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53화 (215/263)

그러니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완성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한록은 해외팀 사람들과 함께 시사회를 가졌다.

영화에 대한,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네 명의 남녀였다. 가정불화를 겪고 있는 소년. 회사를 다니는 젊은 여성. 은퇴를 앞두고 있는 중년의 가장.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70대 할머니.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갔고, 슬픔을 겪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영화관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삶에 지쳤을 때.

[아빠, 어디야. 왜 연락이 안 돼?]

그럴 때...

“어, 아저씨.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그들이 사랑했던 등장인물들이 그들을 찾아왔다.

“...영화표?”

영화표 한 장을 들고.

등장인물들이 내민 영화표에, 좌절에 빠져있던 주인공들은 마지막으로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놀라울 정도로 좋은 일만 있었다. 영화 시간에 늦지 않도록 버스를 기다려준 기사.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차를 기다려주던 운전자. 무료로 증정되는 팝콘. 그렇게 작은 행운들을 가지고 도착한 곳에는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옛날 영화가 걸려있었다.

주인공들은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영화에서는...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오늘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영화 시간에 늦지 않도록 버스를 기다려준 기사.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차를 기다려주던 운전자. 팝콘을 주던 아르바이트생. 영화표를 준 소년. 그들이 그렇게나 사랑했던 영화 속의 인물들. 삶에 지쳐 이제는 얼굴마저 잊어버렸던 아름다운 기억들.

하지만 몇 번이고 나를 살게 했던 것들.

오늘 경험한 작은 기적에 주인공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왜, 왜 포기하고 싶었던 걸까.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왜 계속 잊어버리는 걸까.

삶에는 아직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들이 남아있는데.

영화를 모두 관람한 주인공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음이 무너지는 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영화를 본 사람은...

[지금 집에 갈게.]

한 번 더 하루를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것에 위로받았던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모든 게 끝난 후 엔딩 크레딧에서는 주인공의 곁에 등장인물들이 앉아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시사회실에는 침묵과 조용한 훌쩍거림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 침묵에서 느껴지는 진심. 각자의 삶을 떠올리며 아직도 의자에 앉아있는 팀원들과, 눈물을 닦는 사람들.

그 모습에 한록은 가슴 속에 차오르는 따뜻함을 느꼈다. 15년을 기다려온 영화. 그 꿈이, 이 영화가.

“좋은 영화다, 이팀장.”

이제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

시사회를 끝낸 한록은 임감독과의 만남을 가졌다.

“광고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보다는 CK에게 집중할 거야. 매출보다는 작품성으로 홍보할 거고. 최대한 오래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화가 되게 하는 게 목표야.”

앞으로의 일들과,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마케팅에 대해 설명해주는 한록. 한참이나 일 얘기를 하던 한록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임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 한록이 가장 하고 싶던 얘기를 꺼냈다.

모두가 했던 말. 그리고 임감독에게 해주고 싶던 말.

“형. 이건 좋은 영화야. 내가 꼭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성공시킬게. 그러니까...”

그리고 이어질 부탁.

“형은 앞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어줘.”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한록아. 걱정하지 마.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영화를 만들 거야.”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너랑 약속했잖아.”

애정과 고마움이 담긴 말이었다.

임감독의 말을 들으며, 한록은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 사람들. 약속된 미래. 임감독은 이제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록의 곁에 있을 것이었다.

기나긴 어둠속. 우리는 이제 답을 찾았다.

그러니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뉴욕에서 전해져온 소식.

“팀장님. 뉴욕에 CK MAX관 테스트 끝났습니다.”

한록이 아주 오랫동안 진행해오던 프로젝트. CK MAX관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상영관 앞부분만이 아니라, 양옆과 뒷부분까지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CK MAX관. 관객들은 사방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게 된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는 이 영화관의 첫 상영작품은 역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CK MAX관에 맞게 편집하고 있습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벽이랑 뒷면까지 활용할 장면이 있나? 블록버스터도 아니잖아.”

“본편은 그냥 진행하고, 엔딩 크레딧만 양쪽 벽까지 장면을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벽면이 필요한 장면이 있어서요.”

“아, 그래.”

본편은 평범한 영화처럼 앞의 스크린만 사용하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변화를 주기로 결정한 한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객석이 있는 양쪽 벽면까지 장면이 확대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모든게 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부장님. MAX관 건설 쪽에서 안전점검 날짜 못 맞출 것 같다는데요?”

회사 일이란 게 늘 그렇듯, 어김없이 일정이 틀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된다며?”

“이번에 비가 많이 왔잖아요. 그래서 점검 일정들이 2주씩 밀렸대요.”

“하...알았어. 이한록한테 얘기할게.”

천재지변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현차장의 말에 정부장이 탐탁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현차장이 말했다.

“이팀장 안 그래도 바쁜데 건드리지 말죠? 이거 제 선에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끝내려고?”

“다른 영화관이랑 일정 좀 바꿔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우리 전 차례가 AM씨어터니까, 얘기해보면 될 것 같은데요?”

정부장의 말에 자신있게 답하는 현차장. 그 말에 정부장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AM이 양보해줄 것 같냐?”

“지금 CK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회사는 없을걸요.”

“확실한 거 아니잖아.”

“정 안되면, AM씨어터 상영관 좀 늘려주면 되죠. 그럼 좋다고 할 겁니다. 이건 확실해요.”

“네가 쇼부 볼 수 있겠냐?”

“네. AM 담당자랑 몇 번 얘기해봤어요.”

현차장은 정부장의 질문에 몇 번이나 막힘없이 대답했다. 현차장의 말에 정부장이 조금 생각하다가...

“그래. 네가 가져가라.”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건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

“부장님?”

‘자신이 책임지겠다.’ 현차장의 말에 정부장은 답이 없었다. 그저 현차장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정부장이 말했다.

“너 많이 변한 거 아냐?”

“무슨...”

“네 입에서 책임지겠단 말 보는 거 처음이다.”

그리고.

“이제는 널 믿을 수 있겠다.”

드디어, 현차장을 인정했다.

정부장의 말에 현차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부장님도 그런 말씀 하시는 거 보면 많이 변한 거 아시죠?”

성장한 것은 현차장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부하들을 믿지 못하던 정부장. 그가 보여준 신뢰와 변화. 현차장의 말에 정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부장. 현차장. 그 둘만이 아니었다. 이 팀의 모두가 변했다. 바뀐 사람. 바뀐 관계. 달라질 미래. 그런 것들을 생각하던 정부장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절박한 각오와 절망을 안고 출근을 하던 이 곳.

“...그래. 나도 변했지.”

이곳이 대체 언제부터 편안하게 느껴졌던 걸까?

**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제작이 끝났고, 마케팅도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차장님. 케이트가 뭐라고 하나요?”

“안 된대.”

바로 케이트의 섭외였다.

영화전문 월간지 ‘무비 타임’을 새로 출범시킨 케이트. ‘무비 타임’은 타임지가 그렇듯, 그 달의 기사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을 뽑아 표지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여태까지 표지는 1호의 한록을 비롯해 전부 인물이나 단체였고, 영화가 선정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무비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을게 분명한 상황. 한록은 케이트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관람하기만 한다면 이를 표지모델로 선정하리란 것을 확신했다.

-되도록 빨리 표지에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영화에 힘이 될 거야.

그렇기에 한록은 케이트를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첫 개봉 시사회에 초대했다. 그러나 케이트는 이를 거절했다.

“지금 케이트랑 우리가 지나치게 사이가 좋으니까. 특혜 의혹을 받지 않도록 조율이 필요한 시기래.”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합리적인 이유로 한록의 제안을 거절한 케이트. 현차장은 케이트의 거절이 많이 아쉬운 듯 했다.

“최과장이 케이트 제자잖아. 최과장을 통해서 얘기를 넣어보면 될 것 같은데.”

“이미 거절당한 일입니다. 한 번 더 연락하면 최과장님도, 케이트도 곤란할 거예요.”

그러나 한록은 여기서 마음을 접었다. 한록 역시 아쉽긴 했지만, 케이트와는 되도록 오래 인연을 가져가야했다. 뿐만 아니라 최과장은 이직 전 마지막 정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죠. 이 부분은 일단 포기합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한록.

하지만 한록의 마음과 달리,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팀장님. 얘기 들었어요.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던데.]

며칠 후, 최과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최과장은 케이트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케이트를 데려올 수는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냥 오시진 않을 거예요. 워낙 공과 사가 철저하신 분이라서. 제가 ENM으로 옮기고, 정식으로 요청을 넣어야 오실 것 같은데. ENM으로 복귀 시기를 좀 당겨볼게요.]

케이트를 데려오기 위해 복귀 시기를 당기겠다는 최과장.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부장으로 진급하기 전 ENM으로 돌아오는 게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지금 최과장이 맡고 있는 일들 역시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하는 상황.

“아닙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원할 때 돌아오세요.”

[정말 괜찮겠어요?]

최과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한록이 작게 웃었다. 부하의 걱정을 듣다니. 팀장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네. 괜찮아요.”

[정말이죠?]

“못 믿으시는군요. 걱정을 좀 덜어드릴 말을 해야겠네요.”

[뭘 하시려고?]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 이한록입니다.”

[하하!]

언제 들어도 든든한 한록의 말에 이번엔 최과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꿈. 함께 보내온 시간. 쌓아온 추억.

[팀장님.]

[네.]

[저도 그 영화 보고 싶어요.]

그리고 우정 같은 것들.

최과장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팀장님.]

자신의 친구에게 하는 말이었다.

**

마케팅. 영화...모든 준비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끝났다. 아니, 빨리는 아니었다. 한록이 15년 동안 준비해오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1월의 어느 날.

“...그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가 공개되는 날이 다가왔다.

‘시작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한록은 옥상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료들의 배신과 회귀. 그리고 두 번째 삶에서 만난 인연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꿈이었던 영화를 만들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직전이었다.

‘이 일의 끝이 어떻게 될까.’

결말을 알 수 없는 영화. 그 영화는 과연 이번에도 해피엔딩일까.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옥상 문을 열고 누군가가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팀장님! 곧 광고 공개됩니다!”

유선이었다.

“고마워요. 같이 내려가요.”

“네!”

한록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유선. 광고는 만들어졌지만, 아직은 해야할 일들이 남아있었다. 한록이 유선에게 말했다.

“언론들한테 연락 넣어주세요.”

“이미 넣었습니다!”

“타임지한테는 우선으로 넣어야 해요. 연락이 온 뒤에 다른 기자들한테 넣어야하고.”

“팀장님.”

한록의 말에 유선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록한테 말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록이 시키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할 일을 마친 유선. 몰라보게 성장한 유선의 모습에 한록은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선은 이미 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부하가 되어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멀리 해외팀 사무실이 보였다. 커다란 스크린에 광고를 띄워두고 한록을 기다리는 사람들. 현차장. 정부장. 하대리. 송과장... 자신을 기다리는, 자신의 팀원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한 사람들. 그들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결과는 알 수 없다.’

이 영화의 끝이 어떻게 될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하지만, 이제는 엔딩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몇 번 실패하고, 더 많이 좌절하더라도,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이제 길을 찾았으니까.’

이제는 실패와 좌절에 꺾이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사람들 사이로 다가갔다.

“이팀장! 시작한다!”

TV화면에서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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