, 그리고 펜던트의 주인인 자이안뿐이리라.

다만, 드러난 것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는 건 꽤 많았다.

‘그래, 공학만 가지고 에고 아티팩트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지. 하물며 나이아는 잘 모르는 건 감에 의존하는 반쪽짜리 공학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기 영혼을 가지고…… 이건 너무 무모한데.’

아마도, 나이아는 펜던트의 AI를 만들기 위해 자기 영혼마저 재료로 쓰려 했다.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그 결과가 나이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제 알 수 없지만.

‘차원을 넘은 뒤에, 나이아는 분명 기억을 잃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아.’

마계에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한 채 도망친 나이아의 그 뒤 행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펜던트 개조는 마계에 있었던 1년 동안에만 이뤄진 게 아냐. 마계에서 도망치고 저쪽 세계에 불시착한 뒤에도 나이아는 꾸준히 펜던트를 손봤어. 그 애가 모든 걸 잊지 않았다는 증거야.’

그녀가 무엇을 우려하여 싸움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펜던트를 개조했는지는 이제 알 길이 없다. 게이트가 닫혔을 뿐 마계와 그 흑막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너무 까마득한 소리다.

아르스를 포함한 전문가들의 관측 결과, 마계는 지구 시간으로 최저 몇 만 년 동안 단절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밝혀졌다.

‘지구는, 그렇지. 그러면 자이안이 살고 있는 저쪽 세계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르스가 흠칫 놀라며 숨을 삼켰다. 눈앞에 언제부터인가 메시지 박스가 떠올라 있었다.

[데우스 마키나. 원하는 정보를 찾았다면 어서 접속을 끊기를 바람.]

펜던트의 AI의 메시지였다.

[중추기관과 외부의 불필요한 접속은 본 기기의 성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

“있잖아. 이걸 왜 나한테 보여준 거야?”

[당신의 언동에는 어폐가 존재함. 당신이 강제로 보안을 해제해 중추기관에 접속한 것임.]

“거짓말 마.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잖아?”

펜던트가 침묵했다. 참으로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대신 대답할까? 나이아의 의도지?”

[대답할 수 없음.]

“그것도 나이아의 의도고?”

나이아가 펜던트를 통해 무언가를 안배했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는 아마 자이안을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본 기기는 당신들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음.]

“왜?”

[당신들의 조언이 주인의 판단에 과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임.]

[주인의 판단은 오직 주인의 주관 하에 이루어져야 함.]

[당신들의 역할이 ‘서포터’임을 잊지 않기를 바람.]

“자이안은 이제 겨우 16살인데? 그 어린애가 혼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너무 과한 기대 아닐까?”

[주인은 해낼 것임.]

[전 주인이 그랬듯, 본 기기 역시 주인을 신뢰함.]

다시, 펜던트가 침묵했다. 사방에 떠오른 홀로그램 화면이 노이즈와 함께 일그러졌다. 펜던트 측에서 접속을 강제로 끊은 것이다. 아르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첨언하겠음.]

갑자기 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당신은 ‘올바른 판단’을 언급했으나, 본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음.]

[본 기기는 주인이 어떠한 판단을 내리더라도 존중할 것임.]

그것만 말하고 다시 메시지가 사라졌다. 얼이 빠져 있던 아르스는 곧 혼자서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참지 못한 프레이가 벌떡 일어나 뒤통수를 후려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 * *

벤야의 저택에서 신세를 진 지 어느새 2주가 지났다.

그사이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벤야가 마인화하려는 조짐도 없었고 수상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유리아는 아침저녁으로 훈련에 매진하는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유리아의 성장은, 그녀의 자질을 종합해 단검술을 제안한 자이안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단 2주 만에 기초를 모두 익혔다. 남은 건 꾸준한 반복 숙달과 체력 단련, 그리고 경험 정도였다.

애초에 척후도, 암살자도 아닌 자이안으로서는 그 이상 가르치고 싶어도 아는 게 없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이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는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자이안은 코르니카 주위에 비정상적인 숫자의 마물들이 모여드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이안은 이를 감지하자마자 밖으로 나가 최대한 마물의 숫자를 줄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전날 죽인 숫자 이상의 마물이 또다시 모여들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나절 이상을 소모해야 겨우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숫자가 많았다.

그만큼 자이안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인위적인 현상임은 확실했다. 현재로서는 날이 갈수록 마물의 냄새가 짙어지고 있는 벤야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실수로 꼬리를 드러내지도 않고, 은근슬쩍 떠봐도 동요하지도 않아. 강철 같은 인간이군.」

「만약 정말 범인이 아니면 좀 웃기겠다. 그치?」

「그러게 말이다.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

문제는 둘이었다.

본질적으로 검사인 자이안은 광범위 섬멸 능력이 부족해 마물들을 잡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첫 번째. 마물을 잡는 동안 벤야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없다는 점이 두 번째.

다행히 해결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자이안은 오늘 당장 그 방법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오전 10시경. 자이안은 몰래 저택을 나섰다. 인적이 없는 길을 골라 도시를 가로지른 뒤, 그대로 성벽을 넘어 코르니카를 빠져나왔다.

후각으로 감지되는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아 정확하게 가늠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최소 천 마리 이상. 그 중 대다수가 코볼트나 고블린 같은 하급 마물이지만, 각성자가 없는 자이안의 세계에서는 대도시를 하루아침에 멸망시킬 수도 있는 끔찍한 규모였다.

‘부탁합니다, 삼촌.’

일주일간 최소 수백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마물을 죽인 만큼 펜던트에도 충분한 MP가 저장되어 있었다.

아르스의 분석에 의하면, 안전장치가 과하게 적용되어 있을 뿐 소환기능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소환을 위해 필요한 자원은 마물을 죽일 때마다 펜던트에 조금씩 쌓이는 MP였는데, 100% 이상 MP가 저장되면 그때부터 소환 가능 시간이 늘어나는 방식이었다.

아르스가 단순화시킨 수식에 대입하면, 현재 펜던트에 저장된 MP는 150/100, 150%의 저장률로 프레이를 소환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약 30분이다.

필요하다면 중간에 소환을 취소해 MP를 아낄 수도 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사태를 완전히 해결할 때까지 저장된 MP를 아낌없이 들이부을 셈이었다.

「기껏 모은 MP를 써야 한다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펜던트를 감싸 쥔 자이안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펜던트가 빛을 발했다. 이윽고 홀가분한 차림에, 손등에 보석이 박힌 장갑을 낀 프레이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

“……삼촌?”

뚱한 표정으로 자이안을 빤히 바라보던 프레이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움찔한 자이안이 주춤거리는 것보다도 먼저 그가 자이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가서 실수하지 마라. 그렇다고 무모한 짓 하지는 말고.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 알겠지?”

다시 떨어진 프레이가 자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넋이 나가 있던 자이안의 얼굴에 이내 굳은 결의가 어렸다.

「부럽다아…… 나도 소환되고 싶다아…….」

지구에 혼자 남은 아르스가 손가락을 물며 부러워했다.

자이안은 한차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코르니카로 향했다.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레이도 등을 돌렸다.

마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금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숲 곳곳에 숨은 마물들의 존재를 날카롭게 간파했다.

프레이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양쪽 장갑에 박힌 보석이 공명하며 낮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포칼립스, 모든 마물의 종말이 다른 세계에 그 위명을 떨치는 순간이었다.

한편, 코르니카로 되돌아온 자이안은 곧장 알즈레드 상회 본부로 향했다.

멍청하게 정면으로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난 2주간 자이안은 두 각성자의 도움을 받아 상회 본부의 경계망을 우회하는 침투로를 미리 파악해 놓았다.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벤야의 집무실 바로 위 비어있는 공간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 자이안? 네가 어떻게 여길…….”

그러나 그 자리에는 선객이 와 있었다. 자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리아야말로 여기서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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