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45화 (207/263)

왕좌에 도전하다.

[CK ENM이 발신인이라고?]

[네. 내부 정보를 확인해봤는데, 스튜디오 B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CK에게 한국 시장 진출을 약속받았다고 합니다.]

[CK ENM이 스튜디오B를 지지하고 있다는 건가? 왜...]

20세기 폭스 관계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예감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괜히 빅6의 간부들은 아닌 것인지,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중 누군가가 당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를 무너뜨리겠다고 손을 잡았군.]

그 예상은 정확했다.

몇 달 전. 한록과 최경준이 CK ENM의 차기 사장 자리를 두고 독대 했을 때. 그때 한록이 최경준에게 요청한 것이 있었다.

-저는 아직 본부장님이 필요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말이지?

-곧 제롬 앤더슨이 필름포럼에 가입을 요청할 겁니다. 이에 대해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입이 쉽지 않을 겁니다. 다들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는 걸 원치 않을테니까요. 그러니까 본부장님이 제롬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영화사들이 제롬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설득해주십시오.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나길 원하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제롬 앤더슨을 도와준다면 우리에겐 어떤 이득이 있지?

-제롬은 빅6에게 주어지는 특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게 없이도 세계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내니까요. 제롬에게 필요한 건 미국 최고의 영화사 중 하나라는 명예뿐입니다.

-제롬 앤더슨이라면 그럴만하지. 계속해보게.

-제롬이 필름포럼에 가입한다면 내부에서 필름포럼을 무너뜨릴 거라고 합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필름포럼이 너무 특혜를 보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거죠. 그럼 더 이상 의회와 정부도 필름포럼을 대놓고 밀어주진 못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우리의 활동반경이 넓어지는 거죠.

-그래. 제롬이 그렇게 나온다면 빅6가 지금처럼 활개를 치진 못하겠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군.

-그리고 더 중요한 건...이 이상으로 빅6를 뒤흔들 방법이 있단 겁니다.

한록이 조용히 속삭인 마지막 ‘중요한 것’과, 많은 것을 담은 미소.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야망에 최경준이 턱을 괴고 답했다.

-자네는 확실히 욕심이 많아. 날 굳이 붙잡아 두는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이런 계획을 꾸미고 있었군.

-들켰습니까.

-숨길 생각도 없었지 않나.

한록이 최경준과 대립하는 대신 자신의 편으로 붙잡아두고자 했던 아주 중요한 이유. 바로 이 일에서 최경준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불쾌하십니까.

그리고 최경준은...

-아니. 이 정도로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당해줄 수 있지.

한록의 계획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때부터는 최경준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CK ENM 최경준입니다. UK 픽쳐스와 미팅을 요청합니다.]

최경준은 영화사들과 미팅을 시작했고, 한국 시장에 진입하는 걸 도와주는 조건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경준이 설득한 영화사만 무려 4개국 17개 회사였다. 영화사들의 공동 성명문을 받아온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자네가 CK의 위상을 드높여놔서 협조가 쉽더군. CK의 제안이라고 말하니 다들 좋아했어.

-제가 CK를 드높여서라...

-왜. 쑥스러운가?

-아뇨. 확신이 들어서요.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웃었다. 제롬의 필름포럼 가입 요청. 그리고 CK의 위상과 <오징어 서바이벌>. <판도라2>. 모든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오징어 서바이벌>의 개봉은 언제지?

-<판도라2>의 개봉 직후입니다.

-왜 하필 <판도라> 2편과 같이 개봉하겠다는 건가.

모두가 피하는, 심지어 아예 일 년을 비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영화. <판도라 2>. 그러나 한록은 오히려 <판도라 2>와 함께 개봉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식물> 때처럼 낙수효과를 노리겠단 것도 아니었다.

-가장 강한 상대를 이겨야 재밌지 않겠습니까.

그저 <오징어 서바이벌>이 <판도라 2>를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

[필름포럼, 40년만의 신규 회원 가입 요청.]

[헐리웃의 대부 제롬 앤더슨이 빅6 체제에 종말을 고했다.]

[빅6는 과연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왕좌를 양보하지 않을 것인가.]

[헐리웃의 역사가 변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

[한편, 이 모든 일에는 CK ENM이 얽혀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CK ENM. 그 곳은 과연 어디인가.]

최경준의 활약으로 수많은 회사들이 제롬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거기에 언론들은 끊임없이 스튜디오 B와 필름포럼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는 상황.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다보니 빅 6는 꼼짝 없이 회의를 개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제롬의 필름포럼 가입 요청은 회의 안건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발신인: 필름포럼 협의회]

[제목: <스튜디오 B의 필름포럼 가입 요청>]

[5월 2일. 스튜디오 B의 요청에 따라 필름포럼 가입 회의가 개최됩니다.]

5월 2일. 긴급회의가 결정되었다.

[제롬 앤더슨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혜를 없애려고 할 겁니다. 그걸 빌미로 표를 얻었겠죠. 절대로 스튜디오 B를 필름포럼에 가입시켜선 안 됩니다.]

어떻게든 제롬을 막으려는 빅6.

[무조건 제롬이 필름포럼에 가입해야해. 빅6를 무너뜨릴 정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제롬 앤더슨 뿐이야.]

제롬의 편에 선 소규모 영화사들.

[제롬. 과반수 이상이 우리에게 동의해야 합니다. 회의 전까지 미팅을 계속 가져야 해요.]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스튜디오B.

그리고...

[한. 제롬입니다.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CK.

5월 2일. 각자의 꿍꿍이를 가진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아무도 우리가 할 일을 예상하지 못할 겁니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

그리고 2주 후 5월 2일.

뉴욕에서 열린 필름포럼 긴급회의에 총 42개의 영화사가 참여했다. 100%의 참석률이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바짝 긴장한 상황이었다.

오늘 이 회의로 앞으로 영화계의 정책이. 자신들의 입장이. 그리고 영화시장 전체가 바뀌게 된다.

[CK ENM, 이한록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한록이 나타났다.

‘이한록’. 그리고 ‘CK’라는 말에 모두가 회의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경계. 그리고 그 이상의 관심이 섞인 시선들. 미국 영화계를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한록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한록은 자리에 앉았고, 당당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한록의 태도에 모두가 느꼈다. 이제 CK는 ‘아시아의 작은 영화사’ 따위가 아니었다. CK는 이 자리의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회사였다.

[스튜디오 B. 제롬 앤더슨입니다.]

잠시 후 제롬이 회의장에 나타났고,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B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필름포럼은 전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기업들의 모임입니다. 만들어진지 5년도 되지 않은 스튜디오 B가 필름포럼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까?]

디즈니의 부사장 윌리엄 벤도티의 질문. 이전 회의들과 회의 참여자의 수준부터 달라졌고, 그만큼 질문도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나 제롬은 여유롭게 윌리엄의 질문에 답했다.

[그럼요. 최근 2년간 스튜디오 B의 성적을 넘은건 CK ENM뿐이지 않습니까.]

제롬의 말에 빅6의 간부 모두가 얼굴을 구겼다. 반면 윌리엄은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거는 조건도 충족할 수 있겠군요.]

[말씀하시죠.]

[올해 안으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두 곳 이상에서 대상 수상. 그게 아니라면 영화 하나로 30억 달러 돌파. 일년의 기한을 주겠습니다. 둘 중 하나를 만들어오세요.]

3대 영화제를 석권해라. 그리고 4조에 가까운 수입을 올려라. 한 마디로, 영화계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디즈니의 조건에 UK 픽쳐스의 사장이 곁에 있는 최경준에게 속삭였다.

[영화계 역대 최고 기록이 28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30억 달러를 만들라니.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영화를 만들란 것 아닙니까. 이건 가입을 거절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렇죠.]

[우리가 발언해야합니다.]

[아뇨. 기다려 보세요. 제롬의 표정이 나쁘지 않군요.]

초조한 표정의 UK 픽쳐스에게 최경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UK 픽쳐스의 사장이 제롬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자신과 달리 제롬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전 세계 그 어떤 영화도 이뤄내지 못한 성적을 만들라고 하시는군요. 디즈니는 그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까?]

[네. 곧 개봉하는 <복수자들 5>가 만들어낼 겁니다.]

[그렇다기엔 <복수자들> 4편도 <판도라>에 밀렸죠. 역대 흥행 1위는 디즈니가 아니라 <판도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스튜디오B야말로 자신이 있어야죠. 이번에 그 <판도라>의 후속작을 개봉하지 않습니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디즈니와 제롬. 이 팽팽한 싸움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네, 조건을 수락하겠습니다.]

바로 제롬이 필름포럼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이 정도도 못할 거면 애초에 가입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는 <판도라 2>가 있기 때문이었다.

[회의 결과 정리하겠습니다. 올 연말, 스튜디오 B의 실적을 보고 필름포럼의 편입을 결정하겠습니다.]

회의는 숨막히는 설전이 오갔던 것에 비해 간단한 결론으로 끝이 났다. 빅6는 ‘전 세계 최고의 흥행을 만들어 와라’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고, 제롬은 그걸 흔쾌히 수락했다.

과연 제롬 앤더슨이 세계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와는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더 발언할 곳 있습니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 회의가 마무리 되려 할 때...

[CK ENM. 발언하겠습니다.]

한록이 손을 들었다.

제롬 앤더슨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 뒤에서 이 모든 일에 함께한 숨은 주동자. 그런 CK ENM이 회의 내내 아무 말이 없다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모두가 긴장해서 한록을 바라보았고, 최경준과 제롬만이 한록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한. 나는 필름포럼에 가입할 겁니다. 한이 나를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과거. 한록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제롬.

-제롬 앤더슨을 도와준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지?

그리고 한록에게 질문을 던진 최경준.

그들에게 한록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

-빅6를 뒤흔들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의 CK는 불가능합니다. 언론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롬이 먼저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우리도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한록이 말한 ‘더 중요한 것’. 한록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 전 세계가 CK ENM을 주목하게 만들 방법. 그건 바로.

[CK ENM. 필름포럼 가입을 요청합니다.]

제롬과 함께 헐리웃의 왕좌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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