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유배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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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유배
2022.10.04.
동녘이 어렴풋이 밝아오는, 아직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간.
알레프 변경백의 적자, 자이안 알레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에서 내려온 자이안은 방 한쪽에 놓인 깨끗한 물로 손과 발, 얼굴과 목을 가볍게 닦았다. 그리고는 별다른 장식 없이 실용성을 추구한 의복을 옷장에서 꺼내 갈아입었다.
보통은 시종이 붙어 대신해줘야 하는 일들이지만, 자이안의 행동은 여러 번 반복한 듯 익숙하다.
“후…….”
몸가짐을 정돈한 자이안은 한 차례 방 안을 둘러보며 얕은 숨을 뱉었다.
일리움 왕국 서부 국경을 총괄하는, 왕가에 버금가는 강대한 권력과 무력을 쥐고 있는 알레프 백작가.
그러나 자이안에게 주어진 방은 그 위명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좁고 검소한 것이었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정도로 익숙해진 생활이지만, 이렇게 가끔씩 자기 처지를 되새길 때마다 자이안은 가슴 한 편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정신 차리자. 나는 페르지오 알레프와 나이아 알레프의 하나뿐인 아들, 가문의 유일한 적통이며 변경백을 계승할 남자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린 자이안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훈련용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복도는 한산했고 돌아다니는 시종은 없었다.
별관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드문드문 지나다니던 병사와 기사, 시종이 그를 발견하고는 움찔하며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개중 일부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짓기도 했다.
자이안은 개의치 않고 기사단 연무장으로 향했다. 훈련을 시작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 자이안은 홀로 연무를 시작했다. 기사단의 점호가 시작되기까지 약 1시간가량. 자이안이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후우……!”
호흡을 정돈하고 의식을 집중한다. 눈앞에 그리는 것은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적. 자세를 취하며 한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멈춘 자이안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빛 궤적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몰아친다. 때로는 폭풍처럼 강렬하게,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먹이를 노리고 쏘아져 내리는 매처럼 날카롭게 약점을 파고들었다가, 삽시간에 분위기를 바꿔 바람에 춤추는 꽃잎처럼 공격을 유려하게 받아넘긴다.
그 하나하나가 어린 겉모습으로부터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달인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허억……! 크윽!”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이안의 움직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칼끝이 노인의 발걸음처럼 허약하게 흔들리고 수 시간 동안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진다.
급기야 무릎이 휙 꺾인 자이안의 몸이 앞으로 내동댕이치듯 쓰러졌다. 검을 휘두른 지 10분도 되지 않아 앞으로 쓰러진 그는 마치 분을 참듯 이를 악물며 몇 번이나 흙바닥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후우…… 후욱…… 후…….”
5분에 걸쳐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자이안이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땀과 흙으로 지저분해진 몸을 털어내며 깊은 탄식을 토했다. 두려울 만큼 높은 경지에 달한 검술과,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약한 체력. 지극히 모순되어있다.
어머니, 나이아 알레프로부터 이어진 정체불명의 쇠약증이 바로 그 모순의 원인이다.
단순히 체력이 약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행동은 아무 문제 없이 해낼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행동 ─ 예를 들어 귀족으로서의 필수 소양인 마법을 발휘하거나, 변경백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무술을 피로하거나 할 때만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것이다. 마치 거대하고 단단한 껍질이 그의 주위를 틀어막고, 그가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왕국의 고명한 의원과 신관도 이를 고치기는커녕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나이아는 그 정체불명의 쇠약증이 악화되어 8년 전, 자이안이 8살일 무렵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든 자이안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무리하게 검을 휘두르면, 그러다가 또 쓰러져 버리면 다음엔 기사단 훈련이 시작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리라. 가문의 적자로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미련이 남은 눈으로 칼날을 노려보던 자이안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연무장을 떠났다.
다시 별관의 자기 방에 도착하자,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시종의 모습은 없다.
식사는 빵 한 덩이, 스튜 한 그릇, 과일 두 개와 물 한 컵이 전부였다. 유복하게 사는 평민의 아침 식사가 이보다 더 풍족하리라. 자이안은 익숙해진 동작으로 음식이 놓인 쟁반을 낡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 * *
7년에 걸쳐 자이안은 가문 내에서 소외당하고 있다.
발단은 그의 어머니, 나이아 알레프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이아는 귀족의 여식이 아니다. 하다못해 평민도 아니다. 페르지오 알레프 백작이 젊은 시절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향한 숲속에서 만난, 신원불명의 여자였다.
당시 숲속 깊은 곳에서 조난된 백작은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나이아를 발견해 간호했다. 그녀는 이름 말고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여인을 홀로 위험한 숲속에 둘 수는 없었던 백작은 구출대가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10일가량 그녀와 함께 지냈다.
일리움 왕국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소한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의 이질적인 외모, 귀족가의 적통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교양을 쌓았다고 자부한 백작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려 깊은 언동, 온화하면서도 정의감 강한 성격까지.
위험한 숲속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서로뿐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백작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무사히 구출된 뒤, 작위를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작은 전격적으로 결혼을 선포했다. 당초에는 나이아의 불명확한 신분을 근거로 결혼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가문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나이아의 모습은 이런 의문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체불명의 쇠약증을 앓고 있었고, 숲속에서 백작과 만났을 무렵에는 이미 이 쇠약증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몸을 좀먹은 상태였다.
결국 자이안이 6살이 되었을 때 쓰러진 나이아는 2년간 와병 생활을 이어가며 백작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마지막으로 자이안에게 낡은 펜던트 하나를 유품으로 남긴 뒤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자이안에게 쇠약증이 발병했다. 변경백령 전역이 비탄에 빠졌고, 왕도에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증을 앓고 있는 자를 후계자로 두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변경백은 후사를 위해 새로운 부인을 받아들이라.”
왕가로부터의 권고였다. 아니, 사실상 명령이었다. 백작에게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실제로 쇠약사한 나이아의 선례가 있었으니까.
새 부인을 맞이하든 양자를 들이든, 자이안이 나이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음에 대비해야 했다.
왕가가 재혼 상대로 제3 왕녀 미오네를 소개했다. 망설이는 백작을 위한 호의처럼 보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백작은 왕가의 의도를 읽었다. 알레프 변경백은 다른 귀족들과 차원이 다른 권력을 가진다.
동시에, 국경의 돌발사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왕가의 영향력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다. 왕가는 바로 이 변경백의 힘을 손에 쥐고 싶은 것이다.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귀족의 입장에서, 호의로 포장된 왕가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큰 불충이다. 자칫 모반의 소지로 보일 여지도 있다. 백작은 왕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왕도에서 제3 왕녀 미오네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저 전염병이라도 앓고 있는 듯한 아이가 정말 각하의 피를 이어받았다고요? 믿을 수가 없군요. 이래서 천한 것들의 피가 섞이면 안 되는데.”
한 무리의 시종과 병사를 이끌고 변경백령에 찾아온 미오네가 백작부인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자이안을 별관에 격리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본래 가문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던 이들을 여러 이유를 들여 은퇴시키고, 가문을 떠난 이들이 애먼 소문을 흘리지 않도록 충분한 퇴직금을 안겨준 뒤 자신이 데려온 이들을 그대로 가문에 눌러 앉혔다.
왕가의 입김이 닿은, 미오네의 명을 최우선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순식간에 저택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오네와 백작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왕가의 혈통을 증명하는 금발과 붉은 눈을 가진 건강한 아이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자이안이 가문에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자이안이 물리적인 위협을 당한 것은 아니다. 미오네와 그녀의 손이 닿은 소위 ‘미오네 파벌’들은 그저 철저하게 그를 무시하고, 없는 사람으로 대하며 정신적으로 몰아붙였다.
‘암살자를 보내 나를 죽이려고 드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가문에서 쫓아내려는 것도 아니잖아. 아직 괜찮아. 기회가 있을 거야.’
식사를 마친 자이안은 옷 안쪽에 숨겨놓은 펜던트를 가볍게 쥐며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음이 약해지고 모든 게 서럽게 느껴질 때, 자이안은 좌절에 빠지는 대신 어머니의 유품인 펜던트를 쥐며 그녀의 가르침을 떠올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나이아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마음만은 꺾이지 말 것.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 것. 그런 가르침 하나하나가 자이안을 지탱하고 있었다.
똑똑, 하고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 계신가요?”
말투로 보아 시종의 목소리였다. 방에 있는 자이안에게 시종이 찾아온 게 대체 얼마 만일까? 자이안은 자조 섞인 웃음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읏……. 백작 각하께서 도련님을 모셔오라는 명이십니다.”
눈이 마주치자 한 번 시선을 피한 시종이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무서워하는 걸까. 잠깐 생각한 자이안이 곧 답을 알아차렸다. 자이안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시종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마워. 여기까지 오느라 눈치 보였을 텐데.”
자이안은 시종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너희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도, 도련…… 님…….”
“이런, 너무 오래 이야기하면 네가 혼날 수도 있겠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와줘서 고맙다. 유니르.”
“우…… 아으…….”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 전원, 자이안은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위에 선 자가 아랫사람에게 갖춰야 할 당연한 예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온 시종 유니르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미오네 파벌’에 속하지 않은 시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등 뒤에서 소리죽여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자이안도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아무렇게나 소리 지르고, 불합리한 상황을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자이안은 표정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오오…… 자이안, 내 아들. 몸은 좀 괜찮으냐?”
백작의 방은 어두침침한 분위기였다. 꼭 자이안이 처한 상황을 연상케 했다.
가볍게 포옹한 뒤, 자이안은 재빠르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백작이 아쉬운 표정을 했다.
“미오네 부인께 책잡힐 행동은 삼가셔야죠, 아버님.”
“그래, 그렇지. 후우…….”
애써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한숨을 토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련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자이안. 잠시…… 잠시 동안만, 가문을 떠나줘야겠다.”
“……예?”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자이안은 ‘사람이 이럴 때 반항기를 겪게 되는구나.’하고 깨달았다.
“미오네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는 것 같다.”
자이안의 표정을 본 백작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자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제대로 경칭을 붙이세요. 아버님. 아내이지만, 본디 왕녀이신 분입니다.”
“너란 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래, 알았다. 부인께서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시는 모양이다. 이제 됐느냐?”
고집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한숨을 쉰 백작이 사정을 설명했다.
미오네가 낳은 아들, 자이안의 배다른 동생인 바란드가 곧 6살 생일을 맞는다.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바란드의 생일 연회는 왕성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지만, 왕성에 초빙되는 이들 목록에 자이안의 이름은 없다.
“아마 미오네…… 부인께서 이번 기회에 왕가로부터 확실한 언질을 받으려 할 거다. 너를 후계자위에서 폐한 뒤, 새 후계자로서 바란드를 승인해달라고 전하에게 부탁할 것이고, 전하께선 어쩔 수 없다는 양 이를 받아들이겠지.”
지금까지의 생활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자이안은 이전부터 소외당하고 있었으니.
문제는 모두가 왕도에 머무는 동안 자이안 혼자 백작가에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내 과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네가 홀로 남은 틈을 노려 너를 죽이고 사고로 꾸밀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이안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을 삼켰다. 상황을 만드는 게 어렵지도 않다.
자이안은 나이아와 같은 쇠약증을 앓고 있으니까, 슬쩍 독이라도 먹이고 미오네 파벌의 시종들 몇 명이 쇠약증이 악화되어 쓰러졌다고 증언하면 끝이다.
그러나 자이안을 무엇보다도 놀라게 한 것은, 이어진 백작의 말이었다.
“만약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넘어간다고 해도…… 네가 백작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될 거다. 그 여자는 호시탐탐 너를 암살할 기회를 노릴 거고, 수단을 가리지도 않을 거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려 들겠지. 자칫 가문이…… 가문의 기반이 흔들린다. 자이안, 네가, 가문을 망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백작의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리라.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면서, 가문이 분열하지 않도록 막으며, 동시에 왕가에 충성을 표현할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
“그러니까 몇 년 동안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한 10년 정도, 잠시 외국의 별장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 주지 않겠니. 그 정도면 바란드도 충분히 컸을 테고, 미오네도 더 이상 널 눈엣가시로 여기지는 않을 거다.”
동시에, 자이안이 품고 있던 희망을 짓밟는 잔혹한 해결책이다.
백작은 거짓말이 서툰 사람이었다. 가족 앞에서는 특히 그랬다. 설령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라도, 이를 속일 바에는 정직하게 모든 사실을 고하는 사람이었다.
자이안은 백작의 그런 결백한 성격을 존경했다. 그러나 오늘은, 지금 이 순간만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자이안.”
“아버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고개를 저은 자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글픈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백작이 떠나려는 그를 붙잡듯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렴.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주마.”
방을 나서려던 자이안이 몸을 돌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버님께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오오, 그래. 얼마든지 말하려무나. 뭐든 들어주마.”
“당신께선 존경스러운 귀족이셨지만…… 솔직히 아버지로선 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뒤, 그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의자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낌에 가까운 흐린 웃음소리를 흘리며 백작이 말했다.
“……미안하다.”
자이안은 깊게 묵례하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