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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생존 (3/210)


3화 생존
2022.10.06.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

“마법이다! 놈이 마법을……!”

자이안의 뺨에 열기가 닿았다.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치솟은 빛의 기둥 속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뱀이 뛰쳐나와 춤추듯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한 암살자들이 망연한 시선을 향한 순간,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가 암살자 한 명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녹였다.

“이런 개 같은 X끼들…!”

기둥 속에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아니,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자이안의 머릿속에 보였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로 압축된 빛의 구슬을 오른손에 든 채, 불꽃의 뱀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는 암살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감히 그 녀석의 핏줄을 죽이려 들어?”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암살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새로운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입매를 뒤틀며 비웃었다.

“바퀴벌레처럼 흩어지면 내가 놓칠 줄 알고?”

남자가 빛의 구슬을 허공에 내던졌다. 공중에 멈춰 선 구슬이 열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뱀이 내뿜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열기였다.

남자의 뒤에서 흐릿한 시야로 상황을 지켜보던 자이안조차 목구멍을 파고드는 열기에 숨이 막혔다.

“[뼛가루까지 불태우고, 영혼까지 먹어 치워라.].”

손가락을 튕기며 남자가 말했다. 자이안은 남자의 그 말이 강대한 힘이 깃든 마법적 언령임을 알아차렸다.

청백색 불기둥이 솟구쳤다.

총 12개. 살아남은 암살자의 수에 맞춰 치솟은 불기둥이 숲은 일절 태우지 않은 채 정확하게 암살자들만을 불태웠다.

자이안의 눈에 그것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고도의 마법으로 보였다.

“몸은 좀 괜찮으냐? 아니,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아직 살아 있지? 죽진 않은 거지?”

암살자들의 최후를 지켜보던 남자가 급히 자이안에게 다가왔다. 암살자들을 찢어 죽일 듯 굴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자이안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 커흑……. 습니다.”

“말하지 마. 덧난다. 그냥 가만히 있어. 눈만 깜빡거려. 일단 이것부터 먹어라.”

지리멸렬하게 말한 남자가 허리춤에 매인 수상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마개를 뽑아 주저 없이 자이안에게 내밀었다.

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자이안은 얌전히 병 속의 내용물을 마셨다.

“이거랑 이것도. 아 그래, 이것도.”

연거푸 유리병 세 개의 내용물을 다 먹인 뒤에야 남자는 한시름 놨다는 듯 이마를 훔쳤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자이안은 어느새 몸이 제법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둔통이 느껴지던 복부도 많이 편해져 있었다. 아마도 남자가 먹인 약의 효과이리라.

자이안은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아니 좀! 일어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남자가 버럭 소리치며 자이안을 다시 눕혔다. 자이안은 미안함에 표정을 흐렸다.

“하지만…… 도와주신 분 앞에서 누워만 있을 수는…….”

“미련한 놈아, 너 다 안 나았어. 응급조치만 한 거라고. 됐으니까 입 다물고 그냥 가만히 있어라.”

넝마가 된 옷을 뒤집고 복부의 상처를 살핀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예상보다 상처가 심했다.

지금 가진 약들만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어중간하게 놔뒀다간 감염증으로 상처 부위가 괴사할 우려가 있었다.

“백마법은 젬병인데…… 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방치하는 것보단 낫겠지.”

초조하게 중얼거린 남자가 자이안의 복부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낮고 빠르게 이질적인 언어를 읊기 시작했다.

남자의 겹쳐진 두 손에서 따스한 빛이 흘러나와 자이안의 복부를 감쌌다.

“신성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힘으로 인간을 치유하는 신성술은 극소수의 재능을 가진 이들만이 배울 수 있는 기적의 술법이다.

게다가 자이안의 상식으로는 한 인간이 마법과 신성술을 동시에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됐군.”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좀 어떠냐?”

“많이…… 편해졌…….”

대답하려던 자이안은 갑작스럽게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 앞에서 잠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의식을 다잡으려 했으나 급속도로 눈앞이 흐려졌다.

“졸리면 자라. 나도 백마법은 젬병이라, 내 MP만 가지고는 잘 안 돼서 네 MP를 좀 가져다 썼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괜히 버티면 탈 나. 잘 수 있을 때 자라.”

“죄송…… 합……. 감……사…….”

수마가 자이안의 의식을 짓눌렀다.

잠에 빠지기 직전, 자이안은 남자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허윽.”

숨을 삼키는 소리를 내며 자이안은 불현듯 눈을 떴다.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자이안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파된 채 쓰러진 마차, 사방에 널린 호위 병력과 시종들의 시체, 그리고 불탄 듯 그을린 자국이 12개.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상황을 정리했다.

‘꿈이 아니었구나.’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유배된 것도, 도적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받은 것도, 죽기 직전 머릿속에서―아마도 펜던트를 통해서―어떤 남자와 대화를 나눈 것도, 그 남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암살자들을 죽이고 자신을 치료해준 것도.

모든 것이 수 시간 전에 벌어진 현실이었다. 다만, 그를 구해준 남자의 모습만은 주위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쓰러져 있었던 거지……?”

「얼마 안 됐다. 2시간 정도?」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에 자이안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곧 그 목소리가 아까 전 남자의 것임을 깨달았다. 자이안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이안의 뇌리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아까 전해 비해 말끔해진 행색의 남자가 커다란 방 가운데에 놓인 호화로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디 계신 건가요? 왜 제 머릿속에 이상한 광경이 보이는 거죠?”

「우리 집. 지금 펜던트의 출력으로는 10분 정도 소환하는 게 한계더라.」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자이안은 그 말뜻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우선 대화는 미루기로 하고, 자이안은 그 자리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길바닥에서 갑자기 뭐 하냐?」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여기 시체 중 하나를 저인 것처럼 위장할 겁니다. 그래야 미오네 부인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미오네 부인이 누군데?」

“제…… 어머니입니다. 아, 친모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아버지께서 재혼하신 계모예요.”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너도 어지간히 험난한…… 응? 지금 누가 죽었다고?」

머릿속 남자의 말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이안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아마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급하게 도망쳐야 하는 지금 화제로 삼아야 할 얘긴 아니었다.

“……그건 조금 이따 얘기하지 않을래요? 암살자가 더 있을지도 몰라요.”

「……쯧.」

남자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작게 혀를 찼다. 명확한 대답은 없었지만 아마 긍정의 표시인 듯했다.

주위를 살핀 자이안이 가장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시종의 옷을 벗기고, 그 시신에 자기 옷을 입혔다. 시종의 옷은 다행히 피가 많이 묻지 않았다.

산짐승에게 당했다고 변명하면 통할 수준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자기 모습을 확인한 뒤, 자이안은 시종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얼굴 때문에 어차피 들킬 텐데?」

“그건…….”

자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하게 시체를 위장하려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해야 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자이안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시종은 아무 죄가 없다. 그가 죽은 이유는 순전히 자이안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저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과연 용납될 일인가?

“……죄송합니다.”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신의 머리맡에 주저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불꽃이여, 일렁여라].”

손바닥 안쪽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이안은 자기 심장을 태우는 심정으로 시종의 얼굴을 불태웠다.

도저히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안면이 불탄 것을 확인하고, 자이안은 천천히 일어서서 몇 걸음 물러난 다음, 등을 돌린 채 토하기 시작했다.

“……허억…… 오엑…….”

배 속의 내용물을 모두 토해내고도 여러 번 헛구역질을 한 자이안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더러워진 입가를 닦던 자이안은 어느 순간부터 눈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고장 난 것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제가 대체 뭘 잘못한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저분들은 또 뭘 잘못한 거고요……? 왜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겁니까?”

「내가 널 구했으니까.」

“왜?! 왜 절 구한 겁니까! 이제 와서 저 혼자 살아남으면 뭐가 달라진다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러셨어요!”

「그 말,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이 해봐라. 멍청한 자식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자이안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대며 울었다.

「우는 건 괜찮다. 불평 좀 할 수도 있지. 네가 견디기 힘든 큰일을 당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게 있는 거다. 너는 지금 너 하나 살리려고 목숨을 바친 저 많은 사람들을 모욕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튀어나가 널 구한 내 행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그 펜던트를 네게 전해줬을 나이아의 뜻까지도 짓밟았다.」

“흐윽……!”

흐느낌을 삼키며 자이안은 어깨를 떨었다. 자이안도 알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뻔뻔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키던 그 강한 의지는, 그 안에 숨은 여린 마음은 이제 한계에 달해 있었다.

소리 없는 오열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남자는 뭐라 말하지 않고 그저 불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간 시간이 더 흐른 뒤, 자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 말라붙은 지저분한 얼굴을 들었다.

「좀 괜찮아졌냐?」

“…….”

자이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아무 이정표도 없이 그저 정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어머니 얘기를 좀 할까요.”

「……괜찮아진 거냐?」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괜찮은 건지, 별로 안 괜찮은 건지.”

남자 ─ 프레이 알코스는 곤란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었다. 다소 강제로라도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까 내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이아가 죽었다고 했던가?」

“어머니는 제가 8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

“제가 왜 그런 농담을 하겠습니까.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요. 8년 전, 어머니께서 숨을 거두시던 마지막 모습이.”

「8년 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프레이는 그저 자이안의 말을 도돌이표처럼 따라 했다. 머릿속에 비치는 광경으로 그의 표정을 본 자이안은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나이아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담담해 보이는 표정 안쪽에 심장이 찢어질 듯 처절한 슬픔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믿을 수가 없구만.」

프레이가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 죽이려고 애를 써도 못 죽일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어머니의… 가족이시라고요?”

「그 녀석 쌍둥이 오빠다. 믿기 힘들겠지만.」

쉬이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백작이 과거에 나이아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대륙 전역을 수색했음에도 흔적 하나 찾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억상실이셨어요.”

「……뭐?」

뜻밖의 말을 들은 프레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자이안은 백작과 나이아가 만나고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프레이에게 얘기했다. 사정을 알게 된 프레이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 그렇게 된 거였구만. 그래, 뭔가 이상하더라. 그 녀석이 기억이 멀쩡했으면 너한테 아무 얘기도 안 했을 리가 없지. 적어도 펜던트가 뭐 하는 물건인지 정도는 귀띔해줬겠지. 그래, 그렇게 된 거였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프레이가 낮게 탄식했다.

「나이아…… 이 멍청한 녀석아.」

“괜찮으시다면…….”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께서 원래 어떤 분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프레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흘러넘치려는 감정을 아무렇게나 토해낼 때가 아니다.

프레이는 마음을 다잡고 의식적으로 표정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자이안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당연히 알려줘야지. 나이아의 아들인 네겐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면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프레이는 아련한 눈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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