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46화 (208/263)

그 조건, 지금 사용하겠습니다.

필름포럼에 가입하겠다는 한록의 발언. 그 말에 디즈니의 부사장,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죠?]

놀란 것은 윌리엄만이 아니었다. 제롬과 최경준, 조금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닉, 그리고 한록. 넷을 제외한 모두가 한록의 폭탄발언에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방금 말한 대로입니다. 우리도 필름 포럼에 가입하겠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절차를 지키세요.]

[그래요. 정식으로 안건을 올리세요!]

[오늘 회의는 스튜디오B에 대한 회의입니다.]

한록의 말에 반발하는 빅6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빅6는 필름포럼에 그 누구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그렇기에 몇 십년간 그들의 권위가 유지되었던 것이었다. 이번 요청도 헐리웃의 대부 제롬 앤더슨의 요청이니 거절할 수 없었던 것 뿐.

그런데 미국도 아닌 아시아의 영화사. 심지어 헐리웃에 진출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회사가 가입을 요청하고 있다.

[CK의 가입은 거절하겠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스튜디오 B의 요청은 승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정식으로 안건을 상정해서...]

[그럼 우리도 정식으로 안건을 올리면 됩니까? 스튜디오 B만큼 동의 인원을 모아오면 되겠군요.]

[...]

하지만 문제는 이미 스튜디오 B의 가입 요청을 승인했다는 것. 거기에 요즘 CK의 매출은 스튜디오 B보다도 좋았다. 한번 전례가 생겨버렸으니, 더 이상 CK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젠장!’

윌리엄이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빅6 모두 어두운 얼굴로 윌리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반면 빅6에 포함되지 않은 회사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까 지켜보고 있었다.

윌리엄의 시선은 제롬에게서 멈추었다.

스튜디오 B가 40년만에 빅6의 아성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스튜디오B가 헐리웃의 새로운 강자로 나타났다는 걸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CK가 눈앞에서 뺏어가려 한다. 제롬이 그걸 가많이 두고 보고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 남은 건 제롬 앤더슨 뿐이다.’

그리고, CK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제롬은...

[우리와 CK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록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당했다.’

모든 걸 예상했다는 제롬의 미소. 그리고 그 시선 끝의 한록. 윌리엄은 그제야 깨달았다. CK가 제롬 앤더슨을 도운 게 아니다. 제롬이 CK를 도운 것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야. CK의 필름 포럼 가입.’

빅6와 악연이 깊은 한록이 가입을 요구한다. 의도는 뻔했다. 빅6의 일원이 되어서, 빅6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가입에 반대하는 분은 지금 발언해주세요. 질문 받겠습니다.]

윌리엄과 빅6가 함정에 빠진 사이, 한록은 아예 회의의 흐름을 자신에게 가져와버렸다. 회의장 뒤편에 앉아있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모두 한록에게 돌아갔고, 기자들이 미친 듯이 한록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하는 말은 모두 기사로 송출된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이 알게 될 것이다.

-이한록을 막아야 한다. 지금 당장.

그런 생각 아래, 빅6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앞 다투어 손을 들기 시작했다.

[CK의 본사는 한국입니다. 헐리웃을 대표하는 기관인 필름 포럼에 가입할 자격이 안 됩니다.]

[그렇다며 애초에 협의회에도 가입시키지 말았어야죠. 다음 분.]

[CK ENM은 헐리웃에서 활동한 이력이 너무 짧기에 헐리웃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스튜디오B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분.]

[가입 규정에는 없어도 CK가 헐리웃을 대표하고 있다는 걸 먼저 증명해야 합니다.]

[최근 2년간 CK의 매출을 이긴 회사는 없습니다. 다음 질문 주십시오.]

빅6의 질문을 하나하나 쳐내는 한록. 모두가 한록의 말에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지금 헐리웃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회사는 분명 CK였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주목받는 회사 역시 CK였다.

[분명히 얘기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CK에게 자격을 의논할 수 있는 회사는 없습니다.]

설령 빅6마저도.

한록의 말에 침묵에 빠진 회의장. 한록이 모두를 둘러보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설마 CK가 필름포럼에 가입하는 걸 두려워 하시는 겁니까?]

외면하는 순간, 다음날 신문 1면에 올라가게 될 말이었다.

한록의 도발. 협의회 회원들의 시선. 그리고 수많은 기자들과, 타임지 편집장 케이트...그들 사이에서 윌리엄은 생각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다.’

윌리엄이 빅6를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조건은 스튜디오 B와 같습니다. 3대 영화제에서 2개 이상의 대상. 그리고 30억 달러 이상의 매출. 그리고, 둘 중 성적이 더 우수한 곳만 필름포럼에 가입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공은 한록에게로 넘어왔다. 모두가 숨죽였고, 기자들은 쉼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한록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쉬운 조건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스튜디오 B가 올해 말까지 30억 달러 달성을 약속했죠. 그럼 저는 올해 관객 수 1위를 달성하겠습니다. 당연히 스튜디오B의 30억 달러는 넘어야겠죠. 세계 신기록이 될 겁니다.]

[...그게 가능할거라 생각합니까?]

[네.]

[그 말을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실패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록은 윌리엄이 아닌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에 윌리엄은 한록의 대답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과정과 오늘의 회의. 그건 빅6에게 CK와 스튜디오B가 필름포럼에 가입하겠다고 알리는 회의가 아니었다. 이건, 한록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내는...

[당신들 모두가 내 영화를 보게 될 테니까.]

마지막 전투를 알리는 마케팅이었다.

**

회의장 뒤쪽,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서들과 함께 회의를 지켜보던 닉. 닉은 한록을 보며 새삼스레 감탄했다. 지금 한록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강력한 상대처럼 보였다.

‘...연설가로 활동해도 되겠군.’

그렇게 모두가 한록의 말에 빠져있을 때. 3시간이 넘게 이어지던 회의가 종료되었다.

[회의 종료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록에게 집중된 시선과, 카메라의 스포트 라이트. ‘최대한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닉과 한록이 이번 일을 위해 계획했던 목표였고, 한록은 그 목표를 완벽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닉은 이한록이란 사람을 조금 더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한.]

[닉.]

닉이 한록을 향해 뛰어갔고, 회의장을 막 나서려던 한록이 닉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닉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번 회의에 대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어요.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기자들이 잔뜩 몰려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헐리웃을 지배하겠다고 말한 최초의 아시아인이 되어 있겠죠. 모든 사람이 당신을 시험하고, 끌어내리려 들 겁니다. 당신의 실패를 바랄 거예요.]

닉은 한록에게 현재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물었다.

뛰어난 마케터이자, 뛰어난 연설가. 방금 ‘내 영화가 세계 최고의 영화가 될 거다’라고 선포한 젊은 청년.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는 지금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닉의 질문에 한록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곧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끝내주네요.]

자신감. 그리고 승부에 대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한록의 답.

‘이래야지.’

그 말에 닉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그거 그대로 말하세요.]

그렇게, 문을 열자...

[CK ENM! 인터뷰 요청하고 싶습니다!]

[한록! 한록! 여기 좀 봐주세요!]

[오늘 회의에서 한 발언이 정말인가요?]

[정말 <판도라>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수많은 기자들이 한록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필름 포럼 회의가 모두 끝난 후. 빅6는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당했습니다. CK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아직 모르는 겁니다. 세계 신기록이 될 만한 영화를 만들겠다니. 그건 아무리 CK라도 불가능한 얘기예요.]

[그렇죠. 욕심이 과했습니다.]

오늘 한록의 발언에 대해 얘기하는 빅6.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회의에서 한록이 보여준 자신감. 거기에 기자들을 불러모아 화제를 터뜨리는 방식과 마지막 쇼맨십까지. 오늘 한록의 모습은 완벽함 그 자체였고, 빅6는 자신들이 노리고 있던 상대가 예상 이상으로 강하단 것을 깨달았다.

세계 최고의 영화를 가져오겠다. 그래서 신기록을 쓰겠다는 한록의 말.

만약, 그 말이 사실이 되다면...

‘헐리웃의 패권은 CK가 가져가게 될 거다.’

CK는 아마 세계 최고의 영화사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CK에 계속 이한록이라는 사람이 있다면...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CK는 우리를 뛰어넘게 될 겁니다. 이제는 CK와는 싸우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마음 속으로 해오던 생각. 윌리엄이 그들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리도 다른 방향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빅6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스튜디오 B. CK ENM, 필름포럼 가입 선언.>

한록과 제롬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 다음날, 모든 연예지 1면에 장식된 기사.

CK와 제롬의 선언에 미국 연예계 전체가 뒤집혔다.

[shit! 둘 다 미쳤군!]

[로렌! 오늘 신문 봤어? CK가 또 일 쳤어!]

[그걸 지금 알았어?]

[유펜이 회의 다녀와서 말해줬는데, 빅6가 눈뜨고 당했대.]

[제롬이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던데.]

[빅6는 낭패겠네. CK를 그렇게 공격했는데, 이제 CK가 자기들만큼 커진 거잖아.]

[아직 그 정도 규모는 아니야. CK가 머리를 잘 쓴 거지.]

LA, 그리고 뉴욕. 영국. 일본. 중국. 전 세계의 영화인들이 CK와 제롬의 행보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이번 <판도라 2>에 회사의 운명이 걸렸다면서요?]

[아, 그렇게 됐죠. <판도라> 시리즈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판도라 2>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알렉산드로의 인터뷰에, 영화계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까지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CK. 제롬. <판도라>. 빅6. 필름포럼. 헐리웃. 사람들의 수많은 얘기들이 쌓여갔다.

[제롬이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이걸 꾸미고 있었군.]

헐리웃의 대부 제롬 앤더슨. 그는 과연 40년간 아무도 뚫지 못한 빅6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빅6가 빅8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스튜디오 B와 CK가 빅6에 가입해서 헐리웃의 새 물결을 가져올 것인가.

[세계 신기록이라니. 그게 원한다고 만들 수 있는 성과인가?]

정말 CK가 영화계를 뒤집을 것인가.

[그래서, 대체 누가 이길까?]

과연 올해의 승자는 누구인가.

[그 둘이 30억 달러를 넘을 수 있을까? 넘는다면, 누가 이길까?]

[글쎄. 확신은 못하겠지만..]

스튜디오B와 CK의 승부처가 되어버린 올해의 헐리웃. 그 앞에서 그저 관객이 되어버린 헐리웃의 회사들은 생각했다.

[이긴 사람이 헐리웃을 가져가겠지.]

자신들의 눈앞에서 영화계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고.

**

필름 포럼 회의 이틀 후, 저녁. 한록은 누군가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사장님.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니십니까.”

[됐습니다. 얘기하세요.]

하정엽이었다.

“필름포럼 회의는 잘 끝났습니다. 현지에서의 반응도 좋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덧붙였다.

[잘 했습니다.]

한록에 대한 신뢰가 담긴 말. 그 말에 한록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때가 왔다.’

<오징어 서바이벌>이 <판도라>를 이긴다면. 그리고 세계 신기록을 쓴다면. 그때가 되면, CK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해도 될 수 있는 승부처. 세계 최고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이 순간.

그래, 바로 지금이 한록이 오래 기다려오던 순간이었다.

“사장님.”

한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의 본론을 얘기했다.

“계약서 3번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백지 계약서의 3번. 단 한 번, 한록이 어떤 제안을 해도 수락하겠다는 조건.

“그 조건, 지금 사용하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영화를 위해, 한록과 하정엽의 마지막 계약이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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