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마지막 인사(完)
어느 화창한 3월. 한록은 하정엽과 함께 사장실에 앉아 있었다. 하정엽이 서류에 싸인을 한 후 한록에게 건넸다. 한록 역시 싸인을 마치자 하정엽이 말했다.
3월의 봄날. 햇살이 아름다운 오늘은-
“내일부터는 CK MOVIE로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한록이 ENM을 떠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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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이후로 3년. 한록은 그 후로 5개의 박스오피스 1위를 만들어냈고, 이제 영화사업본부는 더 이상 ENM 밑에 있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하정엽은 한록과의 약속대로 영화 전문 회사를 설립해주었다. 그 이름하야 CK MOVIE.
“회사가 안정 되면 이한록 팀장이 사장으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이제 내일부터 CK MOVIE로 출근을 하게 된 한록. 한록만이 아니라 해외팀과 영화사업본부 사람들 역시 대부분 CK MOVIE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ENM에 계속 남는 사람 또한 있었다.
“지금 바로 퇴근해도 좋습니다.”
“그 전에 본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겠습니다.”
예를 들어 최경준.
하정엽은 이제 제당을 비롯해 CK 그룹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고, 대신 최경준이 ENM의 사장 자리에 올라가게 된 상황. 한록이 떠난 이후 하정엽과 최경준 역시 승계, 그리고 ENM을 넘겨받기 위한 길을 걷게 될 것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요.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CK ENM 이한록 팀장’으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제 MOVIE에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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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준의 사무실로 향한 한록. 마침 사무실에선 서감독이 나오고 있었다. 한록이 인사를 건네자 서감독이 답했다.
“오늘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내일부터는 MOVIE로 출근합니다.”
“그렇군요.”
어디에서나 나오는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 조금 아쉬운 기분에 한록이 화제를 돌렸다.
“본부장실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팀장님 때문이죠. 최경준 본부장님께 인터뷰를 하러왔습니다.”
서감독이 말하는 인터뷰란 새로운 영화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마케팅, 그리고 한록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던 서감독. 이제 그 영화가 제작 단계에 들어간 것이었다.
“본부장님이 저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요.”
“떠나는 게 아쉽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한록의 말에 서감독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약간의 장난을 담아 답했다.
“나머지는 MOVIE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엔 마지막이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도 있는 법
마지막에 대한 아쉬움을 덜어주는 말에 한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서감독과 악수를 하며 답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서감독과의 인사를 마친 한록이 본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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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게. 인수인계는?”
“모두 끝났습니다.”
간단한 인사 후 일에 대해 묻는 최경준. 하지만 모든 업무는 미리 끝내놨기 때문에 인수인계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한록 역시 인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이제 바로 돌아가는 건가.”
“아뇨. 팀원들과 함께 퇴근하려합니다.”
“시간이 꽤 남았을 텐데.”
“그래도 기다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이니까요.”
마지막. 그 말에 최경준은 답이 없었다. 최경준 역시 이 순간이 ‘이한록 팀장’과의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최경준. 최경준이 한참의 침묵 후 한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터뷰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었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군.”
그 말에 한록이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최경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화계는 내가 평생을 바친 곳이야. 그런데 이제 자네가 CK MOVIE를 가져가게 되었군.”
한록의 상사이자, 동료이자, 뛰어넘고 싶던 사람. CK ENM의 전설이자 한국 영화 그 자체였던 사람.
그 사람이-
“앞으로 영화계를 부탁하네.”
한록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최경준이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애정 어린 눈빛. 그리고 추억이 담긴 얼굴. 그 모습에 한록 역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만들어온 추억과 역사.
이제는...
“네, 저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자신이 그것들을 이끌어 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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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네.”
한록이 나간 후. 혼자 남은 최경준은 방금 전 서감독과 했던 인터뷰를 떠올렸다.
[이한록 팀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천재였고,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 몰랐죠. 자기만의 선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걸 극복하지 못한다면 추락할거라 생각했습니다.]
처음 한록을 보며 했던 생각.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넘어서더군요.]
그리고 지금.
‘팀원들과 함께 퇴근하려 합니다.’
최경준은 방금 전 한록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록이 떠난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 내 대답이 틀리진 않았던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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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록과 헤어진 후 복도를 걷던 서감독.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서감독을 알아본 사람이 인사를 건넸지만, 서감독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누군가 인사를 했단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이었다. 서감독의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천재. 회사원. 선...”
오늘 최경준이 했던 말.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서감독이 황급히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펜을 들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영감이 머릿 속에 찾아온 것이었다.
수첩을 몇 장이나 넘겨가며 메모를 적던 서감독. 그가 마침내 메모를 마치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문장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이거다.”
[가제 :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
수첩 마지막에 적힌 글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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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준과 인사를 마친 한록은 다시 해외팀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인 만큼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게 뭡니까?”
한록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해외팀 사람들은 다 같이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롤링페이퍼 중이었어요.”
“롤링페이퍼?”
“네. 계속 여기 남는 분도 계시니까...”
해외팀 대부분이 CK MOVIE로 이동하지만, ENM에 남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과의 이별을 위해 유선이 롤링페이퍼를 준비한 것이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대부분 롤링페이퍼에 참여하고 있었다.
“부장님도 이런 걸 하시는군요.”
“심심했어.”
사실 제일 큰 이유는 할 일이 없어서였지만.
“6시까지 가만히 앉아있어서 뭐하냐. 뭐라도 해야지.”
“맞는 말이죠.”
“어, 팀장님도 같이 하실래요?”
“좋습니다. 저도 주세요.”
일이 없는 건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한록 또한 롤링페이퍼에 합류했다.
“부장님! 컨닝 하지 마세요.”
“이게 뭐라고 컨닝을 해?”
“방금 제가 쓴 말이랑 똑같은 말 쓰고 계셨잖아요!”
“눈도 좋긴.”
늘 그렇듯 작은 소동과 함께 끝난 롤링 페이퍼. 모든 사람이 자신의 롤링페이퍼를 나눠받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너희 욕 쓴 건 아니지?”
“글쎄요?”
“이 자식들이...”
익명으로 진행된 이번 롤링페이퍼. 최과장의 장난기 어린 말에 정부장이 인상을 쓰며 롤링페이퍼를 펼쳤다.
[TO. 정민석 부장님]
[해외팀 아빠!]
그리고 그곳에는 생각 외로 좋은 말이 담겨있었다.
[언제부턴가 좀 다정해지셨어요]
“내가 그랬나.”
롤링페이퍼를 보고 생각에 잠긴 정부장.
[TO. 김유선 대리님]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감사합니다.”
한록이 쓴 메시지에 조용히 중얼거리는 유선.
[TO. 최윤일 과장님]
[재수 없는 줄 알았는데 가끔 귀여운 면이 있음.]
“차장님. 이거 차장님이 쓰신 거죠?
“봤어?!”
“찍었어요. 절 너무 좋아하시네요.”
“아니라고 할 걸!”
현차장의 말에 미소를 짓는 최과장.
[TO. 현주훈 차장님]
[제일 의지할 수 있는 분]
“참나...누군지 모르지만 고맙네.”
누군가의 메시지를 사진으로 찍는 현차장.
사람들은 롤링페이퍼를 보고 저마다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쓴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한록 역시 자신의 종이를 펼쳤고, 내용을 확인한 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멋있어요.]
[가지마세요 ㅠ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롤모델]
[좋은 사람.]
팀원들이 남겨준 고마운 글들. 그리고...
[영원한 우리 팀장님.]
떠나더라도 계속 생각날 추억들.
[그리울 거예요, 팀장님.]
아마 ENM에 남는 누군가가 썼을 메시지. 그 메시지를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이건 영원한 이별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일하는 장소가 달라질 뿐이었고,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한록도, 남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
‘저도 그리울 겁니다.’
하지만 그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
롤링페이퍼가 모두 끝났고, 어느새 다가온 퇴근 시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잘 지내요!”
“내일 뵙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사무실을 떠나기 시작했고, 사무실은 차차 비워졌다. 어느새 개인 물품들이 거의 다 빠진 사무실. 그러나 유선은 아직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안 비웠어?”
“아, 네. 짐이 많아서요.”
“내가 도와줄까?”
“저도 도울게요.”
“끝나면 말해라. 어차피 사원증 반납하러 다 같이 인사팀 가야하니까.”
유선의 짐정리에 합류한 최과장과 현차장.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부장. 현차장, 최과장은 짐을 정리하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건 유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 끝난 거지?”
“...네.”
그리고 짐 정리가 끝났을 때.
“아, 잠시만요. 저 사원증이 어디 있더라.”
이번엔 최과장이 사원증을 찾기 시작했다.
“서랍에 없어?”
“네. 주머니에도 없어요.”
“어디 흘린 거 아냐?”
“글쎄요...”
이번엔 다 같이 사원증을 찾아 나선 해외팀 사람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록이 최과장의 서랍을 열었다.
“여기 있네요.”
서랍 속에 들어있는 최과장의 사원증. 분명 아까 최과장이 없다고 말했던 곳이었다.
“그게 거기 있었네.”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머쓱하게 사원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현차장이 말했다.
“빨리도 찾았네.”
“그러게요.”
잦아드는 목소리와 어느새 찾아온 침묵.
그들은, 사실, 모두...
“이제 올 일 없겠지?”
이곳을 떠나기 싫어 계속 핑계를 대고 있었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요.”
“...그러게.”
최과장의 말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이상 근무했던 곳. 이제 그곳을 떠난다. 그 사실이 새삼 어색한 것이었다.
인생을 바친 회사. 처음으로 정규직이 된 회사. 처음으로 남고 싶던 회사. 회사생활의 의미를 다시 찾아 준 회사.
정부장. 유선. 최과장. 현차장이 각자의 의미가 담긴 사무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렇게, 그들이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한록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가볼까요.”
한록의 말에 여전히 머뭇거리는 사람들. 한록이 사람들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다시 한 번 말했다.
“내일도 출근해야죠.”
“그래, 그래야지.”
“어차피 장소만 바뀌는 거야.”
출근이라는 마법의 단어에 사람들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은 아쉬운 눈빛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사무실에는 한록만 남게 되었다.
사람들을 보낸 한록은 마지막으로 해외팀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유선과의 첫 대화. 현차장의 조언. 정부장과의 회의. 최과장과의 우정. 그리고...그간 함께 했던 모든 인연들.
인생의 일부분이었던. 아니, 거의 전부였던 곳. 이곳에서 많은 걸 배웠고, 그렇게 성장했다. 이제는 더 이상 회사란 곳이 두렵지 않았다. 이곳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떠날 수 있다.
한록이 모두가 떠난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을 눈에 담으며. 그리움과 애틋함. 그리고 고마움을 담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소중한 과거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이팀장. 엘리베이터 왔다!”
현차장의 목소리에 한록이 사무실의 불을 껐다. 그리고 텅 빈 사무실에서 걸음을 돌렸다.
마지막 인사. 마지막 소등.
마지막 퇴근.
“같이 가요, 차장님.”
저 멀리서 팀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