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이팀장 연애한다는데?(2)
모두를 놀라게 한 한록의 대답.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
“네.”
그 말에 중년 탐정 정부장의 뇌가 활성화 되었다. 정부장의 뉴런은 빠르게 오늘 한록에게서 알아낸 정보들을 취합하기 시작했다. 오늘 한록의 통화 상대. 자주 얘기에 오르내리던 사람. 그리고 요즘 한록과 만남이 잦던 사람...
“그래, 이거야!”
“아, 깜짝이야.”
진실을 깨달은 정부장이 감탄사를 내뱉었고, 곁에 있던 유선이 놀라 정부장을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왜 이래?’라는 얼굴. 그러나 정부장은 유선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비장한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범인은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있다!”
“부장님. 그거 제가 벌써 한 말입니다.”
비장한 표정에 비해 별거 없는 내용을 말한 정부장. 하지만 정부장은 이미 한록의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정부장이 현차장을 가리켰다.
“현차장!”
“저...저요?”
“요즘 이한록이 전화 받을 때 목소리가 다정하다고 했지?”
“어...네?”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 잘 생각해 봐!”
“기억 안 나는데요.”
“생각해!”
“어...”
“3개월 전. 아니야?”
“아, 맞아요.”
“그때 우리가 무슨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지?”
“어...KBC랑 예선전 기획 들어갔죠.”
“그래. 이게 첫 번째 단서다. 왜 이걸 놓치고 있었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탄식을 뱉는 정부장. 그러나 팀원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유선씨.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아뇨, 과장님. 하나도 모르겠어요.”
“다행이다. 나만 눈치 없는 줄 알았네.”
“최윤일!”
“네?”
정부장이 이번에는 유선과 대화중인 최과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이한록이 여자 사진 보고 있었다고 했지?”
“그거 그냥 떠 본 거예요. 확인해보니까 작년 예선전 사진이었어요.”
“아니, 그냥 사진이 아니야. 분명 네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음...대단한 건 아닌데. 있긴 했어요.”
“그게 뭐지?”
“팀장님이 사진 보면서 웃고 계시더라고요.”
“이게 두 번째 증거다. 맞지, 이한록?”
최과장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정부장. 정부장이 한록을 바라보고 똑바로 섰다. 카페에 다시 한 번 흐르는 침묵과 긴장감. (유선씨. 혹시 우리도 폼 잡아야 하는 건가?) (네, 차장님.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럼 내가 유선씨 옆에 설 게.) 그 속에서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3개월 전. 예선전. KBC. 오늘 네가 보고 있던 사진. 이 증거에 모두 연관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 바로 곁에 있던 사람. 하지만 우리가 의심하지 못하던 사람. 그건 바로-”
“답답해 죽겠네. 팀장님. 송PD님이랑 사귀세요?”
“네.”
그리고 하대리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
현차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록에게 되물었다.
“...송PD? 내가 아는 그 송PD?”
“네. 여러분이 아시는 그 송PD님이십니다.”
송PD.
KBC 예능국의 스타 PD로, CK와 함께 시상식에 예선전을 도입했던 사람이었다.
벌써 3년째 CK와 예선전을 만들고 있는 송PD. 그런 송PD와 한록이 연애를 하고 있다.
“어...얼마나?”
“3개월 정도 됐습니다.”
그것도 3개월째.
“한 달 전에 우리 다 같이 밥도 먹었잖아. 전혀 몰랐는데?!”
“티를 안 냈으니까요.”
“그때 내가 이팀장한테 소개팅 시켜준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럼 나 설마 여자친구 앞에서 소개팅 얘기를 꺼낸 거야?”
“괜찮습니다. 제가 거절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다섯 번 더 권유했잖아.”
“그랬죠. 제가 다섯 번 거절했고요.”
“...이거 설마 새로 나오는 영화 스토리야?”
“현실입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현실을 부정하는 현차장. 그러나 한록이 3개월째 연애 중이라는 것도, 그 상대가 송PD란 것도, 현차장이 아무것도 모르고 커플 앞에서 주책을 떨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현차장이 머리를 부여잡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건 진작 말하라고, 이것들아!!!”
그리고 한록커플을 향해 울부짖었다.
**
그렇게 알려진 송PD와 한록의 연애사.
“이것들이 일은 안 하고...”
월요일 아침. 정부장이 예선전 보고서를 보며 혀를 찼다. 3개월 동안 KBC와 붙어 다녔지만 한록과 송PD가 사귀고 있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년탐정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지금 상황에서 더 중요한건 따로 있었다. 바로...
“네, 송PD님. 이한록입니다.”
지금은 KBC와 예선전의 조건에 대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란 것.
송PD의 전화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록. 정부장이 한록이 떠나기 전 재빨리 메세지를 보냈다.
[이한록. 여자친구라고 봐주지 마라.]
[당연하죠.]
한록은 아주 짧은 답변을 보내왔다. 시원한 답변이었지만, 정부장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한록이 자리를 떴고, 정부장이 이번엔 현차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차장]
[넵]
[이한록 따라가라.]
[네?]
[가서 통화 엿듣고 와]
[ㄴ ;ㅔ?]
[여자친구라고 살살 하나 확인하고 오라고]
[부장님 그거 불법 아니엥ㅇ요?]
[회사에 불법이 어딨어 빨리 듣고 와]
[아니 그래도]
[내가 가랴?]
[네 ㅠㅠ]
그렇게 결국 한록을 따라나선 현차장. 정부장은 초조한 마음으로 현차장과 한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현차장이 사무실로 복귀했고, 곧이어 한록이 자리로 돌아왔다.
‘...왜 웃고 있지? 불안한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한록의 얼굴. 그 모습에 정부장의 마음이 한층 불안해졌다. 그때 현차장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부장님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왜 어땠는데?]
[평소의 이팀장입니다 아니 더 악독해졌습니다]
[정말?]
[네 둘이 거의 싸우던데요]
[그런데 표정이 왜 저렇게 좋아? 여자친구랑 싸운 건데?]
[이팀장을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미친 사람이잖아요.]
[맞는 말이네]
현차장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부장. 한록은 미친 사람이라는 현차장의 말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랐다. 잠시 후. 한록이 방금 전 대화 내용을 정부장에게 메시지로 전달해왔다.
[방금 송PD와 전화 마쳤습니다. 제작비 전액 지원. 간섭 하지 않기. 외국 배우 섭외. 거기에 전후 광고도 전부 CK걸로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너 정말 미친놈 중 미친놈이었구나]
가장 악독했던 버전 3에 광고 얘기까지 달린 이번 조건. 한록이 내 건 조건에 정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때 한록의 전화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네. 송PD님. 얘기하시죠.”
그리고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한록.
한록의 모습을 보고 있던 정부장이 다시 한 번 현차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따라가라]
[이팀장 믿어도 된다니까요??]
그러나 정부장의 이번 걱정은 다른 것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적당히 하라고 말리고 와]
그 말에 현차장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한록을 뒤따라갔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한록과 송PD의 밀고당기기.
“네. 이한록입니다.”
“아뇨. 그 부분은 절대 양보 못합니다.”
“확정된 후에 전화 주시죠.”
“더 이상 얘기할 생각 없습니다.”
한록은 수준급의 밀당을 자랑했고, 그 결과...
“이한록 팀장님. 저 좀 봅시다!”
송PD가 직접 CK에 강림했다.
핸드폰을 들고 씩씩거리며 해외팀 사무실을 찾아온 송PD. 그리고 그 옆의 예능국장 강국장.
회사 최고의 인기남 한록. 그런 그의 여자친구가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왔다. CK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가십에 해외팀 사람들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 다 같이 회의 좀 하죠?”
송PD의 날이 선 말투.
“네. 가시죠.”
그리고 받아치는 한록.
몸을 홱 돌려 먼저 회의실로 향하는 송PD와 그 뒤를 따르는 한록.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대와 두근거림보다는...
“...이거 현피 뜨러 온 거 같은데?”
곧 벌어질 일에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다.
**
그렇게 회의에 돌입한 송PD와 강국장, 한록, 정부장과 현차장.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함께하는 그 회의는...
“이한록 팀장님. 지금 이 조건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예선전을 CK 혼자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선전이 이만큼 큰 데에는 우리 역할도 있었어요.”
“그 역할이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서로를 피터지게 물어뜯는 남자친구와 여자친구. 그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는 정부장과,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차장. 그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강국장.
“저희는 절대 이 조건 못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아세요.”
“그러면 여기서 회의 끝내죠. 앞으로는 CK는 MBS와 함께 예선전을 진행하겠습니다.”
이 피터지는 회의는...
“네, 여기서 끝내요. 저희 갑니다. 국장님. 가요!”
송PD의 퇴장으로 끝이 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송PD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는 강국장.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한록. 너 괜찮겠냐?”
“네.”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송PD. 강국장이 다급하게 송PD를 쫓았다.
“자, 잠깐! 송PD! 잠깐만! 이렇게 나가면 어떡해!”
“그럼 어떡해요! 국장님이 이 조건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한록 팀장은 막무가내잖아요!”
“조금만 더 얘기를 해보자!”
“얘기는 무슨. 이한록 팀장 절대 맘 안 바꿔요. 국장님 말이 맞아요. 이 조건 받아줄 바에는 그냥 끝내고 말죠!”
“아니! 끝내면 안 되지. 어떻게 예선전을 끝내!”
“저한테는 이 조건 받아들일 거면 짐 싸라고 하잖아요! 사장님한테 전해주세요. 저 업계 뜹니다! 제가 무슨 의견 조율하는 사람이에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 송PD이 얼굴. 그 모습에 강국장이 안절부절 못하며 계속 송PD의 뒤를 따랐다. 그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국장님. CK 조건 안 맞춰주면 MBS로 가버릴 것 같습니다. CK 정도면 이 조건 들어줄만 하니까 이대로 가시죠.
-웃기시네. 그 조건 맞춰줄 바에야 방송 끝내고 만다. 적당히 윽박질러서 포기시켜.
처음 한록의 조건을 들었을 때, 송PD는 한록의 조건에 맞춰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강국장은 송PD의 제안에 반대했다. 자신들은 공중파 언론이다. 고작 일개 기업 따위야 몇 번 협박하면 숙이고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록은 생각보다 훨씬 강경했고, 회의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이제 아예 예선전을 뺏기게 된 상황.
‘아, 젠장. 어떡하지?’
‘예선전도 뺏기고 송PD도 그만둔다고?’
‘이거 전해지면 사장님이 나 죽일 거다.’
몇 번이나 고민하던 강국장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송PD에게 외쳤다.
“송PD!”
“네!”
“송PD 말이 맞다. 이 조건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 말에...
“국장님. 방금 허락하신 겁니다?”
씩씩대며 화를 내던 송PD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
그날 저녁. 정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한록.
“방금 송PD님과 얘기 끝났습니다. 우리가 말한 조건 전부 수용. 대신 우리는 올해 뿐만 아니라 내후년까지 KBC와 3년 전속 계약 해주기로 했습니다.”
CK는 원하는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KBC는 앞으로 조건 상승 없이 3년간 전속 계약을 맺는 방법. 한록이 가져온 해결책은 모두가 이득을 보는 윈윈 전략이었다.
“이따가 계약서 받으러 오실 겁니다. 그것만 드리고 퇴근해보겠습니다.
“어, 그래라.”
그리고 모든 일을 깔끔히 끝마치고 사무실을 떠난 한록. 이렇게 이 일은 잘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부장은...
“현차장.”
“넵.”
“쟤네 괜찮으려나?”
조금 다른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송PD 길길이 날뛰던데. 내일부터 이한록 다시 솔로 되는 거 아냐?”
정부장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 그 말에 현차장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말했다.
“중년 탐정도 이런 부분엔 약하시군요.”
“이런 부분이 뭔데?”
“부장님. 중매 결혼이시죠?”
“어떻게 알았냐?”
“티가 납니다.”
“...그래서?”
“전 연애 결혼이거든요.”
“그런데?”
“이팀장네 분위기 좋습니다.”
“그 지랄을 하고 싸우고 있는데 분위기가 좋다고?”
“네. 제가 장담합니다.”
“뭘 보고 장담하는데?”
정부장의 말에 현차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 종일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한록과 송PD. 조금도 물러남이 없던 둘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보였던 것들.
“중매 결혼한 사람은 모를만한 게 있습니다.”
오늘 자신이 목격한 광경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현차장을 보고 정부장이 말했다.
“그런데 너 말투가 왜 그러냐?”
“앗, 죄송합니다. 간만에 잘난 척 할 게 나와서.”
현차장이 정부장의 지적에 다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계약서 작성을 위해 한록의 사무실을 방문한 송PD. 송PD가 한록의 사무실에 들어왔고, 문을 닫았으며...
“성공!”
한록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강국장 이 꼰대 아저씨. 꼭 당해봐야지 안다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접었네요.”
“당연하죠! 그 아저씨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게 사장님이거든요. 잘 먹혔네요.”
한록의 조건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강국장. 그런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오늘 송PD와 한록이 짠 전략. 그게 바로 오늘 싸움의 진짜 이유였다.
“하, 이한록씨. 그쪽도 근데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하나를 안 빼주지?”
물론, 한록과 송PD의 파워게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사귀는 건 사귀는 거고, 공과 사는 구분하는 걸로 해요. 절대 일에 사적인 감정 개입시키지 않기.
-저도 바라던 부분입니다.
공은 공, 사는 사. 일과 연애는 별개.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의 약속을 정확히 지킨 한록. 그런 한록의 모습에 송PD가 감탄을 했다.
“이한록씨, 아까 진심이었죠? 어떻게든 우리한테서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 한 거죠?”
계약서를 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송PD. 그리고...
“그래서 싫었어, 은아야?”
송PD의 곁에 앉은 한록의 능글맞은 질문.
“아니. 좀 멋있었지.”
한록의 말에 송PD가 아주 솔직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 한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송PD가 서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명이 모두 끝나자 다시 이한록 팀장으로 돌아와 송PD에게 말했다.
“가시죠. 바래다 드릴게요.”
그렇게 함께 사무실을 나선 둘.
한록과 송PD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때 강국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송PD가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한록에게 찡긋 윙크를 하며 전화를 받았다.
“국장님! 방금 이한록 그 새끼랑 계약서 썼습니다! 말 조심하라고요? 그 새끼가 그 새끼지 그럼 뭐라고 해요!”
그리고 다짜고짜 한록에 대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저 말리지 마요! 언제 한 번 그 새끼랑 맞짱 뜰 거니까!”
남자친구를 팔아서 프로젝트를 지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 그 모습에 한록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어떻게든 자기 회사의 이익을 챙기려는. 일을 할 때는 상대방이 자신의 애인이란 사실마저 완전히 잊은 듯한 모습.
송PD, 그리고 한록이 서로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씩씩대며 전화를 받는 송PD.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인 송PD의 모습에 한록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송PD를 집에 보내기는 아쉬웠다.
‘어디 보자.’
한록은 송PD의 뒤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한록이 송PD의 손을 붙잡고,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송PD?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설마 싸우러 간 거야!?]
그리고 강국장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송PD의 귀에 속삭였다.
“차에서 기다려. 같이 저녁 먹자.”
그 말에 송PD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상황파악이 완료되자 한록의 가슴을 툭 치며 밀어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받으며...
“네! 싸우러 가려다가 말았어요!”
[빨리 와. 나 배고파.]
한록에게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자신에 대해 욕을 내뱉는 목소리. 그리고 그와 반대로 속삭이는 입모양. 기분 좋게 마음을 간지럽히는 일들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송PD의 귀에 속삭였다.
“응. 얼른 올게.”
그리고 뒤를 돌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어머! 어머! 어머어머어머어머!”
그리고 여기. 퇴근을 하다가 우연히 한록과 송PD의 모습을 목격한 현차장.
“조용히 해. 다 들린다.”
“어머어어어!”
그리고 정부장.
정부장은 현차장을 조용히 시키는 건 포기하고, 대신 현차장을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리고 한록이 자신의 차를 지나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록의 얼굴에 걸린 미소와 약간 빨라진 발걸음. 누가 봐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의 모습에 정부장이 놀란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은 저녁 9시. 회사원 대부분이 퇴근을 한 시간. 그리고...
“허어. 눈으로 봐도 안 믿기네.”
“뭐가요?”
“저 녀석도 사랑을 한다는게.”
오늘도 열심히 일한 두 남녀가 이제는 서로의 인생을 즐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