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K 24시
9월의 어느 여름날, 월요일. CK ENM에는 아침부터 묘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 회장님 오신다 그랬지?”
다름아닌 회장 하태준의 방문 때문이었다.
하태준은 원래도 CK그룹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관리하는 편이었기에, 하태준의 방문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왜냐하면...
[9시부터 6시까지. 27층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세요.]
하정엽이 사장실이 있는 층을 전부 비우라는 명령을 내렸기 떄문이었다.
여태까지 있던 하태준의 정기방문과, 예정에 없던 돌발방문 중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
그런 일에 CK의 모두가 말했다.
“뭐가 있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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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하태준이 드디어 CK ENM에 방문했다. 하태준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신사업이 정착하기까지 5년이다.”
지금 자신이 손수 진행하고 있는 한식 사업에 대해 얘기하는 하태준. 장사는 1년. 사업은 10년간 적자를 생각하고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의 자신감은 남달랐다. ‘CK의 이름을 걸고 5년 안에 한식을 아시아 최고 음식으로 성장시키겠다.’
“그 뒤엔 은퇴다.”
그건 하태준의 마지막 목표였다.
은퇴란 얘기에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던 하정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CK ENM의 믿기지 않는 성장. 그리고 하태준의 도전...요 몇 년간 벌어진 일련의 스토리에 CK일가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중요한 얘기를 할 거다.’
라고 말했을 때...그때 하정엽은 직감했다.
“이제 CK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을 정할 거다.”
오늘은 승계에 대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너는 단 한 번도 네 형을 이긴 적이 없었지. 그래서 너한텐 ENM을 넘긴거고.”
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조업과 유통업이 아닌 엔터테인먼트를 넘겨받은 하정엽. 하정엽이 ENM을 넘겨받은 시점부터 사람들은 CK 그룹의 후계자는 하정엽이 아닌 하정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지금 CK를 빛내고 있는 건 접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하정엽의 건방진 말에도 하태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하태준은 화를 내는 대신 하정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5년. 그 안에 디즈니만큼 ENM을 키워봐라.”
하태준의 방식. 불가능한 도전을 제안하고.
“그렇다면 CK를 네게 주마.”
확실한 보상을 준다.
“1년이면 됩니다, 회장님.”
그 제안에 하정엽이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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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준이 떠난 후. 하정엽은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CK그룹. ENM. 후계자의 자리와 헐리웃. <오징어 서바이벌>.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리고...모든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직원.
“이한록 팀장을 불러오세요.”
하정엽이 유비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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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시.
“사장님이 찾으십니다.”
해외팀의 사무실에서 정부장과 얘기를 하던 한록에게 용건을 얘기하는 유비서. 하정엽이 ‘오늘이 끝날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한 곳에 자신을 부른다. 분명 아주 중요한 얘기가 오갈게 분명했다.
“다녀와라.”
유비서의 말에 정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록의 등을 두드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잘해라.”
정부장만이 아닌 해외팀 모두가 긴장 속에 한록을 바라보았고, 한록은 자신을 지켜보는 해외팀의 시선 속에서 사장실이 있는 27층으로 향했다.
묘한 긴장에 잠긴 27층의 복도. 그 곳을 걸으며 한록은 생각했다.
‘후계에 대한 얘기를 들으셨구나.’
그리고 한록이 사장실에 도착했고, 하정엽은 한록을 보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거래를 합시다, 이한록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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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엽이 한록을 사무실로 부른 이유는 당연히 후계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래를 하자’라는 말에는 조금 더 많은 얘기가 담겨있었다. 아마 하정엽은 한록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에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겠습니다. 여태 이한록 팀장이 본 적 없을 정도의 지원말입니다.”
하정엽이 ENM 최고의 기대작인 <오징어 서바이벌>에 대한 얘기를 했다. 믿기지 않는 지원을 해주겠다. 그러니 <오징어 서바이벌>을 제대로 성공시켜라라는 하정엽의 말.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더 중요한 것은 이어질 내용이었다.
“앞으로 1년. 그 안에 누구나 ‘영화’란 말을 들으면 우리 회사를 떠올릴 수 있게 만드세요. 그렇게 만든다면...CK 그룹은 내게 될 겁니다. 5년쯤 후면 회장 자리를 넘겨받을 거고, 그럼 지금처럼 ENM에 시간을 쏟을 수 없게 되겠죠.”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때가 되면 이한록 팀장에게 사장 자리를 주겠습니다.”
사장을 잃은 ENM을 한록에게 주겠다는 말.
CK그룹을 하정엽에게 주겠다는 하태준. 그리고 ENM을 한록에게 주겠다는 하정엽. 과연, CK그룹의 유력한 후계자다운 제안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5년이면 영화사업본부만이 아니라 다른 사업본부의 일을 익히는데도 충분하겠죠. 반대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한록 팀장의 능력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저 말고 최경준 본부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정엽이 자신을 부를때부터 이미 반쯤 예상했던.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제안. 그 말에 하정엽이 답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건 당신이야.”
그리고 아주 솔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 얘기는 대한민국의 모두가 알 테니, 솔직히 얘기 해볼까. 난 항상 형을 이기겠다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겠다고 생각했어. 이 회사도 마찬가지야.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어. 그저 매출이 기획보다 잘 나오면 된다. 그게 내 유일한 목표였어. 당신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나한테 쓴소리를 한 거였지.”
하정엽이 말하는 것은 과거 <퀸>에서 있던 한록과의 트러블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해묵은 원한을 얘기하자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면...그 이상을 하고 싶어져. 지금 당장의 매출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고 자신이 해온 생각을 말하는 하정엽. 그의 목소리에는...
“이 회사가 나한테 특별한 곳이 되었다는 말이야.”
자신의 회사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있었다.
어쩐지 가슴을 울리는 하정엽의 말. 이 젊은 사장의 변화에 한록은 조심스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지금 한록의 심정은 한마디로...
“감사합니다, 사장님.”
고마웠다.
여태 한록이 진행해온 과감한 마케팅과 프로젝트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한록의 뒤에 하정엽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정엽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 속에 한록의 결재를 승인하고, 조용히 지켜봐주었을까. 그리고 남몰래 얼마나 많은 기대와 꿈을 걸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으로 인해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 그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다시 한번 느낀 한록. 하정엽이 한록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나한테 ENM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사람은 이한록 팀장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회사를 맡길 사람은 당신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하정엽의 말에 한록 역시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내가 이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과 여러 고민들. 하지만 역시, 대답은 하나였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이한록 과장.’
하정엽이 <퀸>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변화를 약속한 그날. 그때 다짐을 한 것은 하정엽만이 아니었다. 그날 한록은 생각했다.
“사장님. 말씀드리는 게 너무 늦었습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뒤는 맡겨주십시오.”
이 회사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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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 하정엽과의 대화를 마친 하태준은 제당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최경준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자신의 앞에 뒷짐을 지고 선 최경준을 보고 하태준이 말했다.
“오늘 하정엽에게 후계에 대해 말하고 왔다.”
“그러셨습니까.”
후계 구도의 변화. 임원급 되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최경준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제 젊은 녀석들의 시대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면 박힌 돌이 어떻게 되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하태준과 최경준이 언제나 얘기한 새로운 시대. 아마, 한록과 하정엽의 시대. 하태준은 알고 있었다. 그 새로운 시대에 노장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너도...아니 자네도. 살아남을 방법을 마련해보게.”
CK의 무자비한 회장이 아니라, 20년간 함께 한국 영화계를 만들어온 개척자로서 건네는 충고. 그 말에 최경준이 답했다.
“충고가 너무 늦으시군요, 회장님.”
“하.”
최경준의 말에 하태준이 잠깐 최경준을 바라보다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잠깐 제당에 한눈을 팔았다 했더니, 이제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온통 건방진 놈들뿐이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미리 준비를 했다 이건가.”
어느새 그들이 몇 배는 성장했다는 걸 의미했다.
“어떻게 이한록을 이길 건가. 한번 지켜보지.”
“네, 기대하십시오.”
하태준의 말에 최경준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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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하정엽과의 대화를 마친 한록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징어 서바이벌 진행 현황>.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제작보고>. 그리고 유선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생각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하정엽은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고,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는 중요한 장르가 될 거다. 많은 영화들이 사랑 받을 거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 변화를 당신이 만들게 될 거다.’ 오늘 하정엽은 이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계획을 짜자.
완벽한 계획을 짜자. <오징어 서바이벌>이 헐리웃을 정복할 수 있는. CK ENM이 최고의 회사가 될 수 있는. 내 자랑스러운 영화와 사람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그리고...<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계획.
한록의 펜이 몇 번 움직였고, 그때마다 수많은 계획이 손가락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록의 펜이 멈추었다. 한록은 생각했다.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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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모든 일정을 마친 하태준이 자신의 본거지인 제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회장이 사라지자 ENM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오늘 회장님이 방문하신 거. 후계 얘기 때문이었대.”
하태준과 하정엽. ENM의 행방에 대한 소문.
“소문 들었어?”
“어떤 거?”
“이한록이 오늘이랑 내일은 아무도 사무실에 찾아오지 말라했대.”
“...야. 거기도 뭐 준비하고 있다. 분명해. 후계 얘기랑 관련 있겠네.”
한록이 대단한 걸 준비한다는 소문.
그리고...
“부장님. 큰일 났어요. 알렉산드로 감독 내년 개봉작 결정됐대요.”
“그게 왜 큰일인데?”
“그거 <판도라>2 래요.”
“하...씨발.”
“부장님, 어떡할까요?”
“내년 개봉 영화 다 취소시켜. 절대 <판도라>랑 붙지마.”
세계최고의 영화가 2편이 나온다는 소문.
시시각각 바뀌는 영화계의 상황. 거기에 앞으로 1년 후,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 회사에 도는 각종 소문을 보며 모두는 생각했다.
“우리 회사 대체 어떻게 되려나?”
그리고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걸으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 사장님이 이한록 팀장 찾아갔대. 봤지. 이제 실세는 이한록이야.”
“이제라기엔...원래부터 이한록 아니었어?”
“그전까진 본부장님이 계셨잖아. 그런데 이제는 본부장님이 아니라 이한록을 찾았어. 지금이랑 상황이 달라진단 뜻이야.”
“야, 야. 잠깐.”
앞으로 몰려올 파도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얘기가 오갈 때...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조심히 들어가게.”
소문의 중심 중 한명인 최경준은 그저 웃으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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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반. 한차례 퇴근러쉬가 끝난 시점. 최경준은 고요한 복도를 걸어 어디론가 향했다.
“본부장님.”
최경준이 도착한 곳은 한록의 사무실이었다.
“앉으십시오.”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사무실 중간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한록에게 물었다.
“사장님이 내 자리를 준다고 하던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