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첫 전투 (1)
(6/210)
6화 첫 전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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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 전투 (1)
2022.10.09.
「그렇구만. 그럼 일단 강해지자.」
자이안의 인생사를 모두 들은 프레이의 첫마디였다.
“……제 얘기 들으신 거 맞죠?”
「다 듣고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낸 결론이다, 이 녀석아.」
자이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프레이는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호화로운 침대에 앉아 자이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복식을 차려입은 채, 프레이는 콧잔등을 긁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네 처지는 동정한다.」
“동정을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어요.”
「어른이 말하면 끝까지 좀 들어라. 내가 이래봬도 네 삼촌이라고. 아무튼,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반대로 생각해봐. 너는 지금 간신히 ‘알레프 가’와 ‘미오네’라는 여자의…….」
“‘미오네 부인’입니다.”
「……‘미오네’라는 여자의 속박에서 벗어난 거다. 떠올려봐라. 네 일생 중에 네가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시기가 얼마나 있었냐?」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알레프 가의 후계자였던 자이안에게 ‘자유’는 무엇보다도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쇠약증이나 미오네 같은 변수들이 없었더라면 그의 반생은 알레프 가의 후계자, 남은 반생은 알레프 백작이라는 역할에 줄곧 묶인 상태였을 것이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죠?”
「…아. 이놈 이거 심각하구만.」
프레이는 이마를 짚었다.
신분제 따위는 오래전에 철폐되고 ‘게이트 재해’라는 위기를 거치며 극적인 단합을 이뤄낸 지구에서 태어난 프레이.
반대로 신분제가 당연한 세계에서 태어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귀족의 역할을 짊어진 자이안.
의식의 차이를 메우고 서로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 뭐……. 그게 나쁜 건 아니지. 내 말은, 역할과 의무에 묶인 삶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야.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해 책임만 확실히 진다면, ‘자유로운 삶’은 사람이 응당 누려야 할 인생의 한 형태다.」
“자유로운 삶…….”
「아니면 뭐냐?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미오네의 등쌀을 견디면서 후계자 자리에 빌붙을 셈이냐? 난 반대다. 이번에야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이려 들걸?」
“저도 그건 싫습니다.”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자이안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이 이렇게나 쉽게 나오다니. 며칠 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으리라.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역할에 속박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속으로 되뇌어본 뒤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가지 상황을 상상하며 비교해보았다.
외국에서 죽은 듯이 지내다가 뒤늦게나마 다시 백작가로 돌아가 가문을 위해 일하는 자신.
가문과 연을 끊은 채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바람대로 살아가는 자신.
무게 추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히 기울었다.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뱉었다.
“멋지네요.”
단,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럼 전 이제 뭘 해야 합니까?”
「강해져야지.」
프레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이안은 쳇바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꼭 그래야 해요?”
「강요하는 건 아냐. 하지만 강해져서 손해 볼 게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강한 힘이라는 건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기도 하다. 네가 강할수록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누군가에게 억압당하지 않는다.」
자이안은 소리죽여 신음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프레이의 설득이 박차를 가했다.
「반대로 생각해 봐라. 힘이 약하면 그만큼 가능성의 폭이 좁아진다. 약자는 강자에게 지탄당하고 병탄당하는 법이니까. 자유도 마찬가지다. 힘없는 자의 자유 같은 건 신기루나 다름없지.」
프레이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자이안은 머리로는 그 설득에 납득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꺼려졌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는 나이아가 죽은 뒤 그가 겪은 부정적인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오네 파벌의 멸시와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전되지 않은 쇠약증. 결정적으로, 암살자에 의해 죄 없는 병사와 시종이 죽고 자신 역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사건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냥 어디 외딴 섬 같은 데서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
멸시를 감내하며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을 이어가게 했던, 나이아로부터 이어받은 강한 의지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잔해 뒤에 남은 건 ‘자유’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16살의 어린 소년뿐.
“알겠습니다.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당신의 말은 분명 옳겠죠.”
그 대답은 절반만 진심이고 절반은 화제를 돌리기 위한 얼버무림이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던 프레이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자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표정만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강요할 수는 없지.’
자이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혹한 인생 경험이 아직 어린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피폐한 것은 프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아와 통신이 끊긴 뒤 몇 년. 간신히 통신이 이어졌나 싶더니 나이아는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은 16살이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프레이는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남은 실낱 하나가 툭 끊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마음을 정리하면서 푹 쉬고 싶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미덥지 못한 어린애지만, 그래도 그 녀석의 핏줄이다.’
한숨을 삼킨 프레이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는 위태로운 소년을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속으로 다짐했다.
‘적어도 길바닥에서 객사하진 않도록 지켜봐야지.’
* * *
「그래, 언제까지 이름도 모르는 숲속을 헤매기만 할 셈이냐?」
얼마나 숲을 걸었을까. 잠자코 지켜만 보던 프레이가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오네가 암살자를 또 보낼지도 모른다면서?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
“네?”
자이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는 건 프레이였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죽을 뻔한 녀석이 왜 이리 태평하단 말인가?
“전 헤맨 적 없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뭐?」
“제가 습격당한 곳은 국경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전 거길 벗어나서 지금까지 남동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걸었고요. 물론 지도가 없으니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왕국 동부 국경은 완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으니 아마 국경선까지 남은 거리가 직선으로 8킬로미터 정도 될 겁니다.”
「어어…… 음…… 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선 상상도 못 할 유창한 말에, 프레이는 바보 같은 탄성을 터뜨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자이안의 말을 곱씹던 그가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확실하냐? 되는대로 말하는 게 아니고?」
“지도를 가진 게 아니니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마 오차가 수백 미터는 있겠죠.”
내용과는 달리 자이안의 말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프레이가 콧잔등을 긁었다.
「네가 걸어온 방향이 남동쪽인 건 맞냐? 숲속에서 방향 감각을 의지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
“태양의 위치와 식물의 생태, 토양을 확인하면서 왔으니 방향은 맞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 풀…… ‘멜마이 풀’이라고 하는 건데, 왕국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잡초이지만 기후에 따라 외형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작은 변화에도 눈에 띄는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에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봐야 해요. 끝이 두 갈래로 나뉘고 뿌리 쪽 너비가 손가락 한 마디가량이면 왕국 동남부 국경 부근입니다.”
유창한 설명에 프레이는 신음을 뱉을 뻔했다. 자이안이 바닥에서 뽑은 잡초는 그가 말한 것과 거의 똑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자이안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프레이는 그게 맞는 설명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헤매기만 한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까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 같군. 아니지. 이게 자이안의 본모습인가?’
그렇다면 프레이는 지금까지 자이안을 다소 오판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동시에, 프레이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자이안.」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뭐? 아니, 그건…… 그런 건 됐고. 아까 내가 말한 강해지라는 말. 잊지 마라.」
“예? 하아…….”
맥락 없는 말에 자이안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냈다. 조바심을 억누르며 프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 힘을 가지면 누군가는 분에 넘친 힘에 지배당하지만, 누군가는 그 힘을 온전히 자기 의지 하에 둔다. 이게 본성이라면…… 자이안, 너는 힘을 가져야 해. 너 자신은 물론, 네 주위를 위해서도.’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프레이의 생각일 뿐, 자이안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멸망이 코앞까지 닥쳤던 지구와 다르게 자이안의 세계는 평화로우니까.
「그런 지식들은 누가 가르쳐준 거냐? 그런 것도 귀족이 갖춰야 할 소양이냐?」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
숨을 삼키며 굳은 프레이가 잠시 뒤 어깨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하하. 그 녀석답구만.」
기억을 잃어도 나이아는 나이아였다.
* * *
먹을 수 있는 나무 열매를 찾아 배를 채우고, 흙바닥을 파 잠자리를 만들어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자이안은 야생동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덮은 나뭇잎과 마른 흙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 무언가가 접근한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그는 전날 먹다 남긴 나무 열매로 가볍게 배를 채웠다.
「일어났냐? 밤에는 별일 없었다.」
“감사합니다. 당신…… 으음, 사, 삼촌도 피곤하셨을 텐데.”
어색하게 호칭을 고친 자이안이 감사를 표했다.
지난밤, 홀로 야영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자이아 대신 파수를 맡은 것이 프레이였다. 잠이 들 때까지 여러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냥 내 할 일 하면서 지켜볼 뿐인데 고마울 것까지야. 나 정도 되는 각성자면 한 달 정도 안 자도 별문제 없거든.」
프레이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긁었다.
“그래도요. 덕분에 마음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러냐.」
자이안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습격당할 걱정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새벽 내내 자이안은 악몽에 시달리며 울고, 죽어간 시종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사과했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혼자서 애쓸 필요 없다. 난 네 삼촌이고, 네 아군이다. 힘들고, 불평하고 싶을 땐 나를 의지해라.」
“삼촌은 이미 저를 여러 번 도와주셨어요. 그런데 또 기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걱정을 하면 좀 솔직하게…… 어휴. 됐다. 네 마음대로 해.」
“하하. 그러겠습니다.”
잠자리를 정리한 자이안이 태양의 위치와 나뭇잎에 맺힌 이슬 등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오전 6시가량. 어제 반나절 약 4킬로미터를 걸었으니, 방향만 틀리지 않는다면 내일 중에는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하네요.”
거기까지 판단한 자이안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야생동물을 한 마리도 못 봤습니다.”
사나운 육식동물과 마주치지 않은 건 행운이었지만 소형 초식동물이나 새들마저 전혀 발견하지 못한 건 명백히 이상했다.
「…좀 무리해서라도 서두르는 게 좋겠군.」
“짚이는 게 있으세요?”
「마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
워낙 뜬금없는 단어였던지라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프레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자이안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속도를 높였다.
자이안도 마물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책으로 접한 ‘지식’에 불과하다. 반면 프레이의 말에는 ‘경험’에서 비롯된 무게가 있었다.
「슬슬 뭐라도 좀 먹는 게 어떠냐?」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속도를 늦췄다. 어느새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뒤, 자이안은 근처의 나무열매를 몇 개 땄다. 열매의 형태를 살핀 자이안이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독이 없네요.”
「그것도 나이아가 가르쳐준 거냐?」
“그렇죠.”
서로 한 차례 피식 웃고, 자이안은 두꺼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열매를 깨물었다.
시큼한 맛을 내는 열매는 빈말로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자이안은 묵묵하게 배를 채웠다.
그리고 열매 하나를 모두 먹고 두 개째를 입에 대려는 순간.
-……! ……!
멀리서 들려온 희미한 소리에 자이안의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자이안, 당장 일어나라!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프레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영문을 모른 채 자이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정체불명의 소리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눈치 챘나! 자이안, 지금 도망치면 당한다! 검을 들어! 습격에 대비해라! 침착하게 대처하면 너도 이길 수 있는 놈들이다!」
“가, 갑자기 뭡니까! 설마 정말로 마물이?”
「멍청한 놈! 큰 소리 내지 마!」
-갸아악!
-갸르르륵! 키엑!
얼핏 들으면 야생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 울음소리에 피부가 저릴 정도로 악의적인 감정이 배어 있다는 점이었다.
자이안은 허리춤에 천으로 묶어 고정시킨 장검을 붙잡았다. 위협적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자이안은 턱에 맺힌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하고 불안하게 사방을 살폈다.
「온다!」
프레이가 소리친 순간, 땅딸막한 녹색의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고 튕기듯 날아왔다.
자이안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휘두른 칼날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치고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자이안을 습격한 존재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날렵한 움직임으로 정면에 착지했다.
이족 보행형의 신체. 130cm가량의 왜소한 키.
몸집에 걸맞지 않게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 찬 육체, 혐오감을 유발하는 녹회색 피부,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매부리코와 살기로 번들거리는 두 눈알.
자이안은 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마물!’
마물, 고블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