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숲속의 작은 마을 (1) (8/210)


8화 숲속의 작은 마을 (1)
2022.10.11.


다행스럽게도 프레이가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이런 일이…….”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보며 자이안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00명가량의 병사가 상주하며 유사시에는 그 배에 달하는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강고한 요새는 볼품없이 무너져 있었다.

자이안도, 그리고 그보다 더 넓은 범위를 탐지할 수 있는 프레이도 근방에 살아있는 생물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 늦었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무너진 요새 터로 뛰어들려 했다. 그러나 프레이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다. 마물의 짓이 맞아. 그것도 제법…… 적어도 지금 너로선 감당 못 할 강한 놈이다.」

요새 주변을 감지하며 알아낸 사실들을 프레이는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생존자는 전무. 반면, 곳곳에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있음에도 시신이나 핏자국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차라리 잘됐군. 이걸로 뒤를 잡힐 걱정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겠어.」

“……잘됐다고요?”

움찔, 어깨를 떤 자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뿐, 결국 자이안은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했다.

그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추격자를 따돌리고 미오네 부인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상황이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었다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겠군. 어떻게 그런 냉혹한 소릴 할 수가 있냐고.’

나이아의 행동을 상상해보고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이안의 행동은 그가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거칠게 반발하지도 않았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요새의 잔해를 헤치며 중앙 부근까지 나아간 그는 엉망이 된 주위를 한 차례 천천히 훑어보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자리에 두 무릎을 꿇었다.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삼키며 자이안은 나직이 말했다.

“제가 조금만 더 빠르게 행동했더라면, 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당신들의 미래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은 결코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기도이며, 애도였고, 동시에 참회였다.

“저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요새를 지키기 위해, 마물과의 싸움 끝에 죽어간 당신들을 저만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설령 세상 모두가 당신들의 죽음을 잊더라도 저는 당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새기는 맹세였다.

「…….」

오랜 시간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자이안의 모습을, 프레이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냉정히 보면 그 행동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이는 도저히 자이안을 불러 세울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방해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죄악으로 느껴졌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한참 뒤, 몸을 일으킨 자이안에게 간신히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자이안은 처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자이안이 걷기 시작했다. 요새를 지나 일리움을 벗어나는 방향이었다. 느리고, 망설임이 가득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걸음이었다.

통신기를 통해 뇌리에 직접 전해지는 자이안의 모습을 기억에 담으며, 프레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방향은 다를지언정, 저 아이도 나이아와 같은 영웅의 피를 타고났구나.’
 

* * *

국경을 넘은 뒤에도 이동 속도는 느렸다.

일리움을 벗어났다고 해이해진 것이 아니다. 말이 좋아 타국이지, 결국 사람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깊은 숲속이긴 마찬가지다.

이동 속도가 느린 것은 크게 두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숲속을 걷는 게 개활지를 걷는 것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게 첫째. 그리고 마물의 존재가 두 번째였다.

“각성자라는 게 대단하긴 하네요.”

국경 요새를 뒤로하고 숲을 가로지른 지난 3일간 자이안은 고블린 세 무리와 조우했다. 단순히 계산해도 하루 한 번꼴이다.

이미 숲 전체가 고블린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주치는 빈도가 높았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모두 토벌할 수 있었다. MP 흡수에 의한 강화는 처음만큼 폭발적이지는 않았으나 격한 전투 도중에도 신체 능력이 강해졌음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 번째 무리를 토벌한 뒤에는 자이안 스스로 고블린이 더 이상 위협적인 적이 아님을 확신했다.

펜던트의 효율은 여전히 프레이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채였다.

프레이가 펜던트를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니만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자이안이 8년 넘게 펜던트를 가진 채 계속해서 MP를 흡수당하면서 일종의 동화작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목에 칼 들어오면 훅 가는 건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방심하지 마라.」

“하하. 알고 있습니다.”

일견 순조로운 여행이었으나 프레이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마물 때문이 아니다. 프레이가 우려하는 것은 자이안의 정신 상태였다.

“으으… 으윽…….”

자이안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암살자들의 습격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큰 상처가 된 것이리라.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까지 요새를 도우려 했던 것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게 나을지도…… 아니, 아니지. 그러다 자이안 몸에 큰일이라도 나면? 세상에 100%는 없다.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는 게 맞아.’

여정 중, 펜던트의 힘은 자이안에게 새로운 능력을 깨워주기도 했다. 고블린과의 세 번째 전투 뒤, 자이안은 마물의 기척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는 마물의 힘의 근원이기도 한 MP를 후각을 통해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마물의 냄새가 납니다.”

오감으로 마물을 감지하는 각성자를 프레이는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이안은 경우가 달랐다. 자이안은 일반적으로 각성자 한 명당 1개씩만 가지게 되는 ‘능력’을 각성한 것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축구선수가 체계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 농구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하다. 노력하는 과정이 펜던트에 의해 생략되었을 뿐.

‘나이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건가? 어쩌면 녀석과 이쪽 세계의 원주민인 알레프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군. 여기 사람들은 마물을 토벌해도 지구인처럼 능력을 각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니까.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제대로 검증해 보고 싶은데.’

후각을 통해 마물을 감지할 수 있게 된 뒤로 자이안은 더욱 자주 습격을 받았다. 마치 마물들이 자이안 하나를 상대로 시간을 끌기 위해 전력을 축차 투입하는 것 같았다.

프레이 덕분에 야습을 당할 걱정은 없었으나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숲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남은 거냐?」

“식물의 생태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지금 같은 속도로 2~3일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오차가 좀 있을 수는 있지만요.”

다행히 길었던 숲속 탐험도 끝이 가까웠다. 큰 문제가 터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게 마물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이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둘의 눈앞에, ‘큰 문제’가 나타났다.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나 봅니다.”

「……돌겠네 진짜.」

수풀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오솔길을 발견한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 * *

그 마을에는 이름이 없었다.

비슷하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 네이트에게도 성 따위는 없었다.

마을의 모두가 똑같았다. 그래서 네이트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네이트의 세계는 아주 작고 한정적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바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반복해서 알려 주었다. 마을과, 마을 주변의 숲이 네이트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 너머는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는 마물들과,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음식을 빼앗아가는 도적들과, 사람을 산 채로 잡아 헐값에 팔아넘기는 노예상들 뿐이었다.

네이트는 그게 진실인 줄 알았다.

정확히, 그 날 점심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바스락. 무언가가 수풀을 밟는 소리에,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텅 빈 함정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네이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마을 모두를 통틀어도 특별히 귀가 좋았다.

그런 그녀가 듣기에 방금 소리는 산짐승이 낼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두 발로 걷는 생물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네이트가 곤혹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마을 사람들이 낸 소리는 아니다.

여긴 ‘바깥’에 가장 가까운 영역이었고, 소리는 바로 그 바깥쪽에서 들려왔으니까. 그렇다면 도적, 그도 아니면 노예상, 최악의 경우 마물이리라.

‘도, 도망쳐야 돼!’

머릿속이 경종을 울렸으나 두 다리는 그 마음을 배신하기라도 하듯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삽시간에 어린 소녀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아, 역시.”

네이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역시 아직 습격당하지는 않은 것…….”

“후에에에에에엥―!”

참지 못한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저어 잡아먹지 마세요오오― 저어 작고 빼빼 말라서 맛없어요오― 훌쩍, 팔아도 돈도 안 되고 비싼 것도 안 가지고 있고오― 흐끅, 히에에에엥―!”

“…….”

막 수풀을 파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소년, 자이안이 얼빠진 표정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엄마아― 아빠아아―! 후에에에에엥―!”

“앗, 얘야 잠깐만!”

서럽게 울던 소녀가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자이안이 급히 아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뒤도 안 돌아보고 수풀 사이로 사라진 뒤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자이안의 표정이 다음 순간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마물의 냄새가…… 아이가 위험해요!”

「이런 젠장.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뛰어!」

프레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자이안은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뒷모습을 따라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날린 자이안이 낚아채듯 아이의 몸을 끌어안은 순간 수풀을 파헤치며 나타난 고블린이 투박한 돌도끼를 휘둘렀다.

“큭……!”

공중에서 몸을 비튼 자이안이 한 손으로 다급하게 검을 꺼내 휘둘렀다.

힘이 실리지 않은 칼자루가 손아귀를 벗어난 대신, 돌도끼 역시 자이안의 얼굴 바로 몇 센티미터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재차 몸을 틀어 두 다리로 안전하게 착지하며 자이안은 재빠르게 사방을 살폈다.

고블린 한 마리. 눈에 보이는 것도, 후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게 다였다.

‘지금 내 역량으로 아이를 지키면서 고블린 무리를 상대하지는 못해. 소란이 퍼지기 전에 빠르게 죽이고 자리를 벗어난다.’

고블린은 무기를 잃은 자이안을 다 잡은 사냥감이라고 본 듯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 자이안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품에 안은 아이의 체온을 실감하고, 다음 순간 자이안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케히?!

놀란 고블린이 눈을 부릅뜨며 돌도끼를 들어 올리려 한 순간, 자이안의 무릎 차기가 인중에 꽂혔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안면이 뭉개진 고블린이 뒤로 나뒹굴었다.

자이안은 지체 없이 발로 목을 밟아 뼈를 부수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듯 하며 팔꿈치로 놈의 가슴께를 내리찍었다.

체중과 가속도가 실린 공격에 상반신이 함몰된 고블린이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어이가 없네. 너 검사 아니었냐?」

말 한마디 끼어들 틈도 없이 끝나버린 전투에 얼이 빠져 있던 프레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네? 그야 뭐…… 그렇죠. 가장 손에 익은 무기가 검이니까.”

무기를 놓쳤을 땐 보고 있던 프레이도 가슴이 철렁했다. 검을 놓친 검사라는 건 MP가 바닥난 마법사와 다를 게 없는 존재니까. 그런 만큼 그 뒤의 모습이 더욱 뜻밖이었다.

무엇보다도 공격 하나하나에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최적의 수를 펼칠 정도로 숙달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검술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체술을 수련하며 체득한 경지이리라.

‘백작가가 정말 큰 보석을 놓쳤군. 그치들 딴에는 쇠약증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었겠지만…….’

프레이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알레프 가문 사람들이 불쌍해졌다.

“검사라고 검만 다뤄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무기는 소모품이고, 언제 어디서 망가져서 못 쓰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검이 있건 없건 적어도 한 사람 몫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옛날에 스승님이…….”

“후에…… 히에에에엥…….”

“아, 맞다.”

그제야 자이안은 아직 품에 아이를 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이안은 아이를 내려주려 했지만, 반대로 아이는 자이안의 옷을 붙잡고 더 세게 달라붙었다.

무서웠던 것이리라. 새끼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몸, 울음을 억누르는 듯 불안정한 호흡, 그리고 미지근한 축축함.

……축축함?

“제성해여, 데둉해요…… 흐구, 에구…….”

자이안은 좀 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하반신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물론 자이안의 바지도 같은 운명이었다.

“오우…….”

자이안은 한 벌뿐인 옷의 애도를 빌며 얼굴을 감쌌다.

16654703575903.png

1665470357590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