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52화 (214/263)

15년을 기다려온 소식.

40층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그간 CK가 일궈온 것들. 하태준은 하정엽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회사를 이끌어 갈 자신의 아들에게 몇 가지 충고를 건넸다.

“언제나 해외시장 개척을 목표로 해라. 정계와는 긴밀하게 지내되, 그쪽으로 진출할 생각은 하지 마라. CK의 핵심은 제당이다. 그걸 잊지 마라.”

하정엽이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이한록 그 놈은 끝까지 데리고 가라.”

앞으로 하정엽을 지켜줄 충고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애정이 느껴지는 조언에 하정엽이 짧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런 하정엽을 보며, 하태준은 그 눈에서 야망을 읽었다.

“이제는 제가 CK를 이끌겠습니다.”

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 같은 모습이었다.

**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저녁 10시. 한록의 핸드폰이 울렸다. 하정엽이었다.

[지금 나올 수 있습니까.]

평소 업무 시간 외에는 연락을 하지 않는 하정엽. 그가 늦은 시간에 따로 연락을 한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은 바로 집을 나섰다.

하정엽이 부른 곳은 강남의 한 술집이었다. 최고급 술집에는 하정엽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정엽과 술자리를 한 것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의 일이었다. 늦은 시간의 호출에, 단 둘이 술자리라니. 하정엽은 오늘 아주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회장님께 승계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리고 한록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재벌 총수가 탄생하는 순간. 그걸 지금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승계를 약속받자마자 자신을 불렀다. 한록은 밀려오는 짜릿함을 억누르고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네.”

하정엽은 별다른 말 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몇 번 술잔을 비우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하정엽에게 듣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건 이한록 팀장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무게가 다른 말이었다.

“제가 아니라 사장님께서...”

“당연히 내가 노력했죠.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바꿔준 건 당신입니다. 회장님도 알고 계십니다.”

하정엽이 한록의 말을 자르고 답했다. 하정엽의 너무나 확고한 대답에 한록이 그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해오던 말을 꺼냈다.

“사장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뭡니까.”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 얘기라. 이한록 팀장답군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하정엽. 그러나 표정만은 온화했다. 하정엽의 허락에 한록이 입을 열었다.

“이번 영화는 절대 <오징어 서바이벌>만큼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상관 없습니다. 소규모 영화에 매출을 바라진 않습니다.”

“대신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니 수상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사장님께 영향이 가지 않게...”

“상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한록의 말을 잘랐다.

혹시나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승계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하고 있던 한록. 그러나 하정엽은 이미 한록의 걱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성적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진행하세요. 이한록 팀장이 원하던 영화 아닙니까.”

자신을 이 자리에 오게 만들어준 사람. 그에 대한 하정엽의 보답.

하정엽의 마음을 눈치 챈 한록이 술잔을 바라보았다. 하정엽에게 몇 번이나 들었던 ‘고맙다’는 말. 하지만 그 말을 해야 할 건 자신일지도 몰랐다. 대체 어느 회사의 사장이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겠는가.

“앞으로도 눈치 보지 말고 하고싶은 건 해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하정엽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젊은 사장의 야심, 그리고 즐거움이 보이는 말. 그 말에 한록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네, 꼭 그러겠습니다.”

이 사람과의 미래를.

**

한록과 하정엽이 술을 마시는 시간. 하태준은 최경준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정엽이 이 자리를 물려받을 거다.”

자신의 책상에 놓은 회장 명패를 보고 말하는 하태준. 이미 짐작한 얘기에 최경준은 잠자코 하태준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하태준은 많은 것이 담긴 눈으로 자신의 명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의 재벌그룹, CK의 회장. 그러나 그도 이루지 못했던 헐리웃이라는 꿈.

“그 녀석들이 내 꿈을 이뤄줬다.”

그 꿈이 자신의 아들과 젊은 직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이제는 이 녀석들에게 뒤를 맡길 수 있겠다고.

“나는 승계와 신사업만 끝나면 물러날 거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끝이란 건 항상 슬프지. 그렇지 않아?”

하태준이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하태준의 세월이 담긴 말에, 최경준이...

“죄송하지만, 저는 언제나 현역일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하!”

최경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하태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최경준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사장님과 이한록을 도와줄 어른이 한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최경준의 말에 하태준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란 언제나 슬픈 것. 하지만 그럼에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제 너희들에게 맡기지.”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

“CK, 차남이 물려받는다더라.”

“뭐? 진짜?”

“어. 다음 달에 기사 나온대.”

하정엽의 승계가 확정된 CK. CK그룹은 승계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걸 위해 또 한 번의 조직개편이 있었고...

“이한록 팀장. 최과장이 돌아올 것 같군.”

최과장의 복귀가 확정되었다.

“네. 저한테 미리 연락을 하셨습니다.”

하태준과의 면담 직후 한록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올 것을 알린 최과장. 최과장은 부장으로 승진한 후, ENM에서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마무리 되면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되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네요.]

한록과의 전화 중 최과장이 했던 말이었다. 그건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돌아온다. 기쁜 일이었고, 동시에 최과장에게 발전한 해외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팀장님. 임감독님 오셨습니다.”

“네.”

바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잘 끝내는 것. 그리고 오늘 한록은 임감독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할 예정이었다. 바로-

“형.”

“어?”

“촬영 한 달만 중단하자.”

촬영 중단을 알리는 것이었다.

**

“촬영을 중단하자고? 왜?”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혹시나 영화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록이 촬영 중단을 알린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를 옴니버스식으로 바꾸자.”

바로 영화 편집에 변화를 주기 위해.

옴니버스. 같은 주제를 담은 짧은 스토리 여러 개를 모은 작품으로, 영화 <러브 액츄얼리> 같은 구조를 뜻했다.

“옴니버스? 갑자기?”

“응.”

한 소년이 영화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일을 담은 영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건 한록의 이야기인 동시에 영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얘기였다. 그리고 한록은 <오징어 서바이벌>을 진행하며, 사람들이 영화에 흠뻑 빠지는 것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스토리를 나누고, 조연 캐릭터들을 전부 주인공으로 바꾸자.”

바로 이 사람들 모두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형도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러면 등장인물 전부가 주인공인게 나을 것 같아.”

“옴니버스로 바꾸면 얘기가 분산되잖아. 굳이 그걸 감수해야 하나?”

“애초에 지금 스토리 자체가 복잡해. 나누는 게 나아.”

“그래도 지금 바꾸라는 게 말이 돼? 지금 촬영 거의 끝났어.”

“추가 장면 조금만 바꾸면 돼. 그리고 형이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추가 장면 조금이라니. 네가 촬영하는 거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잠깐만, 형.”

한록의 말에 강하게 반발하는 임감독. 임감독은 여차하면 한록과 한판 붙으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러나 심각한 분위기와 달리 한록의 얼굴엔 약간의 미소와 반가움이 걸려 있었다. 한록이 노트를 가져와 임감독에게 건넸다.

“여기. 이렇게 바꿔보면 어때?”

이미 촬영된 분량과 시나리오를 점검해 영화를 옴니버스로 바꿀 시안을 가져온 한록. 임감독이 한록의 노트를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임감독의 표정은 노트를 넘기며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의심. 거부감. 놀라움. 호기심. 감동...한록은 그 표정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임감독이 내용을 모두 읽었는지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이거 좋다!”

아주 밝은 대답이었다.

“좋아. 스토리 분기점마다 나누고, 각 편 엔딩이 다음편 오프닝이랑 이어지게 하고. 이러면 추가 촬영 거의 없겠네.”

“내가 말했잖아.”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지.”

임감독은 언제 따지고 들었냐는 듯 신이 나서 한록과 얘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싸우다가도, 또 금방 서로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는 사이. 아무런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오로지 ‘좋은 영화’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사이.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그게 임감독과 한록이 보내온 시간과 신뢰였다.

“그걸 지금 알았어?”

임감독의 말에 한록이 작게 웃었다. 한록은 임감독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했을 때부터 이미 그 감정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임감독과 한록의 첫 만남. 함께 만들던 첫 영화. 그때로부터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다. 많은 것이 변했다.

“우린 아직도 영화 얘기를 하고 있고.”

하지만 둘은 언제나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이. 그래서 소중한 것들. 그런 것을 느끼며 한록이 말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

그렇게, 옴니버스로 바뀐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한 달 가량의 정비기간이 끝나고 임감독은 다시 제작에 돌입했다.

“옴니버스라. 좋은 선택이군.”

다행히 최경준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옴니버스로의 전환에 크게 동의했다.

“이팀장. 이러다 정말 제작자로 돌아서는 건 아니겠지?”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면,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던 것 정도일까. 현차장의 말에 한록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회사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정도는 한록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제작이 아무리 재밌어도, 한록의 본업은 따로 있었다.

“회의 시작할까요.”

“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마케팅 초안입니다.”

바로 마케팅.

“이번 마케팅 규모는 작게 갈 겁니다. 영화가 소규모인데 마케팅이 거창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이번에는 관객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수상과 평가에 집중할 겁니다.”

자신의 본업. 그리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분야. 그 분야에서 한록이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뭘 준비했냐하면...

“광고를 하나 내보낼 겁니다.”

광고였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은 소규모 영화니까요. 이 영화만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광고를 진행해 보려 합니다.”

한록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구상한 광고를 말하기 시작했다. 해외팀 사람들이 아주 주의 깊게 그 얘기를 들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자 머릿속에서 한록이 말한 광고를 그려보았다. 그때 정부장이 말했다.

“이거 진짜 괜찮을 것 같냐?”

한록이 말한 ‘조금 다른 방식’. 그건 여태까지 CK가 관객에게 쌓아온 신뢰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그 성과를 확신할 수 없는 광고. 원칙주의자인 정부장은 그 부분에 의문이 생긴 것이었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네.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그간 제대로 영화를 보여줬다면요.”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간 CK가 선보인 영화들. 한록이 해온 일들. 그것들이 과연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답을 해보자면...

“괜찮을 것 같다.”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이대로 가자.”

정부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

CK의 승계 작업.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마케팅 기획. 그렇게 바쁜 시간이 흐르고 몇 달 후. 한록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성우형>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한록은 깨달았다. 이 전화가 어떤 용건을 가지고 있는지. 임감독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운명처럼 알 수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편집 끝났다.]

15년을 기다려온 소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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