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상회의 영애 (2) (16/210)


16화 상회의 영애 (2)
2022.10.19.


자이안이 상대한 매복병은 30명 모두 죽지 않고 제압되어 있었다. 단장은 그 사실에 두 번째로 놀랐다. 첫 번째는 물론 병아리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은 자이안의 외모였다.

“조력 감사합니다. 덕분에 피해를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용병들이 전장의 뒤처리를 하는 사이 단장이 대표로 자이안과 인사를 나눴다. 설마 용병에게, 그것도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상대에게 경어를 들으리라 생각지 못한 자이안은 작게 감탄했다.

도적들의 피로 칠갑을 한 흉흉한 겉모습과는 달리 가슴에 손을 얹고 묵례하는 동작은 완전히 몸에 익은 듯 자연스러웠다.

평범한 용병이 아니다. 그들에게 호위를 받는 마차들 역시 평범한 상단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마침 잘됐군. 이참에 은혜나 좀 팔자.」

자이안의 추측에 프레이가 희희낙락하며 말했다.

‘그럴 생각으로 도와준 게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라, 이놈아. 너 지금 신분 보장도 안 된 불법 입국자야. 상대가 어느 정도 힘과 지위를 갖추고 있다면 신분 증명 정도는 해주지 않겠냐?」

자이안은 처음에는 꺼려 했으나, 이어진 설명에는 납득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대뜸 부탁하지는 말고. 너무 수상해 보이니까. 우선…… 식량이 떨어져서 곤란하던 차라고 대충 둘러대면서 동행을 제안해. 며칠 같이 지낸 다음 상대 쪽에서 어느 정도 널 신용한 것 같다 싶을 때 본론을 꺼내는…… 끄엒.」

근처에서 프레이를 빤히 지켜보던 아르스가 갑자기 그의 목을 팔로 휘어 감았다. 방해받은 프레이가 도끼눈을 했다.

「아까 나보고 순진한 애 속이지 말라느니 해놓고선, 자기는 아주 좋은 거 가르친다아? 그치?」

「노처녀 냄새 나니까 떨어져 인마. 그냥 처세술 좀 가르쳐주는 거잖아. 어벙하게 있다가 뒤통수 맞지 말라고.」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성은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이윽고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 말씀이 맞습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요.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죠.’

가벼운 통성명을 마치고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방랑 중에 식량이 떨어져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그건 큰일이네요!”

단장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의 옆에서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던 유리아가 말했다.

“식량이 필요하신 거죠? 어느 정도나 필요하세요? 아, 괜찮으시면 목적지까지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저희 목적지는 코르니카인데, 너무 크게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아가씨, 잠시만…….”

묘하게 눈을 빛내며 말을 쏟아내는 유리아를 단장이 가로막았다. 그녀를 데리고 조금 거리를 벌린 그가 등을 지고 작게 말했다.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수상한 소년입니다. 저 소년 혼자서 서른에 달하는 도적들을 제압한 것도 이상합니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어차피 저분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싸워도 상대도 안 될걸?”

단정적인 말에 단장은 흠칫하며 말을 멈췄다. 용병들이 정면의 도적을 상대하는 사이, 마차에 숨어있던 일꾼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소년의 행동을 지켜본 것이 그녀였다.

“그 정도로 강합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가장 강해.”

직접 싸울 힘은 없지만, 그녀의 눈썰미는 닳고 닳은 용병인 그도 인정할 만큼 정확했다. 단장은 신음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렇게 되면 동행해도 문제, 내쳐도 문제였다.

“차라리 저희 쪽에서 먼저 은혜를 파는 게 낫다는 거군요.”

“그렇지. 서로 얼굴 붉혀서 좋을 거 없잖아? 우리만 다치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얌전히만 지내 준다면야 저희로선 손해 볼 것도 없으니.”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논의를 마친 둘이 다시 다가왔다. 자이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 나름대로 신경 썼겠지만, 꾸준한 MP 흡수를 통해 강화된 오감은 그들의 대화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포착한 뒤였다.

「똑똑한 여자군. 용병도 생긴 거하곤 달리 사고방식이 꽤 유연하고.」

덕분에 큰 마찰 없이 동행할 수 있게 됐으니 자이안으로선 다행이었다.

“단장이랑 얘기해 봤는데, 마침 물자는 넉넉하니까 한 명 정도는 괜찮다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마침 코르니카로 가는 길이었어요. 받은 만큼 열심히 일할게요.”

“저희가 먼저 받은 게 있는데, 그럴 수는 없죠. 식객으로 대우해 드릴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지내세요. 2번 마차에 자리가 좀 남으니 거기서 지내시면 돼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아, 저는 16살이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열여섯.”

단장이 그 숫자를 황망히 읊었다.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매복 중인 도적 30여 명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한 사람이 열여섯? 보고도 못 믿을 얘기였다.

뒤처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돈이 될 만한 잔해는 수거하고, 시신은 구덩이를 파 소각하고, 살아남은 도적은 반항할 수 없도록 단단히 구속해 끌고 가기로 했다.

도적을 생포해 관청에 넘기면 그럭저럭 괜찮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도적 50여 명이면 적어도 30명의 용병단이 하룻밤 술판을 벌이기엔 차고 넘치는 돈이 될 것이다.

“준비 끝났습니다, 아가씨.”

“그래? 그럼 얼른 가자.”

포박된 도적 쉰 명을 매달고 상단이 마침내 느린 속도로 출발했다.

“다시 소개할게. 나는 유리아 알즈레드야. 지금 이 상단의 책임자이기도 하고, 코르니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알즈레드 상회의 영애이기도 해. 아버지가 회장이거든.”

“사정이 있어 여행 중인 자이안이에요. 그게…… 어, 죄송해요. 조금 놀랐어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돈 많고 유복하게 자란 거지, 뭐.”

그리고 자이안은 어째서인지 2번 마차가 아니라 유리아가 타고 있는 1번 마차에 앉아 있었다.

「알즈레드 상회가 그렇게 대단한 상회냐?」

‘어느 정도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용병단을 전속으로 계약해 부릴 정도면 작은 규모는 아닐 겁니다. 게다가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영애라 칭할 정도면…….’

웨코스 공화국은 대륙 전체를 봐도 이질적인 정치체계를 취하고 있었기에 건너 건너 이웃에 불과한 일리움 태생인 자이안은 많은 걸 알지 못했다.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 여러 명이 나라를 운영하며, 그런 정치체계 덕분에 상인이나 기술자 등도 경우에 따라 큰 권력을 가진다는 정도만 알았다.

“아까 싸우는 걸 봤는데 진짜 대단하더라.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휙 사라지는데, 그다음에 숲속에서 도적들 비명 소리가 연달아서 들리고…….”

마주 앉은 유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재잘대는 모습을 자이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흡사 영웅담을 듣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도적들도 기습할 생각만 했지, 기습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전혀 대비가 안 돼 있었거든요.”

“그래도 30명이 넘었잖아? 도적들도 금방 눈치챘을 텐데. 게다가 넌 무기도 없었지?”

“숲은 숨을 곳이 많으니까요. 무기로 삼을 것도 많죠.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사용하기에 따라선 효과적으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어요.”

“오오! 이렇게, 파팍! 하고 뒷덜미를 후려치는 거구나? 나도 그거 소설책에서 봤어.”

“아하하…….”

뒷덜미는 아니었지만, 명치나 고간 등의 급소를 집중적으로 노려 일격에 제압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으나 그녀가 즐거워하니 다행이었다.

“하…… 좋겠다.”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유리아가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방금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갑자기 뭐가요?”

“어…… 응? 어? 내, 내가 뭐라 그랬나?”

“방금 ‘좋겠다’라고…….”

“으, 으으응? 이상하네? 내가 왜 그런 소릴 했을까? 자, 잠이 덜 깼나? 에헤헤헤…….”

눈을 동그랗게 뜬 유리아가 얼버무리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대놓고 숨기는 게 있다는 태도였으나 자이안은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결국 자이안은 동행 첫날 해가 기울 때까지 유리아와 동승했다. 그녀는 특히 자이안의 강함에 관심이 많았고, 화제도 대부분 그에 관한 것이었다.

자이안은 프레이와 아르스의 조언에 따라 어느 선까진 밝히고 어느 선부터는 얼버무리며 상대했다.

밤이 깊어지자 상단은 가도에서 조금 벗어나 자리를 잡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뭐라도 돕고 싶었으나, 그런 자이안을 유리아가 강제로 쉬게 했다. 결국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야영 준비가 끝났다.

단장을 비롯한 용병과 일꾼들 대부분이 바깥에 모포를 깔아놓고 자는 가운데, 마차의 남는 공간에 편히 몸을 뉠 수 있게 된 자이안은 솔직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유리아와 단장을 제외한 용병 대부분이 자이안의 실력에 불신감을 품고 있는지라 더욱 그랬다.

「이럴 때 도적 같은 게 한 번 더 찾아와야 하는데. 이번에는 모두가 보고 있을 때 당당하게 실력을 보여주자고.」

‘삼촌,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자이안, 얘 지금 네가 무시당하니까 심통 나서 이러는 거야.」

「뭐래? 너 치매 왔냐?」

묘하게 정신적으로 피곤한 하루였다. 두 어른이 칠칠치 못하게 아옹다옹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이안은 빠르게 잠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 * *

깊은 밤.

얕은 수면을 취하던 자이안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짐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본 다음 그는 도끼눈을 뜨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삼촌, 제발…….”

「뭐? 나? 내가 뭐? 뭘 잘못했다고?」

“삼촌이 자기 전에 이상한 말씀을 하시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잖아요.”

마물의 냄새였다. 코카트리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약하지만, 동시에 고블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력한 마물이 하나.

자이안 혼자면 모를까, 상단의 인원 전부를 깨워 도망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자이안은 마차에서 내려 불침번을 서고 있는 용병들에게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자이안의 접근을 알아챈 용병들이 칼자루를 쥐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나 위협이 코앞에 닥친 지금 용병들의 불신감 따위는 중요치 않은 문제였다.

거침없이 다가간 자이안이 무기를 뽑으려는 용병들의 손을 꾹 누르며 낮게 말했다.

“마물이 오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마물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다른 사람들을 깨워 주세요. 동요가 퍼지지 않도록 조용히.”

“잠깐 기다…….”

당황하며 불러 세우려는 용병들을 지나쳐 자이안은 야영지의 외곽, 마물이 오고 있는 방향에 자리를 잡고 섰다.

곧 야영지 일각이 부산스러워지더니 급하게 차려입은 단장과 유리아가 자이안에게 달려왔다.

“마물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쉿.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일꾼들 귀에 들어가면 소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저도 사람들을 지키기 어려워져요.”

타이르는 듯한 말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 차례 서로를 마주본 다음, 단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물이 오는 게 확실한가? 어떻게 알 수 있지?”

“마법 같은 겁니다.”

사실 전혀 달랐지만,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단장이 침음을 터뜨렸다.

“마법사였나…….”

“마법도 쓰고 칼도 쓰고, 이거저거 적당히 할 줄 압니다. 다행히 마물은 한 마리예요.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는데, 일단 고블린에 비교하면 꽤 강하고…….”

「아마 오크일 거다.」

“……오크인 것 같습니다.”

담담한 말에 둘은 눈을 부릅뜨며 헛바람을 삼켰다. 유리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단장, 어서 모두를 깨워. 도망쳐야 해.”

“하지만, 아가씨. 소년의 말에는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그냥 장난치는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거짓말이면 차라리 나아. 그냥 다 같이 한두 시간 밤잠 좀 설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정말 오크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면…….”

“이미 거리가 꽤 가까워졌습니다. 지금 도망칠 준비를 한다고 소란을 피우면 오히려 놈을 더 흥분시킬 가능성이 커요.”

현실적인 지적에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단 책임자로서, 회장의 딸로서 그녀에게는 한 명의 낙오도 없이 행상을 성공시킬 의무가 있었다.

유리아는 초초함을 다스리려 애쓰며 야영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냐. 방법이 있어.”

그녀의 시선이 야영지 구석에 고정되었다.

“미끼를 쓰자.”

“네?”

“도적을 미끼로 쓰자. 50명이나 되니까, 상단이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거야.”

생각지 못한 발상에 자이안은 멍청히 입을 벌렸다. 프레이와 아르스가 눈을 빛내며 탄성을 터뜨렸다.

「냉혹하고 합리적이군! 철저한 손익계산 끝에 내린 결론이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니까. 이 애는 확실히 상재가 있네에.」

잔인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자이안이라면 결코 고르지 않을 선택이기도 했다.

“무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뭐?”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정 제가 미심쩍으시면 그냥 단검 한 자루면 돼요.”

“자, 자이안? 설마…….”

“마물은 제가 막겠습니다. 생명은 숫자가 아니에요.”

유리아는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자이안이 손을 내밀자, 저도 모르게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꺼냈다.

단장이 놀라서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그를 밀치고 자이안에게 직접 단검을 건네주었다.

“미안, 지금 좀 혼란스러워서, 내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근데, 어, 뭐지? 이상한 기분인데…… 왠지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가볍게 웃은 자이안이 허공에 단검을 한 번 휘둘렀다. 날과 칼자루의 길이, 무게중심을 숙지한 뒤 다시 마물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쿵. 자이안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게 다였지만, 자이안의 감각에는 발끝을 기점으로 MP가 지면을 타고 뻗어나가다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확산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그로 관리 2단계. 마물에게 자신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기술 ‘도발’이다.

-그르르르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몸을 푼 자이안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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