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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상회의 영애 (1) (15/210)


15화 상회의 영애 (1)
2022.10.18.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 괜히 오지랖 부려서 기웃거리기. 둘, 못 들은 척 갈 길 가기.」

「나이아였다면 무조건 첫 번째겠지이.」

「야, 애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지 마.」

자이안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첨언이 없었더라도 그의 선택은 똑같았을 것이다.

“오지랖 좀 부릴게요. 숨어서 구경만 한다고 손해를 보진 않잖아요?”

「네 성격에 얌전히 구경만…… 아, 몰라. 알아서 해라. 난 안 도와준다.」

자이안이 다시 웃었다. 말은 그리 해도 그는 자이안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우려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무기가 없네.”

안전한 밀입국을 위해 하나뿐인 장검을 버린 게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뼈아픈 손해였다.

귀족의 교양으로서 마법도 적당히 배웠고 체술 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자이안의 본질은 검사였다. 검이 없으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한다.

「저거 좀 봐라. 맨손으로 고블린을 10초 만에 박살내는 놈이 무기가 없다고 고민하고 있네.」

「고블린을? 맨손…… 10초? 각성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며?」

「엄밀히 말하면 각성이랑은 좀 다른데…… 저쪽 사람들은 마물을 잡아도 능력을 각성 안 하는 모양이더라고. 그냥 저놈이 이상한 거야.」

말을 듣다 보니 자이안도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고민 중인지 깨달았다. 고블린을 1:1로 쓰러뜨리는 건 어느 정도 국력을 갖춘 나라의 왕실 기사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이다.

그마저도 완전무장 상태를 전제로 한다.

아이 하나를 한 팔로 안은 채 맨손으로 고블린을 죽이는 건 명백한 초인의 영역이다. 7년간 이어진 박해와 모멸의 기억, 그리고 대비도 없이 코카트리스와 마주쳐 사투를 벌인 경험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지금 자이안은 완전무장 한 도적단 정도는 맨손으로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다.

“제가 괜한 고민을 했네요.”

「자각했으면 됐다. 오만은 맹독이지만, 과소평가도 마찬가지로 자기 발을 묶는 족쇄에 불과해. 자기 힘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필요한 순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프레이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자이안은 걸음을 서둘렀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스가 히죽 웃었다.

-지극정성이네에. 누가 보면 자기 아들인 줄 알겠어?

고막을 거치지 않고 직접 꽂히는 목소리에 프레이는 움찔했다. 각성자가 의무적으로 익히는 텔레파시에 가까운 의사소통 수단이다.

당연히 그 말은 자이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민감한 화제라고 생각한 아르스가 나름대로 신경 쓴 것이다.

-평소엔 할 말 안 할 말 거리낌 없이 나불대는 녀석이…… 기분 나쁘게 뭐냐?

-내가 괜히 지레짐작하는 거면 좋겠는데, 혹시 아니면 어쩌나 걱정돼서.

흥, 하고 코웃음 친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자이안을 나이아와 동일시하고 집착할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생각 없어 보이냐? 좀 충격인데.

자기 우려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그를 보며 아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예상보다 더 프레이의 심리가 안정적이라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집착하고 있지.

그러나 이어진 말은 아르스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렸다.

-프레이 너어…….

-나이아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리고 자이안은, 우리 얘기는 지지리도 안 듣고 혼자 마계로 떠나서 마지막까지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죽은 줄 알았던 그 녀석의 하나뿐인 핏줄이고. 집착하지 말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말문이 막힌 아르스는 처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대조적으로 프레이의 표정은 초연했다.

-얼마든지 집착할 거다. 내가 아는 모든 걸 가르치고, 모든 힘과 기술을 전수하고 모든 애정을 쏟을 거다.

나이아 알코스, 홀로 지구를 구한 위대한 영웅은 너무나도 강하고 너무나도 고결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였다.

고아원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겨울밤, 혼란을 틈타 고아원장을 찌르고 그 시체와 다른 고아들을 미끼로 써서 오크마저 죽인 뒤 공황에 빠져 미칠 것 같았던 프레이를 위로하고 진정시킨 것이 나이아였다.

언론은 둘을 한데 묶어 최강의 각성자 남매라 일컬었지만, 프레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나이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걸맞다고 생각지 않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으나 무리였다.

그 누구도 그녀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패배를 몰랐고 절망도 몰랐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다.

자이안은 다르다. 비록 나이아를 닮긴 했지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그녀와는 달리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저 애가 나이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고, 끝까지 지켜볼 거다.

확고한 의지가 깃든 목소리로 프레이는 말했다.

-그게 삼촌인 내가 할 일이야.
 

* * *

소리의 근원지는 가도에서 수백 미터 벗어난 곳이었다. 예상대로, 인간 집단끼리의 싸움이었다.

완전 무장한 집단이 짐마차와 수레를 지키듯 둘러싼 채 도적단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뒤편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자이안은 은밀하게 우회해 숲으로 향하며 상황을 살폈다.

도적의 수 약 40명.

그에 반해 아마도 상단인 듯 보이는 집단은 30여 명.

도적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전세는 반대였다. 용병인지 기사인지 분간하기 힘든 30명은 견고한 진형을 유지한 채 침착하게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반격으로 도적들의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상단 호위대 중 신성술을 다루는 이가 존재한다는 게 컸다. 노랫소리를 닮은 축도가 자잘한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린 활력을 불어넣는다.

신성술사는 한 명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도적단은 머릿수의 우위조차 잃어버리고 열세에 처할 것이다.

「괜히 끼어들 필요는 없겠군. 굉장히 숙련도가 높은 집단이다. 저 정도면 소규모 고블린 무리 정도는 자력으로 토벌할 수도 있겠어.」

자이안도 처음에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조금 더 지켜보던 그는 곧 위화감을 깨달았다.

‘도적들의 행동이 이상해요.’

명백하게 열세임에도 도적들 중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도적이라는 게 결국 대의도 동료 의식도 없는 오합지졸 집단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관찰해보니, 도적들은 어느 정도 부상을 입거나 지치면 전투 불능이 되기 전에 후방으로 빠져 전력을 온존하고 있었다. 약탈이 아니라 상단을 묶어놓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흠…… 확실히 이상하군.」

‘함정이 준비돼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단이 등지고 있는 숲. 병력을 매복시켜 기습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몇 배나 되는 병력 차이로 앞뒤에서 협공당하면 제아무리 실력 있는 집단이라도 방도가 없다.

자이안은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어 숲속을 탐지했다. 작은 숨소리와 목소리, 병장기의 녹슨 쇠 냄새 따위가 빠른 속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 약 30.

「수가 꽤 많은데. 전멸할 수도 있겠어.」

‘제가 끼어들지 않으면 그렇게 되겠죠.’

프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근처에 마물의 기색도 없고 도적들 중에 만에 하나라도 자이안을 위협할 만한 강자 역시 없다는 것.

프레이는 못 이기는 척 말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그냥.」

‘감사합니다.’

그늘에서 벗어난 자이안이 상단의 후방으로 달렸다. 후위에서 연거푸 활시위를 당기며 아군을 지원하던 궁병이 가장 처음 이를 알아채고 눈을 부릅떴다.

크게 숨을 들이켠 자이안이 소리쳤다.

“매복입니다!”
 

* * *

“매복입니다! 적이 숲속에 매복하고 있어요!”

행상의 책임자를 맡은 유리아 알즈레드는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절대 나오지 말라는 신신당부가 있었지만,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마차 문을 열어젖힌 순간 다시 한 번 외침이 들렸다.

“매복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최대한 빨리 적들을 제압하세요!”

중성적인 느낌의 앳된 목소리였다. 숲에서 뛰어나와 용감하게 경고한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유리아보다도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심지어 무장조차 하지 않은 허름한 옷차림이었다.

그런 아이 혼자서 숲에 매복한 도적단을 상대한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유리아가 급히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소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으헤?!”

마법 같은 광경에 유리아는 얼빠진 비명을 터뜨렸다. 소년은, 정확히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유리아가 인지할 수도 없는 속도로 숲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직후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안쪽에서 메아리쳤다.

“집중해라! 진형이 느슨해지고 있잖아!”

“하, 하지만 단장, 매복이! 자칫 유리아 아가씨가!”

“어차피 앞의 이놈들 못 막으면 뒤지는 건 똑같아!”

상회 전속으로 고용된 용병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알즈레드 상회가 오랫동안 신뢰한 베테랑답게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도적들은 부상자를 뒤로 빼면서 전력을 온존하고 있어요! 한 번에 몰아붙여야 합니다!”

숲속에서 몇 번 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재차 뛰어나온 소년이 그리 외쳤다.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손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흠칫한 용병단장이 대치 중인 도적들을 유심히 살피고 그게 사실임을 간파했다. 그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진형 변경! 유린 진형! 놈들이 오늘 누굴 건드렸는지 저승길 선물로 똑똑히 알려줘라!”

한 차례 발을 구른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바꿨다.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고 철저하게 적을 섬멸하기 위한 진형.

호위 중인 상황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선택이었지만, 단장은 뒤쪽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비명 소리를,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정체불명의 조력자를 믿기로 했다.

“한 놈도 살리지 말고 쓸어버려!”

용병단이 노호를 터뜨리며 거세게 돌진했다. 기세에 압도된 도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얘기는 없었다.

그러나 도적들이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유린이 시작되었다. 30 대 40의 전투였으나, 전황은 300 대 40을 연상케 했다.

마차 밖으로 반쯤 몸을 내민 채 유리아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와 살이 튀고 고함과 단말마가 뒤섞인 생생한 전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리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나도, 언젠가…….’

그 순간 그녀의 곁에 소리도 없이 인기척이 나타났다.

“다들 실력이 대단하네요.”

“뺘아!”

뒤집어진 목소리로 비명을 지른 유리아가 입을 틀어막으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이 마차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숲을 종횡무진하며 매복한 적들을 상대했을 텐데도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모습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는다.

허름한 옷차림인데도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기품이 느껴졌다. 상회의 일원으로서 길러진 날카로운 눈썰미가 소년의 태생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자이안이라고 합니다. 다치지는 않으셨나요?”

소년은 성을 말하지 않았다. 복잡한 사정이 있으리라. 의문이 산더미같이 많았으나,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유리아가 결심을 마치고 두 손으로 맞잡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행상의 책임자인 유리아 알즈레드예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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