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이팀장 연애한다는데?(1)
10월의 어느 가을날.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 시상식 주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CK에는 시상식 예선전에 대한 문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마친 현차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MBS에서 올해는 자기들도 끼워주면 안 되냐는데? 독점 아니어도 되고, 수익분배랑 제작비 다 우리한테 맞춰준대.”
“KBC는 뭐라고 합니까?”
“무조건 독점 원하지.”
<도착지> 이후 벌써 몇 년째 KBC의 송PD와 연말 예선전을 진행하고 있는 CK. 그러나 이번에는 MBS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굳이 방송사를 바꾸지 않더라도 이건 예선전의 몸값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줄다리기를 해볼까.’ 잠시 생각하던 한록이 현차장에게 말했다.
“제가 송PD님과 얘기해보겠습니다.”
“뭐라고 하게?”
“KBC도 우리한테 조건 맞춰달라고 해야죠.”
“이팀장 어제까진 ‘앞으로 계속 KBC랑 갑시다. 지속적인 우호 관계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죠.’라고 했잖아.”
“그건 어제까지고요.”
“그럼 오늘은?”
“최대한 쥐어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으흑. 제발 샬롯테로 이직하지 말아줘.”
한록의 악독함에 몸서리를 치는 현차장. 현차장이 다시 한 번 한록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쥐어짤 건데?”
“아무리 쥐어짜도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첫 번째는 수익분배랑 제작비 다 우리한테 맞춰주는 조건이죠.”
“세다. 두 번째는?”
“수익분배랑 제작비 다 우리한테 맞춰주고 외국 배우들까지 섭외해오는 조건입니다.”
“...세 번째는?”
“수익분배랑 제작비 다 우리한테 맞춰주고 외국 배우들 섭외해오고, 제작 과정에 아무런 개입도 안 하는 겁니다.”
“송PD가 이팀장 죽이려하면 어떡해?”
“그럼 MBS랑 할 겁니다.”
“같은 팀이지만 정말 지독하다, 지독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현차장과 한참 대화를 주고받던 한록이 잠시 말을 멈췄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리고 있던 것이었다. 한록이 전화의 발신인을 확인했고, 현차장에게 말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누군데? MBS? 아니면 제롬?”
“개인 용무입니다.”
“아, 그래.”
그렇게 사무실을 떠난 한록. 그리고...심각한 표정의 현차장.
“차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마침 물을 떠 오고 있던 유선이 현차장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현차장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이 생겼다.”
“무슨 일이신데요?”
“이팀장이...”
“팀장님이?”
“나도 믿기지 않지만...”
“않지만?”
“이게 사실인가 싶지만...”
“싶지만?”
“내가 느끼기엔 확실히...”
“차장님! 그냥 말해주세요!”
“하대리. 듣고 있었어?”
“네. 그러니까 빨리 말해주세요!”
“그래. 이팀장이...”
“으아악!”
현차장의 화법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하대리와 주변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차장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팀장이 말이다.”
“네.”
현차장이 이토록 진지하게 말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연애하는 것 같다.”
한록의 연애사에 대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현차장의 말에 송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
“팀장님이?”
“연애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현차장의 말에 미어캣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최과장, 유대리, 송과장. 그들 외에도 해외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현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목요일 오후의 가십. 그것도 한록의 연애사다. 노곤한 머리에 활력을 주기에 충분한 얘깃거리였다. 최과장이 현차장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대?”
“갑자기가 아니야. 생각한지 꽤 됐어. 계속 지켜보다가 오늘 확정을 내린 거지.”
“얼마나요?”
“3개월쯤.”
“차장님 혹시 팀장님을 사랑하시나요?”
“아니야! 이팀장이 이상하게 굴었단 말이야!”
“어떻게요?”
“요즘 전화 통화할 때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 분명 여자친구랑 하는 거야.”
“...그게 끝이에요?”
“당연히 아니지! 방금 봐봐. 나랑 얘기 중이었는데 그거 끊고 전화 받겠다고 나갔잖아.”
“아...”
“이해가 가지?”
“네. 질투하고 계시는군요.”
“아니라고오!”
최과장의 말에 현차장이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자신의 추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전화가 일 때문에 걸려온 전화가 아니었단 거야. 분명 사적인 일이라고 했지.”
“그게 왜요?”
“평소의 이팀장을 생각해봐. 일 얘기 중에 개인적인 전화가 걸려오면 어떻게 할 거 같아?”
“일 얘기를 먼저 끝내시겠죠.”
“그래. 그런데 이번엔 전화 받겠다고 나갔다고.”
“급한 일이신가 보죠.”
“이게 처음이 아니야. 요즘 자주 그랬어.”
“역시...”
“역시 맞는 거 같지?”
“팀장님을 사랑하시는군요.”
“지금 즐기고 있지?”
“그럼요.”
현차장과 대화를 주고받는 최과장. 그러나 최과장의 장난기 어린 반응과 달리, 유선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진지하게 현차장의 얘기를 듣고 있던 유선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차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왜요? 유선씨도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네. 제가 지난 주 목요일에 퇴근 직전에 팀장님한테 컨펌 받으러 갔는데요.”
“뜸 들이는 게 유행인가? 그랬는데요?”
“저 그날 야근확정이었거든요. 그러면 보통 팀장님도 같이 남아서 결재 다 끝내주시잖아요?”
“그렇죠. 그런데요?”
“그런데 결재는 내일 해주겠다고,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본다고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저번 달에는 연차도 쓰셨어요.”
“그건...”
“그거죠.”
유선이 아까 전 현차장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현차장처럼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데이트.”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징후들. 한록의 평소와 다른 모습들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맞아. 연애하는 게 확실해.”
“확실히 평소랑 좀 다르시긴 한데...그렇다고 연애하시는 거라고 확정할 순 없잖아요.”
“아니야, 최과장! 이건 백퍼센트야!”
“전화 와서 전화 받으러 나가기. 퇴근 시간에 퇴근하기. 연차 있어서 연차쓰기. 이거 세 개인데 뭘 백퍼센트예요. 평범한 사람은 다 하는 건데.”
“그건 최과장이 이팀장을 몰라서 하는 얘기야. 이팀장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요?”
“일에 미친 사람. 줄여서 미친 사람이지.”
“갑자기 설득력이 확 생기네요.”
“그렇지?”
“음, 전 아닌 것 같아요. 팀장님 연애 안 한지 2년도 넘으셨어요.”
“하대리. 역시 뭘 모르는군. 정확히는 2년 반이야. 헤어지고 6개월 지나서 우리한테 얘기한 거고.”
“역시 팀장님을 사랑하시는군요...”
“그래, 그런 걸로 해! 그러니까 내가 하대리보다 더 잘 알지! 이팀장 연애하는 거 맞아!”
찬 연애파 현차장. 반 연애파 하대리. 그리고 중립의 최과장.
“지금 다들 뭐하는 짓이야? 한가하지?”
“헉. 부장님.”
그때 정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해!’ 그런 말을 생각하며 얼른 자리로 복귀하려는 해외팀 사람들. 그리고 정부장은...
“니들끼리 쓸데없이 떠들 시간에...”
“넵, 일하겠습니다!”
“이한록한테 직접 물어보는 거 어때.”
누구보다 한록의 연애사에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장님...?”
“이한록이 얌전히 얘기하진 않을 거 같으니까 일단 현장을 덮쳐. 쉽진 않겠지만 해 볼만 하다.”
“저희 월요일까지 MBS한테 답장 줘야 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이한록이 연애한다는데?”
“그렇죠! 예선전이 뭐가 중요합니까!”
“드디어 말귀를 알아 듣네.”
정부장의 말에 완전히 동화된 현차장과,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정부장. 정부장이 해외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정부장 특유의 냉철함과 결단력이 담긴 목소리로...
“이번 주 업무 목표는 이한록 연애현장 덮치기다.”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진실을 밝혀주지.”
중년 탐정 정부장. 출동이다!
**
“김유선. 통화내용 감시해.”
“넵!”
“최과장. 살짝 떠 봐.”
“알겠습니다.”
“현차장. 증거모아서 한 번에 터뜨린다.”
“네!”
“하대리. 주변 증언 수집해.”
“저도요...?”
“하라면 해.”
“네...”
그렇게 정부장의 지휘 아래 구성된 특별 수사본부.
그러나 수사는 쉽지 않았다.
“응. 오빠 오늘 늦어. 먼저 자. 내일은 일찍 들어갈게.”
“팀장님!!!”
“...유선씨?”
“지금 누구랑 전화 하시는 거예요?!”
“한서요. 병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한서야! 아프지 마!”
“어, 팀장님? 지금 핸드폰에 여자 사진 아니에요?”
“송PD님이 작년 예선전 현장 보내주셨습니다.”
“여자는 여자네요.”
“이팀장! 핸드폰 케이스! 그거 누가 사 준 거야?”
“한서랑 같이 샀습니다.”
“요즘 왜 집에 일찍 들어가는 거야?”
“한서가 집에 있어서요.”
“젠장! 왜 그렇게 좋은 오빠인 거야!”
유선. 최과장. 현차장. 모두의 시도는 전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금요일 퇴근 시간. 회사 1층 카페에서 모인 정부장의 정예 수사팀.
“성과는?”
“없어요. 낮에 전화는 송PD님이랑 하시던 거래요.”
“한서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 거라고 하던데요.”
“핸드폰 케이스도 한서가 사준 거래요.”
정부장의 엄선한 수사 인력들은 한록 앞에서 모두 백기를 들었다. 수사팀의 부진에 해외팀 반 연애파 하대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거봐요. 팀장님이 무슨 연애예요.”
“진짜 연애하는 거 같았는데...”
어쩐지 기세가 등등해진 하대리와, 약간 풀이 죽은 현차장.
그렇게 수사 작전이 실패로 끝나는가 싶었을 때...
“쉿!”
정부장이 현차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조용히 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는 정부장. 정부장이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정부장이 가리킨 곳에는...
“팀장님이다..,!”
한록이 앉아있었다.
오늘 ‘먼저 들어가보겠다’며 정시에 퇴근을 한 한록. 그런 한록이 아직 회사에 남아있다. 게다가 한록은 누군가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저 눈빛 봐봐.”
그것도 눈에 사랑을 가득 담고서.
“분명 뭔가 있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한록을 지켜보고 있을 때. 한록이 결정적인 증거를 남겼다.
“사랑해. 오빠 얼른 갈게.”
“미쳤다!”
완벽한 증거에 현차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
“빨리 보고 싶...”
누군가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던 한록. 한참 통화를 하던 한록이 어딘가를 보고 말을 멈췄다.
“팀장님.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요.”
“어떻게 우리를 속여?”
유선, 현차장. 그리고 최과장과 하대리가 한록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 진실을 말해.”
그리고 중년탐정 정부장까지.
한록이 상황파악이 안 된 얼굴로 정부장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발뺌해도 소용없어. 추리는 완벽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증거를 가지고 있지. 이한록. 이제 솔직히 말해라.”
“뭘 말입니까?”
“지금 여자친구랑 통화하고 있지?”
정부장의 날카로운 질문에 한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답이 없는 한록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부장. 카페에 감도는 긴장감...
“최과장. 이거 원래 이렇게 긴장되는 거 맞나?”
“글쎄요. 저도 처음이라.”
“최윤일. 현주훈. 조용히 해라.”
“넵.”
정부장의 말에 최과장과 현차장이 다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자신을 압박하는 해외팀 팀원들. 그토록 친밀했던 동료들의 배신. 그 압박감에 한록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오늘 한록이 눈에 사랑을 가득담고 영상통화를 한 사람. ‘오빠 얼른 갈게.’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저희집 강아지 쪼쪼입니다.”
사람이 아닌 강아지였다.
“어?!”
“인사해, 쪼쪼야. 오빠 회사 사람들.”
[멍! 멍!]
한록의 말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쪼쪼.
“우리 쪼쪼.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해.”
그 모습에 한록이 또 다시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현차장을 오해하게 만들었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설마...”
아직 어린 아기 강아지와 3개월 전부터 부쩍 개인시간을 중요시 여기던 한록. 중년 탐정 정부장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추리를 마친 정부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너...최근에 강아지 데려온 거냐?”
“네. 어머니가 3개월 전에 데려오셨습니다.”
“그럼 연차를 쓴 것도...”
“쪼쪼 보러 강원도에 다녀왔죠.”
“요즘 칼퇴를 한 것도...?!”
“요즘 쪼쪼가 한서랑 같이 서울에 있어서요.”
완벽하게 맞춰지는 퍼즐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진실.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에 정부장이 이마를 짚고 말했다.
“내 추리가 틀렸다니...!”
“부장님! 충분히 함정에 빠질만한 문제였어요!”
“아니야. 난 탐정의 자격이 없다.”
“울지 마세요. 부장님!”
“아니. 김유선. 울진 않았어.”
“지금 다들 뭐하시는 거죠?”
상심에 빠진 정부장과, 정부장을 달래는 유선과 현차장.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한록이 묻자 하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저희끼리 팀장님을 대상으로 수사를 좀 했거든요.”
“무슨 수사 말입니까?”
“팀장님 여자친구 생기셨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죠. 그게 진짠지 확인 좀 했어요.”
어쩐지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하는 하대리. 하대리의 옆에서 최과장이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친구 말입니까?”
“네.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부장님이 너무 단호하게 나오셔서 넘어가 버렸네요.”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팀장님이 연애라니, 그럴리 없죠.”
“그러게요.”
그리고 최과장과 하대리가 대화를 주고 받을 때...
“여자친구 생긴 거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록이 폭탄 발언을 했다.
“아. 상대방한테 들으셨나요?”
거기에 이어진 말까지.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 거기에 상대방한테 들었냐는 질문까지.
중년탐정 정부장의 추리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하나의 가능성에 정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록에게 물었다.
“설마 우리가 아는 사람이냐?”
“네.”
“.....네?!?!?!?!?!?!”
그리고 한록의 답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