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54화 (216/263)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完)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가 공개되는 날. 닉과 제롬 역시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고, 화면에서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세자의 모습. <시험>. 서로를 의심하는 아들과 어머니. <수면>. 공연장에 홀로 남은 피아니스트. <마지막 연주>.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식물>. 그리고 <오징어 서바이벌>. 그간 CK가 개봉한 영화들이 화면에 스쳐지나갔고, 마지막으로 나레이션이 나왔다.

[CK.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간 우리의 영화들을 사랑했다면, 이번에도 극장으로 오라’라는 CK의 광고.

그 광고를 본 제롬이 입을 열었다.

[정면승부라. 언제나 배짱이 좋군요.]

이번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는 소박하지만 동시에 대담한 광고였다.

사람들이 CK란 영화사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영화에 진정으로 감동했다면, 이번에도 영화관에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영화는 물론이고 CK란 회사의 브랜드 가치에도 의문이 생길 것이었다.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롬이 곁에 있던 닉에게 물었다. 제롬의 말에 닉이 답했다. 아주, 단호한...

[그럼요. 그 사람 천재잖아요.]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가 공개된 지 12시간 후. 인터넷은 벌써 광고에 대한 얘기로 시끄러워져 있었다.

[내가 본 광고 중 가장 멋진 광고야!]

[또 CK야?]

[오. <오징어 서바이벌>을 이길 수 있을까?]

그간 한록이 걸어온 길에 모든 걸 건 마케팅. 이 마케팅이 과연 관객들에게 와 닿았을까. 과연 관객들은 한록의 영화와 마케팅을 기억하고, 영화관으로 나와 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더 이상 자신이 할 건 없었다.

이제는 관객의 선택을 기다릴 때였다.

**

[케이트. CK에서 또 시사회에 참여해달라고 연락이 왔는데요.]

[거절하세요.]

[팀장님. 영화 개봉하자마자 보러갈게요. -최과장]

“서감독.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보러갈 거지?”

“네. 첫날 보러갈 겁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개봉으로 떠들썩해진 영화계. 한국, 미국, 유럽, 아시아...지역을 가릴 것 없이 모든 나라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개봉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 속에...

“형.”

“응.”

“가자.”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개봉날이 다가왔다.

**

2월 14일. 뉴욕의 스크린 MAX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첫 개봉을 진행했다.

CK와 한록이 그간의 커리어를 걸고 준비한 영화. 그 소식에 스크린 MAX관은 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한록. 인터뷰 가능할까요?]

[여기 좀 봐주세요! 여기요!]

[잠시만요. 잠깐이면 돼요!]

“어, 형! 여기!”

“오랜만이네요, 팀장님.”

개봉을 지켜보기 위해 상영관에 나타난 한록. 그리고 한록이 나타나자 취재를 위해 따라붙는 기자들. 한록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영화관의 로비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록이 찾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차장님. 케이트는요?”

“안 왔어.”

케이트가 끝까지 초대를 거부한 것이었다.

“영화가 좋은 건 알겠는데, 어느 정도 반응이 나오면 그때 오겠다고 하더라고.”

역시나, CK와 약간의 거리를 두기로 결정한 케이트. 그렇다고 해서 시사회 초대가 아닌 첫 개봉마저 거절할 줄은 몰랐다. 한록이 아쉬운 마음에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전화해볼까?’

“이팀장. 30분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개봉직전. 지금 케이트를 부른다고 해도 어차피 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초대하면 돼.’

한록이 마음을 다잡고 현차장에게 말했다.

“네, 들어가겠습니다.”

<무비타임>의 기사가 늦어질수록 그 효과는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록이라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쉽네.’

다만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가장 아끼는 영화에 일어난 게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엔 꼭...’

“이팀장. 들어가자.”

“네.”

그렇게 한록이 미련을 뒤로하고 상영관에 들어가려 할 때. 이 장대한 끝에 아주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려 할 때. 그때.

“팀장님.”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그러나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한록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최과장님.”

최과장이 있었다.

**

갑작스럽게 상영관에 나타난 최과장. 그리고, 그 옆의...

[결국 여기에 오게 됐네요.]

케이트.

“어떻게 여길...”

케이트. 그리고 최과장. [제가 ENM으로 옮기고, 정식으로 요청을 넣어야 오실 것 같은데.] 최과장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한록이 깜짝 놀라 둘을 바라보았고, 그런 한록을 본 최과장이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내 흔들었다. [최윤일 과장]. 그 사원증 밑에 쓰인 이름은.

[CK ENM]

ENM이었다.

“복귀를 당겼어요.”

최과장의 말에 한록의 얼굴이 굳었다. 최과장은 한록을 돕기 위해 빠른 복귀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승진과 사후처리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고마움보다 앞서는 걱정에 한록이 입을 열었다.

“과장님. 일단 제당쪽과 다시 얘기를...”

“괜찮아요.”

그리고 최과장은-

“도우러 온다고 했잖아요, 친구.”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모든 걱정을 날려버리는 최과장의 말.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맙다, 친구야.”

활짝 웃으며 최과장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2월 14일. 한록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그리고 한록에게 또 한명의 친구가 생긴 날이었다.

**

상영관에 입장한 한록. 닉, 제롬, 서감독. 윤감독과 영도. 최과장. 케이트. 하정엽과 최경준. 그리고 해외팀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한록은 1열의 맨 가운데에 앉았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 관객들이 상영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너무 기대 돼!]

[스크린 MAX관? 이건 뭐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향한 사람들. 그 사람들로 인해 객석은 한자리도 빠짐없이 매진이었다.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 자기 자리에 착석했고, 한록은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 15년을 준비해오던 영화를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록아. 고생 많았다.”

임감독의 말을 들으며, 한록이 눈을 감았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제공: CK ENM>

<감독: 임성우>

<제작: 이한록>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시작되었다.

**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리액션이 많은 미국의 상영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그 침묵 속에 한록은 미칠 듯한 긴장을 느꼈다. 15년간 준비한 영화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영화가. 자신의 꿈이. 사람들에게 선보여지고 있다. 지금 당신들은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과연 이 영화를 사랑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영화의 엔딩장면이 시작되었다.

힘든 하루를 보낸 주인공이 의자에 앉아있고, 그 곁에는 주인공이 사랑한 등장인물들이 앉아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라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메시지.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나는가 싶더니...

[와, 이게 뭐지?]

영화관 정면의 스크린이 양쪽 벽면까지 확장되었다.

벽면에 나타난 스크린에 깜짝 놀라 주위를 바라보는 관객들. 스크린 MAX관의 등장이었다.

그때, 벽면의 스크린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크린 속 등장인물들은 영화관의 객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들이 관객들의 옆에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 그리고 그들의 곁에 앉은 등장인물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엔딩장면이었다.

[우와!]

[옆에 봐봐.]

옆으로 확장된 스크린을 보며 얘기를 나누는 관객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한록은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나의 꿈은 성공했을까.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도저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임감독이 한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한록아. 뒤를 봐.”

이 일의 결말을 알리는, 임감독의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한록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멋지다!]

[올해 최고의 영화야!]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

“우리가 해냈어.”

그 먹먹한 광경에 임감독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한록의 눈에는 다른 장면이 보이고 있었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곁에 앉아있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캐릭터들. 아주 따뜻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지치고 지친 우리들에게, 나는 언제나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처럼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동료들.

수많은 사건과 추억들. 함께 그 시간들을 거쳐 온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영화 밖에 없던 삶.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는지를. 왜 아픔을 겪었고, 후회를 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드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지를.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걸 알기 위해서였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한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눈이 아플 정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와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한록은 생각했다. 오늘을 잊지 말자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면 오늘을 떠올리자고. 그렇게. 평생.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자고.

귓가를 울리는 사람들의 박수 속.

그 속에서, 또 하나의 꿈이 생겨났다.

**

스크린 MAX. 그리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첫 개봉.

그 결과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칸 영화제 대상 수상 유력.]

완벽한 성공이었다.

신문에서 쏟아지는 기사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 그 것들을 지켜보며, 한록은 호텔 방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자신의 손목에 묶인 수많은 실.

이 실들 덕분에 기회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을 얻었다.

“고마워.”

한록은 그런 생각에 이 실을 선물해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

손목의 실이 사라졌다.

한록의 꿈이 이뤄진 날. 마치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 사라진 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사라진 실. 그 대신 생긴 수많은 인연.

앞으로는 이 실 대신 자신의 사람들이 한록을 지켜주리란 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한록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 꿈이 이뤄진 오늘. 실이 사라지고, 대신 사람들이 곁에 남은 오늘.

기분 좋은 날이면 늘 그러하듯, 오늘은 특히...

‘...영화나 볼까.’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개봉.

그리고...그로부터 5년 후.

[<바람의 꿈>이 이번에도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기록을 깨지 못했습니다.]

[3대 영화제 모든 곳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는 오로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뿐일 겁니다.]

[CK그룹이 재계 5위로 진입할 것 같다는 예상입니다.]

[‘필름 포럼’이 해체되었습니다. 개설 이후 45년만입니다.]

[CK의 영화가 이번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습니다. 8번째 기록입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중 하나가 되었고, CK는 그 후로도 계속 성장해서 세계 최고의 영화사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헐리웃에 버금가는 영화시장이 되었다.

그 모든 일의 주역. 한록은...

[오늘. CK 무비의 이한록 사장이 취임식을 진행했습니다.]

CK그룹의 영화전문회사, CK 무비의 사장이 되었다.

“이번에 이한록 공로상 받을 것 같다더라.”

“그럴만하지. 지금 한국영화 만든 건 이한록이니까.”

“아니, 한국 말고 헐리웃에서. 거기서도 엄청 존경한대.”

“이제 아주 위인이구만, 위인.”

서른일곱. 한 회사의 사장이 되고, 영화계의 역사에 남게 된 한록. 사람들은 한록을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이번에 영화도 개봉하잖아.”

서감독은 한록과 한 약속을 지켰다.

“당연하지. 언제 개봉한다더라?”

“2월.”

“빨리 보고 싶네.”

영화계의 전설이자, 살아있는 신화. 모두가 한록의 영화가 개봉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 달 뒤. 뉴욕의 스크린 MAX관.

“본부장님! 이런 날 늦으시면 어떡해요!”

CK 무비의 김차장이 곁에 있던 사람을 나무랐다. 그러자 CK 무비의 마케팅 본부장이 땀을 흘리며 사과를 했다.

“미안, 미안. 서감독님 오셨어?”

“당연하죠! 안에 계세요.”

“우리도 들어가자.”

그리고 두 사람이 영화관 안으로 향했을 때.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한록과 안면이 있는 사람만 모은 이번 상영. 서감독. 윤감독. 스튜디오 B의 닉과 제롬, 알렉산드로. 이제는 부장에서 이사가 된 정이사. ENM이 사장이 된 최경준. 팀을 옮긴 영도. 하정엽. 그리고...최윤일 팀장.

“유선씨. 본부장님!”

최팀장이 밝은 목소리로 김차장, 아니 유선과 현주훈 본부장에게 인사를 건넸고, 둘은 얼른 최팀장의 곁에 가서 앉았다.

“사장님은?”

“곧 오신대요.”

현주훈 본부장의 말에 최팀장이 핸드폰을 보며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영화관의 문이 열리고, 모두가 기다리던 사람이 등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록이었다.

“사장님! 여기에요!”

“주인공이 늦으면 쓰나.”

한록을 반기는 유선. 그리고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는 최경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얼굴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고, 유선의 곁에 가서 앉았다.

“사장님. 왜 늦으신 거예요?”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때문에요. 아이디어가 생각이 나서...”

“우리 사장님. 몇 년이 흘러도 변하는 게 없어.”

한록의 말에 최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서감독이 심각한 얼굴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곧 영화가 시작되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넵. 죄송합니다.”

서감독의 제스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상이 시작되었고, 영화의 제목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목이 특이하군.”

그리고 최경준의 말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화면에 보인 것은 한록의 사무실. 그리고 텅 빈 의자.

그 의자에 한록이 걸어와 앉았고, 서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그 말에 화면 속의 한록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CK 무비의 사장. 천재 마케터. 영화계의 거물. 그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가. 나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그 말에 어울리는 대답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이름은 이한록.]

나는.

[서른 일곱. CK 무비의 사장이고, 마케팅 전문가입니다.]

회사 때문에 울고. 웃고. 화내고. 싸우고. 좌절하고. 선을 넘고. 내일이 오는 걸 두려워하고. 몇 번이나 사표를 생각하고. 당장이라도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럼에도 오늘도 출근을 하는.

나는...

[회사원입니다.]

자랑스러운 회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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