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 (1)
(4/210)
4화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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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 (1)
2022.10.07.
2021년 12월 2일. 지구에 게이트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게이트는 약 3분 유지되었다가 소멸했다.
그 3분간, 게이트에서는 이상적성생명체, 통칭 몬스터가 등장했다.
「그때 나타난 건 오크 한 마리였지.」
인류는 이러한 재앙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고, 오크 하나를 사살하기까지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생물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며 날뛰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당연히 온 세계가 뒤집어졌다. 그게 시작조차 못 된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몬스터 사살에 기여한 경관 6명이 정신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사건의 후유증이라고 판단한 당국은 이들에게 긴 휴가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병 따위가 아니었다.
며칠 뒤, 6명의 경관들은 괴로운 증상이 깨끗이 나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들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맨손으로 철판을 찢는 괴력, 총탄마저 튕겨내는 방호력, 자유자재로 불꽃을 만들어내고 손발처럼 다루는 능력.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능력을 ‘각성’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각성자’가 태어난 거다.」
인류는 당혹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 같았던 이런 사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지. 타이밍 한 번 참 좋단 말이야. 그날 저녁,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의 게이트가 갑자기 나타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어찌어찌 살아남아 운 좋게 몬스터를 죽인 사람들이 능력을 각성했지. 덕분에 각성자가 되는 조건도 알게 됐지. 몬스터를 죽이는 거 말이다. 뭐 아무튼…… 까마득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이겨내기는 했다.」
흔해빠진 지구멸망 예언이 현실이 된 것 같은 지옥을 극복하고, 생존자들은 깨달았다. 게이트. 몬스터. 그리고 각성자.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그 뒤로도 게이트는 여기저기서 심심하면 열렸다. 몬스터도 툭툭 튀어나왔고. 지구에는 총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대충 설명하면 엄청 쓰기 쉽고 강력한 석궁 같은 거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제대로 한 방만 맞추면 그대로 주님 곁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훌륭한 대화 수단이지. 근데 이 망할 새끼들한테는 총이 잘 안 통하더라고. 각성자의 능력이 아니면 고작 고블린 한 마리 잡는데 기관총 탄창 하나를 통째로 쏟아부어야 했을 정도다. 당연히 각성자의 존재가 엄청 중요하게 대두됐지. 몬스터로부터 인류를 지킬 유일한 희망이니 뭐니 하면서.」
모든 나라에서 각성자를 그들이 짊어진 책임에 걸맞게 대우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불행한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각성자가 제힘에 휘둘려 폭주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핍박받으며 소년병으로 종군하던 어린 각성자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나랑 나이아가 태어난 건 그런 어수선한 시대였다.」
둘의 유년기는 행복하지 않았다. 쌍둥이 남매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 영국의 어느 외딴 마을의 고아원 앞에 버려졌다.
흑발흑안, 동양인으로 보이는 외모였으나 신분을 확인할 물건이 하나도 없었기에 둘에게는 영국식 이름이 붙었다.
이질적인 외모 탓에 둘은 고아원 내의 또래들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사방이 악의를 가진 적이었고, 믿을 것이라곤 둘뿐인 생활이었다.
「아주 예술적으로 엿 같은 고아원이었다. 밥이랍시고 나오는 건 지나가던 들개도 코웃음 칠 쓰레기죽이었고, 원장이란 새끼는 기부금 살살 빼돌려서 자기 배에 기름 채우는 게 유일한 특기인 인간 말종이었지. 그 고블린만도 못한 돼지 새끼가, 우리가 7살이 되던 해에 일을 하라 그러더라고. 나는, 하…… 마음 같아선 그놈 배때기를 칼로 쑤시고 튀고 싶었는데, 어쩌겠냐. 그땐 나도 애새끼였고 나이아도 붙어 있었는데. 까라는 대로 까야지.」
식사, 휴식, 수면. 그 무엇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가혹한 생활이 3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10살의 겨울, 몬스터가 나타났다.
「오크였다. 어디서 게이트가 열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마리가 고아원을 습격했지. 나는 존나 환영했다. 그놈이 제발 그 원장 새끼 머리털 하나까지 꼭꼭 씹어 먹고 고아원도 아주 흔적도 없이 박살 내주길 간절히 기도했지.」
한발 늦게 출동한 각성자들이 상황을 확인했다. 고아원은 무너진 채 불타고 있었고, 생존자는 극한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오크를 죽인 알코스 남매뿐이었다.
둘은 유례없이 강력한 능력을 각성하고 최연소 각성자로 등록되었다. 둘의 자질을 눈여겨본 지역 유지가 후원자로 나섰으며, 안정적인 의식주는 물론 의무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각성자들에 대한 제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는 이에 대한 교육도 함께 받았다.
두 남매가 17살이 되던 해, 2차 게이트 대재해라 명명된 사건이 일어났다. 둘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미성년자를 꼭 전장에 보내야만 하겠냐는 도의적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두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혔다.
「아니, 난 솔직히 별로 생각 없었거든? 근데 나이아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냐며, 나한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있긴 하냐며 내내 타박하는 거야. 과장이 아니라 그대로 두면 내가 못 견디고 미쳐버리겠다 싶었다. 별수 있겠냐? 미친놈이 되는 것보다야 나가서 몬스터나 좀 잡고 겸사겸사 사람들도 좀 살려주고 하는 게 낫지.」
남매의 활약은 극적이었다. 실제 피해 규모가 당초 예상의 1/10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홀로 사상자 1만 명 안팎으로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던 영국. 둘은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다.
그치지 않는 게이트 재해, 하강 곡선을 그리는 인구수, 천문학적 규모의 물적 손실, 2차 대재해로 인한 추가 피해.
게이트가 나타나고 수십 년에 걸쳐 인류는 조금씩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종말론자들은 비난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부르짖는 종말을 씁쓸한 얼굴로 못 들은 척 지나쳤다. 남매의 이름과 활약상이 알려진 것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별의별 뉴스며 인터뷰며 뭐며…… 제발 나와서 얼굴 한 번만 비춰 달라고, 말 한마디만 해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줄을 섰다. 뭐…… 나도 이해는 해. 희망을 갖고 싶었겠지. 별똥별처럼 영웅이 어디서 뚝 떨어져서 세상을 구해주길 바랐을 거다.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배가 북극성의 빛을 이정표로 삼고 헤매지 않는 것처럼, 방향을 보여줄 뭔가가 필요했던 거지.」
나이아는 그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프레이는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들을 하나뿐인 가족에게만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게이트와 각성자, 몬스터가 나타난 지구에 영웅이 탄생하게 된 경위다.
* * *
「……1차 대재해에서 550개의 게이트가 열리고, 1억 명 정도가 죽었지.」
프레이는 마치 어느 날 다락방에서 찾은 낡은 흑백사진을 살펴보는 듯한 눈으로 설명을 이었다.
「2차가 1차로부터…… 25년? 아마 그 정도 뒤에 일어났나. 그때는 3백만 명 정도가 죽었다. 숫자가 확 줄었지? 그만큼 전체 인구수도 크게 줄어들었거든. 애초에 살아있는 사람이 적으니 사망자도 적을 수밖에. 그 뒤로 3차, 4차 대재해가 또 일어났고…….」
그리고 4차 대재해를 극복한 직후 새로운 연구 결과가 공개됐다.
대재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질 것이다. 더 강한 몬스터들이 출몰할 것이고,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하면 한 번 나타난 게이트는 다시 닫히는 일 없이 유지될 것이다.
몬스터는 게이트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인류 멸망은 확정적이다.
「나하고 나이아. 그리고 아틀라스, 데우스 마키나, 세인트. 이렇게 다섯 명이 대중이 꼽는 가장 강력한 각성자 5명이었다. 개인적으로 친하기도 했고. 인류 멸망이 코앞이라는 소리를 들은 나이아는 주저 없이 우릴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대뜸 이러더라고.」
“지금처럼 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돼. 원인을 찾아서 없애버려야 돼.”
“맞는 말이긴 한데…… 애초에 원인이 뭔데?”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지구에 없는 건 확실하니까, 아마 게이트 너머에 있겠지?”
“게이트를 넘자는 말씀이세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감히 시도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발상이었다. 게이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명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몬스터들로 가득한, 결코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지옥 같은 세계라는 것뿐이었다.
“그걸 왜 우리가 해야 되냐?”
“우리밖에 못 하는 일이니까.”
“난 싫다.”
“오빠! 오빠는 왜 항상 싫다는 말부터 시작해?”
“진짜 싫으니까.”
두 남매의 논쟁을 남은 세 명은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나이아는 뜻을 굽히지 않을 거고, 프레이는 입으로는 싫다면서 결국 나이아의 뜻을 존중한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가 진 게 아니라 져준 거다. 그 녀석은 한 번 이거다 하고 정하면 옆에서 무슨 지랄을 해도 고쳐먹지를 않거든. 사람이 고집불통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의견을 모은 뒤 각성자들은 이를 전 세계에 알렸다. 게이트를 완전히 닫아 없애기 위한 국제기구가 결성되고, 각국의 저명한 연구진과 대기업 등이 힘을 보탰다.
게이트를 직접 통과하는 인원은 단 한 명으로 정해졌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실패하고 게이트 사태가 계속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많은 인원을 보낼 수 없었다.
동시에,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가장 강한 각성자가 넘어가야 했다. 나이아가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
「얘가 드디어 돌아버렸나 싶었다. 물론 반대했지. 그런 논리면 당연히 오빠인 내가 가야 하는 거 아니겠냐? 근데 이 자식이 그때 뭐라 그랬냐면…….」
“오빠 나보다 약하잖아.”
“아?! 이, 망할, 제기랄!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세계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가 누구냐고 물을 때, 누구나가 주저 없이 꼽는 2인이 바로 알코스 남매였다.
4차 대재해 당시 처음으로 나타난 초대형 몬스터, 108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를 쓰러뜨린 장본인이 바로 둘이었으니까.
그러나 둘 중 누가 더 강하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나이아는 손수 제 오빠를 때려눕히면서, 그것도 절묘하게 죽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하면서 누가 최강인지 증명했다.
기절했다가 며칠 만에 깨어난 프레이는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췄다.
프레이가 빠진 뒤에도 게이트 완전 소멸을 위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맨몸의 인간이 게이트를 안전하게 통과하고, 차원 장벽을 넘어 서로 연락하고, 소유자의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등 놀라운 기능을 가진 물건이 펜던트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모든 준비가 끝나기까지 약 3년. 그 사이 대재해가 2번 더 일어났고 인류의 숫자는 마침내 20억을 밑돌았다.
“갔다 올게요. 나 없는 동안 지구를 부탁해요. 모처럼 돌아왔는데 지구가 망해 있으면 큰일이니까.”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가벼운 말투로 나이아가 게이트에 발을 디딘 순간, 프레이가 나타났다.
전신이 끔찍한 흉터로 뒤덮인 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듯 초췌한 몰골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눈빛으로.
“나이아! 이거 봐라! 이젠 너보다 내가 훨씬 더 강하다고! 그러니까 내가 가겠다! 당장 거기서 나와! 더 이상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단 몇 분만 더 일찍 그가 왔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발을 들인 게이트에서 탈출하는 건 나이아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이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