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47화 (209/263)

지금이다. 다음은 없다.

“이한록 팀장이 이렇게 나온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죠. 바라는 게 뭡니까.”

이미 해외팀 운영의 자율권을 부여받은 한록. 그런데 계약서의 3번 조항을 가져온다. 그건 정말 하정엽이 개입해야하는 큰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져온건 정말 ‘큰 것’이었으니까.

“회사의 존폐가 걸려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방해가 들어와도 저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하...”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뭘 생각하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들고 오는 직원. ‘대체 이 사람의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하정엽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정엽의 길고 긴 고민.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하정엽의 실이 하나 뻗어오더니 한록에게 다가왔다. 한록에게 이어질 듯 말 듯 몇 번이나 망설이는 하정엽의 실.

하정엽은 대답 대신 생각에 빠졌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오갔다. 하태준이 처음으로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이 순간.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지금. 하정엽의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이 순간...그리고 눈앞의 한록.

고민하던 하정엽이 눈을 뜨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한록은 더 이상 하정엽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하정엽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하정엽이 자신을 믿어주리란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 모습에 하정엽이 결정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의 설득이나, 대화는 필요없다. 이미 둘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상대가 되었으니까.

하정엽이 입을 열었고, 한록에게 말했다.

“믿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 순간 하정엽의 실이 한록의 손목에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완전히 묶인 하정엽의 실. 그리고 그 실에서 나오는 환한 빛. 실이 의미하는 것은 한록에 대한 하정엽의 신뢰, 그리고...

“이한록 팀장은 내가 가장 아끼는 직원이니까.”

그 이상의 애정이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

며칠 후 저녁 9시. 자신의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제롬. 그날도 신문에는 어김없이 CK와 스튜디오 B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제롬.]

한록이었다.

[기다렸습니다, 한.]

헐리웃을 뒤집어 놓은 두 사람이자, 시대의 라이벌이 된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은 온화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최경준 본부장이 준비하고 있는 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예. 필름포럼 이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빅6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헐리웃의 미래를 바꿀 은밀한 밀실 회의가 제롬의 사무실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순히 필름포럼에 가입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헐리웃을 뒤흔들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잘 되고 있습니다. <판도라>의 개봉은요?]

[2주 후입니다. 그 전에 알렉산드로와 닉이 토크쇼에 출연합니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알겠습니다. 최경준 본부장님께는 두 달 후까지 프로젝트를 마쳐달라고 말해놓겠습니다.]

[좋습니다.]

단 하나의 잡음도 없이 진행되는 회의. 한록과 손발이 척척 들어 맞는게 즐거운 모양인지, 제롬이 드물게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CK는 참 좋은 파트너입니다. 한이 있어서 좋군요.]

제롬의 말처럼, CK와 스튜디오 B는 사업적으로 뛰어난 파트너였다. 뿐만 아니라, 한록과 제롬 역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온 사람들이었다. 한록 역시 웃으며 제롬에게 진심을 얘기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제롬 덕분입니다. 항상 제롬이 제 편의를 봐주었죠.]

[CK와 한이 성공하길 바라니까요.]

[그건 저와 같군요. 이번 일과는 별개로, 언제나 스튜디오B가 성공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회사가 많아져야 시장이 성장하는 것 말입니다. CK는 그 대표적인 회사고요.]

한록이 진심으로 웃으며 제롬과 대화를 나누었다.

[감사합니다. 제롬. 스튜디오 B는 헐리웃 최고의 회사입니다.]

그리고, 웃음기를 싹 지우고...

[그리고 난 당신을 꺾고 최고가 될 겁니다.]

숨길 생각이 없는 또 하나의 진심을 얘기했다.

[내가 이래서 한을 좋아하죠. 멋진 자세입니다.]

한록의 도전장에 제롬이 즐거운 어투로 답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한테 덤비기에는 너무 이르지.]

서로를 존중하고, 또 인정하는 두 사람. 그렇기에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

[한. 전부를 걸고 덤비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부를 뺏길테니.]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롬.]

두 남자가 마지막 승부를 앞두고 서로에게 말했다.

**

한록이 나가고 난 후, 제롬의 사무실. 그곳에 닉이 찾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한이 왔었습니다.]

[한이라. 또 재밌는 얘기를 했나보군요.]

한록이란 말에 미소짓는 닉. 닉의 기분 좋은 미소를 보고 제롬이 물었다.

[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닉.]

[뛰어난 사람이죠. 왜 보스가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네요.]

제롬의 질문에 닉이 곧장 답했다.

[마케팅은 당연하고, 이제보니 연설도 잘하더군요. 거기에 판을 짜고 뒤집는 능력도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한록에 대해 길게 칭찬하는 닉. 한록은 인간적으로도, 일적으로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닉의 관심사는 결국 하나였다.

[이 싸움을 좀 더 달궈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어올 수 있을까.

[제롬. 날 믿습니까?]

한록이 하정엽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 닉의 눈이 아이디어와 승부욕으로 반짝이는 것에 제롬은 기분 좋은 오싹함을 느끼며 답했다.

[당연하죠.]

[그렇다면...]

닉이 마케팅한 영화는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적이 없다. 누구에게도 진 적 없는 세계적인 마케터.

[위험한 일을 해도 되겠군요.]

그가 무언가를 상상하며 말했다.

*

그로부터 3일 후. 한록에게 온 전화 한통.

[안녕하세요, 한. 닉입니다.]

바로 닉에게서 온 것이었다.

자신의 우상이자,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뛰는 파트너. 그리고 승리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 그의 전화에 한록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닉?]

[이번 마케팅을 위해 한과 함께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해줄 수 있나요?]

[당연하죠.]

[고마워요.]

세계 최고의 마케터가 자신에게 함께 마케팅을 하자고 제안한다. 한록으로서는 영광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한록이 바로 답하자 닉이 본론을 꺼냈다.

[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오후 1시에 <판도라>와 <오징어 서바이벌>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할 거예요. 이 싸움에 임하는 CK의 포부를 준비해 주세요.]

닉이 준비한 것치고는 아주 소박한 마케팅.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일렀다.

[대단한 걸 준비해야 할 거예요.]

닉은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기에.

‘과연 이 사람이 어떤 일을 가져올까.’

세계최고의 마케터. 그가 한록을 위해 준비한 첫 번째 마케팅.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록이 들뜬 목소리로 닉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닉이 말한 금요일 오후 1시가 되기 두 시간 전.

“팀장님. 오늘 <지미쇼>에 알렉산드로 감독이 나옵니다.”

“네, 모니터링 합시다.”

한록은 유선의 말에 해외팀의 사무실에 걸린 TV에 <지미쇼>가 나오는 라이브 채널을 틀었다. 시간이 흐르고, 미국 3대 토크쇼중 하나인 <지미쇼>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알렉산드로!]

오늘의 게스트는 <판도라 2>의 감독 알렉산드로.

[오, 세상에. 여러분. 누가 왔는지 보세요.]

그리고...

[닉!]

닉이었다.

[와우, 여러분. 손만 대면 업계 1위를 만드는 남자. 애플과 루이비통의 마케팅 디렉터. 이제는 스튜디오 B의 마케팅 총괄인 닉이 왔습니다. 우리 <지미쇼>도 시청률 1위를 만들어주려는 걸까요?]

[하하. 그건 우리 회사로 의뢰하시죠.]

닉이 지미의 말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한록과 달리 이런 방송이 익숙한 듯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거의 연예인이네.”

“닉 정도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미 실력만으로 사람들에게 꽤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닉. 해외팀 사람들은 연예인처럼 천연덕스럽게 방송을 하는 닉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록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방송이 끝나고 인터뷰를 하는 건가?’

닉이 한록에게 준비하라고 말했던 인터뷰 시간은 오후 1시. <지미쇼>가 끝날 때 쯤의 시간이었다.

‘아니면 방송 중에 인터뷰를 하겠다는 건가?’

닉이 뭘 준비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마케터. 영화 마케팅의 상징. 모두의 존경을 받는 천재는 과연 무슨 일을 준비했을까.

[알렉산드로. 이번 <판도라2>에서 가장 자신있는 부분은 어디죠?]

[경험. 당신들은 3시간 동안 판도라 행성에 살고 나온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잠깐. 영화가 3시간이라고요? 물론 중간에 밥도 주는 거겠죠?]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와 지미가 영화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닉이 맞장구를 치며 진행되는 TV쇼.

‘대체 뭘까?’

그리고 한록의 궁금증은 TV쇼가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해결되었다.

[그나저나, 스튜디오B가 한국의 CK와 영화로 대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아,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죠. 정확히는 듣고 싶은 말이랄까요.]

사회자의 말에 닉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설마.’

한록의 생각과 함께.

“...팀장님.”

“네.”

“닉한테서 전화 왔어요.”

한록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 이거 보고 있죠?]

그때 TV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럼 전화 받아주세요.]

닉이 화면을 보고 말했다.

**

전화를 받은 한록.

[안녕하세요, 한.]

<안녕하세요, 한.>

TV 속과 핸드폰 너머에서 닉이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지..지금...지금 팀장님한테 전화 건 거죠?”

닉의 말에 유선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록을 바라보았다.

생방송으로, 미국 3대 토크쇼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거기에 사전에 협의가 안 된 모양인지 사회자도 놀란 눈으로 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내기를 하나 할까요. 만약 <판도라 2>가 30억 달러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판도라> 시리즈의 제작을 중단하겠습니다.]

그리고 닉은 이 반응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파격적인 발언을 던졌다.

[닉!]

“헉!”

“저거 진짜야?”

닉의 말에 깜짝 놀란 CK의 직원들. 그리고 TV속에서 입을 틀어막은 패널들. 모두를 놀라게 한 닉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록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방송으로 <판도라>와 <오징어 서바이벌>의 운명은 정해졌다. 두 영화. 그리고 지금 한록의 답은 역사에 남을 것이었다.

‘그래.’

‘당신 정말 천재 맞구나.’

헐리웃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싸움.

닉은 그 마지막 상대로 너무나 충분한 사람이었다.

[한. 당신은 뭘 걸 수 있죠?]

이제는 한록에게 던져진 질문. 닉의 말에 한록이 눈을 감았다. 해외팀 모두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장님.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지금이 헐리웃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다음 기회란 건 없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모두가 CK를 주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정엽에게 말했던 그 약속.

이렇게 갑작스럽게 얘기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 약속을 밝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오징어 서바이벌> 개봉 직전, 이런 발표를 하겠습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약속했던 것은...

[닉. 당신에게 진다면 CK ENM은 영화 사업을 그만두겠습니다.]

정말로, 이 영화에 운명을 걸겠다는 말이었다.

**

[당신에게 진다면 CK ENM은 영화 사업을 그만두겠습니다.]

한록의 파격적인 발언에 패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카메라를 바라보았고, 사회자 지미는 시청률을 생각하며 말없이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닉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내일 신문 1면을 장식할 기삿거리들과, 헐리웃을 집어삼킬 유일한 방법.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슈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던 한록.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완벽한 상대였다.

그 상대의 등장에 닉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당신은 최고야.]

**

한록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번 승부에서 진다면 영화 사업을 접겠다.’ 한록의 파격적인 공약은 말 그대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오징어 서바이벌>에 대한 주목도는 이제 단순히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팀장님. 한국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 들어왔습니다. KBC, MBS, SBC에서도요. 미국 폭스뉴스와 일본 쪽에서도 계속 인터뷰 요청 들어오고 있고요.”

반응이 어느 정도였냐면, 실시간으로 밀려들어오는 인터뷰 요청 때문에 CK는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장인 하정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터뷰 전부 거절하세요. 미팅도 전부 취소하고요.”

“사장님. 이 뒤에 바로 회의가...”

“불참합니다.”

“안 됩니다, 사장님. 회장님이 저희 때문에 소집하신 회의입니다.”

하지만 하정엽에게는 한 가지 난관이 더 남아있었다.

“회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지금 당장 제당으로 달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비서의 말에 하정엽은 침묵에 빠졌다. 한록의 발언으로 전 세계의 모두가 CK를 주목하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모두가. 정계. 재계. 영화계. 대중. 모든 사람이 <오징어 서바이벌>이 성공할 수 있을지, CK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한록이 만들어온 지금 이 순간. 지금은 헐리웃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동시에 실패한다면 회사를 내줘야 하는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일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하정엽은 한록을 믿었고,

‘나는 이 정도도 감당할 수 없으면서 CK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한 건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한록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모두가 CK를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이란 건 없다. 여기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다.

“불참합니다.”

“사장님..!”

“이한록 팀장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누구의 연락도 받지 마세요.”

하정엽이 유비서에게 말했다. 정말로, 아주.

“그건 회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

“CK ENM의 파격적인 발언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이준필 기자.”

“미쳤군. 이한록이 완전히 미쳤어.”

“이러면 우리 샬롯테도 희망이 좀 있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영화를 가져왔길래 이러는 거지?”

[오, 대체 영화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내 생에 가장 화끈한 공약이었어요!]

“야. CK 이번에 영화 사업 접는다는데?”

“어? 왜?”

“뭐더라...이번 영화 안 되면 접겠대.”

“무슨 영환데?”

“...차장님. 저희 진짜 괜찮은 거겠죠?”

“하대리. 나는 이팀장 믿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믿어주겠어.”

[영도: 형! 형! 전화 좀 받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한서: 오빠. 오빠 회사 무슨 일 있는 거야?]

“지미쇼에서 CK 퇴출 디데이 카운트 다운한다는데?”

[최근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CK ENM과 스튜디오 B의 관객 수 대결에 대한 게임이 올라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게임에 참여한 인원수가 월드컵 불법 도박의 참여자수와 비슷한 걸로 밝혀졌습니다.]

전 세계가 CK ENM의 영화계 퇴출에 대한 얘기로 뜨거운 가운데...

[서감독: 팀장님.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오징어 서바이벌>의 개봉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

“제 영화에 CK의 운명을 거셨던데요.”

“그럴만한 영화니까요.”

강남의 한 바에서 만난 한록과 서감독. 한록의 덤덤한 답에 서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세상 그 누구보다 <오징어 서바이벌>이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이자, 지금 가장 어깨가 무거울 사람인 서감독. 지금 서감독의 어깨에는 한 회사의 존폐가 달려있었다. 그러나 서감독은 한탄을 하거나, 한록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한록처럼 자신의 포부를 얘기했다.

“저도 공약을 하나 걸겠습니다.”

“어떤 겁니까.”

“저는 팀장님으로 영화를 만들 겁니다.”

“...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말에 한록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서감독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팀장님이 방송에서 영화 사업 접겠다고 하셨을 때. 그 말을 듣고 결심했습니다. 팀장님은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고, 저는 팀장님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대화는 그 영화의 오프닝이 될 겁니다.”

진지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를 말하는 서감독. 서감독이 한록을 보고 말했다.

“팀장님만 알고 있겠죠. 이 영화의 끝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헐리웃을 집어삼키겠다고 말하는 남자. 누구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는 남자. 과연 그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게임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질문에 한록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어야죠.”

누구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는 자부심이 담긴 말.

한록의 답에 서감독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어서인지, 서감독은 한록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팀장님.”

“네.”

“방금 그 말 잊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의 술잔을 비우더니 말했다.

“명대사가 될 거니까.”

**

그리고 이틀 후.

[어?]

[이게 뭐야?]

바쁜 아침. 가판대에서 신문을 하나 사고 출근을 하던 뉴요커들이 하나같이 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신문 1면, 하단에 실린 광고.

[이게 무슨 광고야?]

<오징어 서바이벌>의 광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