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나쁜 일 (2) (13/210)


13화 나쁜 일 (2)
2022.10.16.


「자이안. 네가 가진 최대의 무기가 뭐라고 생각하냐?」

자이안이 혼신의 연기를 펼치기 조금 전, 작전 회의 도중 프레이가 다소 맥락 없는 질문을 꺼냈다.

“최대의 무기라면…… 펜던트?”

한때 ‘쇠약증’이라는 부작용으로 그의 목숨을 좀먹기도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각성자의 활동을 전방위로 보조해주는 펜던트가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도달하는 건 꿈에도 못 꿀 일이었으리라.

「흠, 펜던트. 그것도 맞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물이 적이었을 때다. 적이 인간이라면?」

“어…… 사람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은데요.”

「아니, 좀. 예시라고 인마. 좋아, 잘 모르는 모양이니 내가 특별히 가르쳐주마. 네가 가진 최대의 무기. 그건 바로…….」

괜히 뜸을 들이던 프레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외모다.」

“……예?”

자이안은 자기가 못 본 사이에 프레이가 머리라도 부딪친 게 아닌지 걱정됐다.

「정확히 말하면 동안, 신장, 그리고 나이다.」

16살. 자이안의 세계에서 이제 갓 성인,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 아이로 취급받는 나이다.

그의 신장 162도 평균에 비교하면 꽤 작은 편이다. 극단적인 비교이지만 아버지인 알레프 변경백은 신장 190이 넘는 거구다.

얼굴도 나이에 비해 어리게 보이고, 귀족의 직계인 데다 오랫동안 별관에 갇혀 지낸 탓에 피부도 깨끗하다. 거의 한 달 동안 노숙 생활만 했는데도 티가 날 정도다.

당장 아무 마을에나 데려가서 행인을 붙잡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15살도 넘지 않았으려니 대답할 것이다.

「처음 만나는 상대가 네 말을 듣게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강자임을 보여주는 것. 이건 전에 화전민 마을에서 시도해 봤지? 촌장이 끼어들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벌써 보름 이상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자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분을 풀고 얘기를 경청하는 그 모습에 프레이는 몰래 안도했다.

「나머지 하나는 ‘무해한 약자’가 되는 거다. 예를 들어 너보다 한참 어린아이…… 흠, 아예 여자애라고 가정하자고. 그런 애가 갑자기 너한테 달려와 자기 가족이 마물이나 도적한테 습격당하고 있다고 울며불며 소리치는 거야.」

잠시 상상해 본 자이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구하러 가야죠.”

「그렇지? 만에 하나라도 이 아이가 가족이랑 작당하고 날 속여서 벗겨 먹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안 하겠지?」

“그건…….”

그런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정말로 그런 함정에 빠진다고 해도 처음부터 아이를 의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어린 여자애’의 말은 잘 의심하지 않는다. 그 애가 누가 들어도 못 믿을 거짓말을 꺼내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함정에 빠져서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선 경계부터 하겠지. 관문 병사들에게 그런 경험이 없기를 빌어야겠군.」

여기까지 듣자 자이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무해한 약자’처럼 보이는 자신의 인상을 이용해 병사들을 속이자는 것이다.

“그건 사기잖아요?”

「……뭐?」

“죄 없는 사람을 속이는 건, 그게, 조금…….”

프레이가 앞으로 내던진 돌멩이가 뒤통수로 날아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야, 불법 밀입국자.」

“불법 밀입국자?!”

「너요 인마. 너 이미 빼도 박도 못하게 범죄자야. 이제 와서 사기 좀 친다고 변하는 것도 없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이안이 충격받은 얼굴로 무너져 바닥에 엎드렸다. 프레이는 이미 밀입국을 두 번이나 저지른 놈이 이제 와서 무슨 새삼스러운 짓인가 싶었다.

「일어나. 우리 바빠.」

“……조금만 더 죄책감을 곱씹게 좀 놔두시면 안 될까요?”

「이왕 할 거면 사기까지 저지르고 난 다음에 한꺼번에 하는 건 어떠냐?」

“끄아악…!”

자이안이 가슴을 움켜쥐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한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은 삼촌의 간계에 넘어가 타락해 버렸어요…….”

「놀고 있네.」

“……근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네요.”

마음이 내킬 때까지 굴러다닌 자이안이 흙투성이가 된 채 주섬주섬 일어났다.

“엄청나게 가슴 아프고 힘들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뭐랄까…… 앗, 결국 저질러 버렸구나. 그런 느낌?”

가벼운 감상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영락없는 나이아 판박이인 줄만 알았더니, 프레이의 피도 확실히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범죄는 나쁜 짓이지만, 그렇다고 바보처럼 늑장 부리다가 붙잡힐 수는 없으니까요.”

자이안의 말은 정확했다. 그렇게 올바르게 현상을 인식하고 있으니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밀입국마저 감행하며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으면 됐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작전을 짜 보자고.」

잠시 고민하기를 몇 분,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만든 프레이가 작전을 설명했다.

「무해한 약자, 즉 ‘어린 여자아이’로 변장한 네가 피투성이가 된 채 관문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는 거야.」

“……예헤?”

터무니없는 단어를 들은 기분에 자이안이 기성을 터뜨렸다.

「전에 촌장한테 받은 옷 중에 치마 한 벌 있었지? 그거로 갈아입어라. 장검은…… 아깝지만 버려야지. 별수 있나.」

치마가 있기는 했다. 아마도 실수로 섞인 것이리라. 입을 일이 아예 없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진 옷들 중에서 가장 깨끗했다.

「걱정 마라. 넌 본판이 곱상하니까 꾸밀 것도 없이 그냥 치마만 입어도 다들 여자앤 줄 알 거야. 머리가 좀 짧긴 한데…… 농사일하는 여자가 머리 짧게 자르는 게 마냥 이상한 일도 아니고. 충분히 먹혀. 음, 가능.」

“싫은데요?!”

자이안이 빽 소리쳤다. 프레이와 만나고 지금까지 중 가장 격렬한 반대였다.

“무, 물론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마, 말도 안 돼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자이안.」

갑자기 프레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자이안은 흠칫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 비슷한 목소리를 자이안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일리움과 리투안 국경의 요새가 마물에게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이안이 폭주하려 했을 때, 그를 붙잡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나이아가 지금 널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냐? 잠깐의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서, 보다 확실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리려는 너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 것 같냐는 말이다.」

“…….”

「자이안. 나는 그저 네가 살았으면 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 내가 너무 내 고집만 밀어붙인 것 같구나. 네가 정말로 싫다면, 좀 불확실하더라도 다른 수단을…….」

“……게요.”

자이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입을 다문 프레이가 눈매를 꿈틀거리며 물었다.

「으응? 뭐라고?」

“하, 할게요.”

고개를 든 자이안의 눈동자는 굳은 결의로 가득했다. 프레이는 안쓰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싫다면 애써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다소 가능성은 낮아지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다른 작전을…….」

“괜찮아요. 할게요. 그리고…… 죄송해요. 삼촌.”

스스로의 한심함을 곱씹으며 자이안은 괴로운 얼굴로 사과했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이 여장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래?」

프레이가 마지막으로 확인 차 되물었다.

「할 거란 말이지? 나중에 가서 싫다고 하는 거 아니지? 여기서 끄덕이면 이제 못 무른다?」

“할 수 있어요. 하게 해주세요. 적어도 관문을 넘을 때까지는 무조건 삼촌 말씀에 따를게요.”

헛바람을 삼킨 프레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말을 안 듣는 표정을 간신히 제어하며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네! 그럼 뭐부터 할까요? 아, 옷부터 갈아입어야죠?”

짐을 풀고 치마를 꺼낸 자이안이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망설임 없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필사적으로 참던 프레이가 결국 만면 가득 웃었다.

‘나이아의 자식이, 그 고집불통 녀석의 아들이…… 우, 웃으면 안 돼. 소리 내면 안 돼! 참아라, 프레이 알코스!’

허리를 숙이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프레이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허벅지를 꼬집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지는 웃음소리를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삼촌도 저렇게나 괴로워하고 계셔.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자이안의 오해도 깊어져만 갔다.

‘으하하하! 보고 있냐 나이아! 넌 내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 고집불통이었지만 네 아들은 내 말이면 뭐든 순종하고 있다고! 아! 내가 그 꼴통의 핏줄을 지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이안은 상상도 못 할 무시무시한 악의 속에서 마지막 불법 밀입국을 위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 * *

사심이 다소 담기기는 했으나 장난 좀 치자고 일을 그르칠 생각은 프레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그는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피가 필요하니 근처에서 동물을 하나 잡아야겠군. 하는 김에 옷도 좀 찢자. 아, 상의는 놔둬라. 특히 가슴팍. 혹시라도 남자로 보이면 안 되니까.」

관문에서 충분히 떨어진 다음 토끼를 한 마리 잡아 피를 뒤집어쓰고, ‘마물에게 습격당한 불쌍한 소녀’로 분장. 그다음 간단하게 연기 지도.

「좋아, 실전이다.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좀 아니다 싶으면 내가 바로 지적할 테니.」

“……기사님들! 마, 마물이 나타났어요!”

갑자기 나타난 자이안의 다급한 외침에 관문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비틀거리며 뛰던 자이안은 관문과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힘이 풀린 듯 맥없이 엎어졌다.

병사 두 명이 경계하며 걸어와 자이안을 일으켰다.

“마물이 나타났다고? 어디서?”

“그게…… 저희 가족들이…… 저쪽에서…… 흐읍……!”

「고개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 가리고. 어깨도 가볍게 떨어주고. 좋아. 적어도 여기 두 명은 확실히 속았다.」

“이런. 공황 상태야.”

“어쩔 수 없지. 사정 청취도 해야 하니 일단 휴게실로 데려가자.”

관문에 수신호를 보낸 두 병사가 자이안을 부축해 왔던 길을 돌아갔다. 관문 안에 자리 잡은 간소한 휴게실에서 병사들이 준비한 찬물로 가볍게 몸을 씻고 담당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길 몇 분.

이미 작전은 반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지금 틈을 봐서 도망치는 것도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바로 추적대가 붙을 거예요.’

「작전대로 가자고. 최대한 병사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끈 다음 안전하게 도망친다.」

곧 사정 청취를 위한 담당관이 찾아왔다. 동시에, 관문 일각에서는 긴급하게 부대 재편이 이뤄지고 있었다.

마물 출현 신고는 설령 신빙성이 낮은 불확실한 정보라도 최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다. 그만큼 허위 신고로 판명됐을 경우 처벌도 엄중하다.

“저는 왕국…… 프린젠타티 왕국에 있는 테아진 상회에서 동생이랑 같이 수습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이번에 공화국으로 향하는 행상에 동생과 함께 허드렛일을 담당하게 됐는데…….”

자이안은 최대한 힘없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사정을 설명했다. 행상 도중 마물과 만났다, 동생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쳐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냥 듣는 것만으로는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흔히 있을 법한 얘기였다. 담당관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마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니?”

“그건…….”

「잠깐! 바로 대답하지 마. 겁에 질린 척해! 어려울 것 같으면 아까처럼 얼굴을 가리고 몸을 떨고. 일행이 마물에게 습격당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는데 곧바로 대답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흐윽!”

자이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담당관은 난감한 표정이 됐다. 태도만 봐서는 도저히 거짓말로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목소리 떨면서, 띄엄띄엄 설명하는 거다. 했던 말을 또 하는 것도 괜찮아. 착란 상태로 보일 거다.」

프레이의 연기 지도를 충실히 따르며, 자이안은 마물의 외형을 5분 넘게 질질 끌며 설명했다. 녹색 피부, 화살촉처럼 길고 뾰족한 귀, 멧돼지를 연상케 하는 얼굴을 가진 이족보행형 마물.

설명을 들은 담당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마물 ‘오크’의 특징과 거의 일치했다.

오크는 개체에 따른 힘의 편차가 유독 큰 마물이다. 약한 오크는 50명 규모의 일개 병단 선에서 토벌할 수 있지만, 강한 개체는 방어 태세를 갖춘 요새를 단독으로 궤멸시킬 정도다.

“얘기해 줘서 고맙다. 상관에게 보고해야 하니 잠시만 더 기다려주렴.”

“도, 동생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제, 제발 구해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담당관을 자이안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자이안이 생각해낸 혼신의 애드리브였다. 담당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정말로 오크가 나타났다면 소규모 행상 따위는 순식간에 전멸했으리라.

눈앞의 소녀가 살아남았다는 게 기적이었다.

“……걱정 말렴. 반드시 구해주마.”

그러나 담당관에게는 가족의 희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소녀에게 진실을 알려줄 용기가 없었다. 상냥한 말에 자이안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완전히 속아 넘어갔군. 좀 어설프지만, 이 정도면 됐다. 그럼 이제 슬슬…….」

콰앙! 별안간 먼 곳에서 요란한 굉음이 터졌다. 마물 목격 신고로 긴장감이 가득하던 관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부풀었다.

“무슨 일이냐!”

“관문 바깥에서 폭발음 발생! 원인 불명입니다!”

“마물의 짓인가……!”

갑작스러운 굉음은 진위 불명의 마물 신고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지휘관이 부대 재편을 서두르고,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문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완벽해!」

프레이가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폭발음은 프레이가, 정확히는 프레이의 지시대로 움직인 자이안의 작품이었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위력은 약하고 소리만 요란한 폭발성 마법을 시간 지연식으로 설치한 것이다.

자이안의 세계에서 설치형 마법은 고도의 마법이란 인식이 있었지만, 프레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니 맥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여기서 이제 한 발 더 땡기면…….」

콰아앙―!

“소, 소리가 더 가까워졌어!”

“마물이 다가온다! 어서 부대 재편을 서둘러라! 정찰대는 재편이 끝나는 대로 색적을 시작해!”

「그렇지! 바로 이거야!」

프레이가 손가락을 튕기며 즐거워했다. 자이안은 이 사람을 믿고 따르기로 한 게 잘한 짓인지 새삼스레 불안해졌다.

「자이안. 슬슬 나가자. 지금이 기회다.」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조용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건물 그림자 등에 몸을 숨기며 관문을 가로지르기를 몇 분.

도중에 몇 번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용히 관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물의 위치는 아직이냐!”

“색적 범위 내에서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뭣들 하고 있어! 더 넓게 산개해서 샅샅이 찾아!”

멀리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관문을 돌아보며 자이안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넌 잘했다.」

“그…… 그럴까요?”

「어차피 국경은 넘어야 하고,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되니 밀입국밖에 방법이 없었잖냐. 누구 하나 죽기를 했냐, 다치기를 했냐? 이만큼 평화적이고 온건한 밀입국이 또 어디 있겠어?」

“하지만 병사들은 저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병사들은 저게 일이야. 유사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상황 터지면 훈련한 대로 움직이고. 진짜로 마물이 나타나서 병사들이 애꿎은 희생양이 된 거면 모를까, 그냥 평소 하던 훈련 한 번 더 한 것뿐이잖냐.」

허탕을 친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은 격노할 테고, 허위 신고는 물론 혼란을 틈타 밀입국까지 감행한 신원불명의 소녀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지겠지만 프레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거기까지 예상하고 자이안을 여장시킨 것이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넌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거듭된 프레이의 설득에 자이안의 표정도 점차 진정되었다. 옆에서 보면 세뇌나 다름없는 광경이었으나 자이안에게는 자각이 없었다. 프레이는 알면서 더욱 부추겼다.

“그,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럼, 그럼.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다.」

자이안은 오늘 자기합리화라는 훌륭한 처세술을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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