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51화 (213/263)

요즘 젊은 놈들.

[한록!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한록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윌리엄.

[필름 포럼 가입을 원한다고 한 건 CK 아닙니까?]

[우리를 기만한 겁니다!]

윌리엄만이 아니라 빅6 대부분이 한록에게 삿대질을 하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록은 모두를 무시했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필름포럼은 너무 폐쇄적이고, 절대 모든 영화사들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CK와 스튜디오B는 전 세계 영화사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윌리엄이 곁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더니 발언을 시작했다. 윌리엄은 이제 한록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필름포럼의 가치는 이곳에서 결정된 내용이 정부와 의회로 전달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신생 단체에, 그것도 외국 회사가 대표인 곳을 정부가 인가 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적나라할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윌리엄의 말.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윌리엄 역시 앞뒤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윌리엄의 말에 한록은-

[이미 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의회와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준비된 답을 내놓았다.

[뭐, 뭐라고?]

[지금 의회라고 한 겁니까?]

[어떻게...?]

그 말에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건 윌리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불가능-]

그리고 그 순간, 윌리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오늘 회의 시작 전, 한록과 한참이나 얘기를 주고받던 케이트. 그리고 타임지가 새로 런칭 예정이라는 영화 전문 잡지 ‘무비 타임’. 한동안 타임지에 등장하던 CK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들...

‘손을 잡았다.’

상황은 뻔했다. 세계 최고의 언론 중 하나인 타임지가 CK를 정부와 의회에 연결해주었다. 그리고 헐리웃의 대부 제롬 앤더슨이 CK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CK. 타임지. 그리고 스튜디오B의 동맹. 그 대가로 타임지는 CK와 스튜디오B라는 막강한 정보원을 얻었고, CK와 스튜디오B는 정부에 대한 협상력을 얻었다.

절대 깨뜨릴 수 없는 막강한 동맹의 등장에 윌리엄이 경악했을 때. 한록이 그를 보며 말했다.

[빅6는 헐리웃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영화사들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곧 CK가 그간 필름포럼에서 겪었던 일들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 기사가 어디에 실릴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새롭게 태어날 단체는 이런 식으로 다른 기업, 그리고 다른 나라를 배척하지 않을 겁니다. 가입을 원하는 회원 있으십니까.]

필름포럼에서 새로운 단체의 탄생을 알린다. 누가 봐도 새로운 단체를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에...

[퀸 엔터테인먼트 가입하겠습니다.]

[재팬 프로덕션 가입합니다.]

[로마 필름 가입하겠습니다.]

수많은 협의회 회원들이 손을 들었다.

그간 빅6에 의해 피해를 봐왔던 기업들. 최경준이 그들을 설득해 준비해온 장면.

[찍어! 특종이다!]

기자들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터지는 플래쉬와 손을 든 기업들.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이 곳의 중심이자,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될 사람. 한록.

사람들 사이에 선 한록을 바라보며, 윌리엄은 직감했다.

‘끝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것이 필름포럼의 종말이란 것을.

**

그날 저녁, 뉴욕의 한 레스토랑. 필름포럼에서 공개된 소식은 곧장 뉴스가 되어 퍼져나갔다. 제롬은 석간 신문을 보며 만족스러운 기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제롬의 앞자리에 앉았다.

[제롬.]

한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록과 함께 모든 일을 꾸며온 제롬. ‘어떻게 필름포럼을 무너뜨릴 것인가.’ 둘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왔고, 긴밀히 협조해왔다. 스튜디오B는 정말로 CK의 최고의 파트너였다.

[감사합니다. 제롬이 없었으면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매끄럽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서 가장 의견이 갈린 문제는 이것이었다. ‘누가 새로운 단체의 회장이 될 것인가.’

앞으로 헐리웃의 왕좌를 차지할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얘기. CK와 스튜디오B 모두 서로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린다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군요.

자칫 잘못하면 그간 둘이 노력해온 모든 일이 끝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오징어 서바이벌>의 마지막 마케팅이 공개된 날, 제롬이 한록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회장은 CK에게 넘기겠습니다. 지금은 그게 가장 파급력이 좋겠군요.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동시에 큰 결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롬은 뭐가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었다. 제롬의 협조로 인해 모든 일은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내일 CK가 새 단체의 회장이란 발표가 나갈 겁니다. 그리고 한록은 새 시대를 만들어가겠죠.]

제롬의 말에 한록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오랜 싸움 끝에 패배를 인정했고, 자신의 자리를 한록에게 양보했다. 최정상에 있는 사람이 결정하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더 큰 미래를 위해.

[다시는 빅6가 다른 영화사들을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영화계를 위해.

자신의 오랜 적수. 그리고 존경스러운 남자. 왜 모두가 이 사람을 존경하고, 왜 이 사람이 헐리웃을 대표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롬의 말을 듣고 있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제롬. 당신은 헐리웃의 대부가 맞습니다.]

한록의 말에 제롬이 미소 지었다. 당장 자신의 명예보다는 영화계의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남자의 미소였다. 제롬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잊고 있는 게 있군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회장은 임기제입니다.]

그 말에 한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제롬 앤더슨은 헐리웃 최강의 남자였고, 절대로 먼저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헐리웃이 끝나는 날까지 변치 않을 것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만들어 나가게 될 영화계. 그곳엔 언제나 이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네. 다음 회장은 누가 될지 궁금하네요.]

새로운 시대가 두렵지 않았다.

**

CK와 스튜디오B가 필름포럼을 대체할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영화계의 격변은 뉴스와 방송을 통해 미친 듯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록은...

[무비 타임 1호: 세계 영화 협회 대표 이한록]

타임지의 영화전문 잡지, ‘무비타임’의 1호 표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타임지의 표지 모델. 이제 그 표지 인물들 중 하나가 된 한록.

[이한록: 그간 헐리웃은 지나치게 폐쇄적이었으며, 이는 필름포럼 때문이었습니다. 필름포럼은 헐리웃의 발전을 돕는 게 아니라 새로운 회사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CK 역시 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록은 케이트와 약속했던대로 그간 빅6와 있었던 일을 폭로했다.

[이한록: 세계 영화 협회는 전 세계의 영화시장과 함께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이미 아시아, 유럽의 많은 영화사가 세계 영화 협회에 가입했습니다.]

거기에 새 단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까지.

<이러다 정말 CK가 영화 시장을 지배할 수도 있겠는데.>

<그걸 지금 알았어? 우린 이미 대비하고 있어.>

CK의 엄청난 약진에 불안해하는 기존 회사들. 그리고 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CK, 영화계의 패자를 꿈꾸다.]

어느 날 한국 신문에 쓰인 하나의 기사. 누군가 그 기사를 읽더니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젠장!”

집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정교수였다.

과거, 임감독의 시나리오를 훔쳐서 꿈을 접게 만든 정교수. 한록은 정교수에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그 뒤로 정교수는 계속 두려움에 떠는 중이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이 전 세계적으로 성공하자 정교수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는 거지?’

타임지 표지에 올라간 한록. 이제 영화계에서, 아니, 세계 연예계에서 한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록은 마음만 먹으면 정교수의 커리어를 끝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교수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본으로 가자. 해외에서도 상을 꽤 탔으니까,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설마 그것까지 막으려 들겠어?’

이미 영화계에서 한록의 입지는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다른 회사의 일에까지 개입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지금 해야할 일이 너무 많을 테니까. 정교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정교수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수님! 교수님에 대한 기사가 나갈 것 같아요!]

아는 기자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어떤 기사냐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불안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소식이라면 하나뿐이니까.

[교수님 시나리오가 전부 표절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어요.]

자신의 치부에 대한 것.

“누구야. 어떤 놈이야? 어디서 터뜨린대?”

정교수가 기자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은 샬롯테와 함께 고액의 제작비를 들인 신작이 개봉하기 직전이었다. ‘샬롯테도 개봉 전에 잡음이 생기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 같이 막아주겠지.’ 한국 신문. 동아 신문. 서울 신문. 어디든 상관없다. 알아내기만 하면-

[빅터요!]

“...누구?”

[미국의 빅터요!]

하지만 한록의 스케일은 고작 한국 정도가 아니었다.

기자의 말을 들은 정교수는 깨달았다 자신이 한록을 얕잡아봤다. 한록은 자신을 묻어버릴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법을 실행할 의지 역시 가지고 있었다.

[타임지에서 기사가 시작될 거래요. 이미 미국 기자들이 전부 준비하고 있어요!]

이제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교수님. 듣고 계세요? 교수님!]

최소한 이 지구상에서는.

**

[정교수: 이한록. 네가 언제까지 잘 나갈 것 같아?]

[정교수: 다시 잘 생각해봐. 임성우랑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야.]

[정교수: 팀장님. 일단 전화 좀 받아보세요.]

[정교수: 팀장님. 정교수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교수: 팀장님. 지금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정교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한록을 협박하더니, 어느새 비굴하게 사과를 하는 정교수. 그러나 때는 늦었다.

<정우택 감독의 신작영화, 개봉 취소 확정.>

이미 정교수의 영화는 개봉이 취소 되었고, 이로 인해 샬롯테에게도 큰 타격이 온 상황. 정교수가 이 일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형. 그냥 번호 차단해.”

임감독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한록. 한록이 곁에 있는 임감독에게 말했다. 정교수가 임감독에게도 비슷한 문자를 보낸 것인지, 임감독은 술을 마시는 내내 계속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야겠다.”

한록의 말처럼, 임감독이 정교수의 번호를 차단하더니 한록과 잔을 부딪혔다. 한록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와인을 음미했다. 강남 최고급 아파트에서 마시는 와인과, 적의 몰락이라는 안주. 이보다 더 완벽한 술자리는 없으리라.

“기분 좋네.”

마음이 들뜨는 건 임감독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한록과 조금 달랐다. 임감독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스토리, 내가 다시 영화로 만들 수 있으려나.”

뺏긴 스토리로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꿈을 포기하도록 만든 사람. 그 사람의 몰락보다, 아끼던 스토리를 다시 쓸 수 있음이 기쁘다는 임감독의 말. 그 말에 한록은 생각했다.

‘형은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동시에...

‘정말 영화를 사랑하고.’

임감독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깨달음에 미소를 지은 한록. 한록을 바라보던 임감독이 물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그냥이 어딨어.”

“여깄다, 왜.”

그러나 한록은 대답 대신 와인을 조금 더 마실 뿐이었다.

“진짜 뭔데!”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는 임감독. 그런 임감독의 모습에 한록이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 남자. 아주 오랫동안 보아온 소중한 친구.

“이한로옥!”

그 사람이, 분명...

‘형은 좋은 감독이 될 거야.’

아주 멋지게 성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오징어 서바이벌>이 영화관에서 내려간 지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했다. CK에는 매일 <오징어 서바이벌>과 협업을 하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회의를 하고 있는 해외팀. 회의실로 가던 현차장이 복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차장님. 오랜만이네요.”

현차장이 발견한 것은-

“최과장!”

아주 그리운 얼굴이었다.

“최과장이 여긴 무슨 일이야?”

“<오징어 서바이벌> IP 협업 때문에요. 출장 나왔습니다.”

“허어...이제 거래처로 만나게 됐네.”

“거래처보다는 뭐, 같은 밥 먹는 사이죠.”

“곧 승진할 거 같다며?”

“네. 좀 있으면 최부장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최과장이 하태준 회장의 직속으로 이동한지도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최과장은 이제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어디 가시던 길 아니에요?”

“아, 회의가 있어가지고. 이팀장도 회의실에 있네. 인사 한 번 하고 가지?”

“아니에요. 근무 중이시잖아요.”

“그래. 다음에 술 한 잔 해야지.”

“네. 연락 드릴게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둘 모두 일 때문에 바쁜 상황. 현차장은 회의실로 들어갔고, 최과장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는 해외팀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열띤 의견을 내놓는 현차장.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선. 손을 드는 정부장. 그리고...화이트 보드 앞의 한록.

그 모습에, 최과장은 아주 오랫동안 해오던 생각의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최과장이 그 길로 회장의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문자였다.

[오비서님. 계열 이동 때문에 연락드립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

그날 저녁. CK제당의 회장실. 최과장이 하태준의 앞에 서 있었다. [계열사 이동 신청서]. 최과장이 건넨 종이를 보던 하태준이 말했다.

“넌 욕심이 많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CK 그룹사 사장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꽤 오랜 시간 최과장을 지켜본 하태준. 하태준이 최과장을 마음에 들어 한 이유는 그의 능력과 젊음, 그리고 야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최과장은 회장의 총애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걸 지금 알았습니다.”

“그게 뭔데?”

최과장의 말에 하태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CK의 최고 엘리트 중 한명인 최과장. 그가 과연 더 높은 자리를 버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팀이요.”

최과장의 말에 하태준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팀이나 인간관계 때문에 회장의 손에서 벗어나겠다니. 누구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하태준은 알고 있었다. 최과장, 아니 요즘 젊은 놈들이 원하는게 과연 무엇인지를. 좋은 동료. 소속감. 책임감. 내 시간을 바칠만한 곳. 그러니까, ‘스스로 몸담고 싶은 곳.’ 그게 최과장이 원하는 회사였다.

“이런 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 영향을 받았죠. 아시다시피, 그분이요.”

최과장의 말에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하정엽을, 그리고 최과장을 변화시킨 사람.

“이한록 그놈 말이냐.”

“네, 맞습니다.”

한록이었다.

“이제 제가 어떤 회사를 다니고 싶은지 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하태준에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최과장. 아무래도 ‘요즘 녀석들’에게 중요한 건 재벌 회장이 아니라 존경할만한 상사인 모양이었다. 하태준으로서는 기가 찰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의 회사에 있다면. 그리고 이 회사를 이끌어 나가준다면.

그것도, 꽤...

“그래. 그 놈이 그렇게 마음에 든단 말이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젊은 놈들이란.”

하태준이 최과장의 신청서에 싸인을 해주며 말했다.

**

요즘 젊은 놈들. 바뀐 시대. 새로운 인물들. 그리고...미래.

그런 생각을 하던 하태준이 하정엽을 호출했다. 한 시간 후. 하정엽이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들을 보고 있던 하태준이 한참의 침묵 후에 말했다.

“따라 나와라.”

그리고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 가운데가 뚫린 구조로 인해 건물의 아랫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40층짜리 건물에서 각층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수많은 직원.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만들어낸 CK 그룹을 상징하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말했다.

“봐라.”

자신의 사람. 회사. 그룹.

“이제 네 회사다.”

그 모든 것을 물려줄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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