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해낼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다시 최경준의 사무실로 돌아온 유선. 한록을 바라보는 유선의 시선에서는 ‘저 괜찮은 거예요?’라는 불안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한록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유선은 한록도 놀랄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을 어필했으나, 이런 점에서는 역시 아직 신입사원다웠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유선에게 입모양으로 말한 한록. 한록의 말에 유선은 불안이 조금 사라진듯한 얼굴이었다. 유선이 자신의 앞에 앉자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저는 항상 열심히 했습니다’라고 했지.”
“...네.”
최경준의 질문에 유선이 불안한 얼굴로 답했다.
“그 말 다시 한 번 할 수 있나?”
‘내 앞에서 다시 말해보라’는 최경준의 말뜻. 최경준의 카리스마에 누구나 겁을 먹을 만한 상황이었다. 유선 역시 겁을 먹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선은 눈을 한번 꼭 감더니, 다시 최경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답했다.
“네. 저는 언제나 열심히 했습니다.”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었으니까.
“한번 확인해봐야겠군.”
그 말에 최경준이 자신의 앞에 놓인 파일을 집어들었다. 유선의 인사파일이었다.
“어디 볼까. 입사 후 15개 영화 담당. 계약직 사원 중 유일하게 정규직으로 전환. 신입사원 중 유일하게 직원평가 상. 올해 출장 7번이라...”
그리고 최경준은 유선의 파일을 넘겨보다가...
“그래.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하군.”
유선에게 미소를 보였다.
“신입사원이 이 정도의 성과라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아주 잘하고 있네. 그동안 내가 자네를 잘못 봤어.”
“가...감사합니다!”
유선에게 칭찬을 건네는 최경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하던 상사의 말에 유선이 어색하게 답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유선의 성과에 대해 말하던 최경준은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하나 날렸다.
“꼭 이한록 팀장의 신입시절을 보는 것 같군.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게.”
그 말에 유선의 얼굴이 기쁨으로 부풀었고...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경준의 사무실을 가득 채울만큼 큰 대답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좋아하는군. 자랑스럽겠어.”
그리고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유선이 나간 후 단 둘이 남게 된 최경준과 한록. 한록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오늘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오늘 한록은 대놓고 최경준의 태도를 지적했다. 만약 최경준이 정말 꽉 막힌 사람이었다면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었을 일이었다. 그러나 최경준은 한록과 유선을 나무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아니, 잘했어.”
바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제롬 앤더슨이 이한록 팀장을 노리고 있지 않나. 나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간 인재를 놓치게 됐겠지.”
“...그럴지도요.”
“협박인가?”
“네.”
“하하. 무섭게 굴긴.”
순수한 마음에 한록의 지적을 받아들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쨌든 최경준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미리 말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변화하는 걸 선택했다.
50이 넘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그걸 인정하는 것. 최경준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도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오늘 최경준의 한 일이 얼마나 어렵고 멋진 일인지 알기에 한록 역시 진심으로 말했다.
**
그렇게 최경준과의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 한록. 문 앞에선 유선이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선씨. 갈까요?”
“네!”
한록의 말에 유선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무실로 내려가는 중 유선이 한록에게 말했다.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유선씨가 잘한 거죠. 본부장님 앞에서도 잘 말하던데요.”
“전부 팀장님 덕분이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팀장님이 믿어주고, 응원해주셔서 말할 수 있던 거예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오늘만 그런 게 아니고 언제나 감사해요.”
조금의 과장이나 아부도 없이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유선. 그 말에 한록은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선은 늘 자랑스러운 후배였지만, 오늘은 더욱 자랑스럽고 기특했다. 한록 역시 진심을 담아 유선에게 답했다.
“유선씨도 잘하고 있어요.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나요.”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둘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리겠다며 걸음을 멈춘 유선. 그 말에 한록은 혼자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복도 구석에서 혼잣말을 하는 유선을 지켜보았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고 있는 유선. 그리고 유선이 감격에 찬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
“해냈다...!”
아주 오랜시간 이어지던 유선에 대한 의심. 그리고 오늘, 그 사람들 앞에서 결국 자신을 증명해낸 후배.
‘...정말 날 닮았단 말이지.’
후배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한록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한록과 유선이 떠난 사무실에 혼자 남은 최경준. 그는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CK ENM의 젊은 직원 둘은 자신이 한번도 이뤄내지 못한 성과를 가지고 돌아옸다. 그리고 자신에게 ‘네가 틀렸다’라고 말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젊은 피들. 그들을 주목하는 헐리웃과, 곧 공개될 <오징어 서바이벌>.
‘시대가 많이 변했군.’
하태준과 몇 번이나 나눴던 얘기가 다시 한 번 떠오른다.
그리고, 또...
‘제롬 앤더슨. 빅6. 헐리웃...’
‘이제는 정말 이길 수 있다.’
잊혀졌던 꿈들도.
**
[인듀어런스-삼일의 삶 특별전]
[<삼일의 삶>에 얽힌 알렉산드로 감독의 사연]
[알렉산드로 감독은 3년 전부터 이 영화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알렉산드로 감독만이 아니라 헐리웃 모두가 개봉을 기다리던 영화라고 해요.]
한록의 예상은 적중했다. <삼일의 삶>이 성공할수록 사람들은 알렉산드로 감독에게 관심을 가졌고, 또 알렉산드로 감독이 유명해질수록 <삼일의 삶>의 예매율이 상승했다.
[삼일의 삶이 드디어 <인듀어런스>를 제치고 미국 전 지역에서 예매율 1위를 달성했습니다.]
거기에 <인듀어런스>가 개봉하고 두 달이 지나자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삼일의 삶>의 순위까지.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헐리웃에 통했다’란 사실은 한국 영화계에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한록 팀장님. 잘 지내시죠?>
<안녕하세요. MBS 김주영 국장입니다. 섭외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이팀장님! 송PD입니다. 이번에 인터뷰 한번 해주세요!>
<덕분에 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네요..^^자랑스럽습니다...>
하루 종일 한록의 핸드폰을 울리는 사람들의 연락들. 그러나, 한록보다도 더 많은 연락을 받는 이가 있었으니...
“이팀장님!”
“윤감독님.”
바로 <삼일의 삶>의 감독인 윤감독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감독님.”
<삼일의 삶> 개봉 3주차. 윤감독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만든 헐리웃 신화’로 한창 인터뷰와 방송요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찌나 연락이 많은지, 아예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CK를 찾은 것이었다.
“팀장님. 이거 드세요. 이거는 팀원 분들 거.”
그 이유는 바로 한록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예전에 한국에서 <삼일의 삶>을 개봉했을 때도 선물을 들고 찾아왔던 윤감독. 그때 윤감독이 건넸던 것은 자신의 가게에서 튀긴 치킨이었다.
그때 윤감독의 선물에는 현실의 무게와 꿈에 대한 간절함이 동시에 담겨있었고, 한록에게는 그 선물이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오늘 윤감독이 건넨 것은-
“홍삼이네요?”
“네. 제일 비싼 걸로 사왔습니다.”
바로 최고급 홍삼즙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제가 감사하죠. 앞으로 팀장님 영양제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몇 배는 뛰어오른 선물의 급에 한록이 아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비싼 선물을 받았다는 것보다는, 윤감독이 이런 선물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더 기뻤다.
“다 팀장님 덕분입니다. 아시죠.”
그리고 가장 고맙고 기쁜 것은 바로 윤감독의 진심이었다.
“차기작도 팀장님이랑 하고 싶었는데...바쁘시다면서요. 너무 아쉽습니다.”
“저도 많이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빅케이 엔터테이먼트와 스튜디오 B도 좋은 곳입니다.”
윤감독이 얘기하는 것은 <삼일의 삶>의 차기작에 대한 것이었다. <삼일의 삶>이 헐리웃에서 소규모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로 전설을 쓰고 있는 지금. 윤감독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은 거의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헐리웃에서마저 윤감독에 대한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러나 윤감독의 대답은 늘 같았다.
‘차기작은 이한록 팀장님과 논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록은 <오징어 서바이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거기에, 한록의 일생일대의 소원이라 말할 수 있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도 얼추 윤곽을 잡아가며 제작에 들어갈 시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감독님. 혹시 헐리웃에서 작업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알렉산드로 감독이랑요.’
그래서 한록은 윤감독에게 몇몇 영화사를 소개시켜주었고, 지금 윤감독은 알렉산드로가 있는 스튜디오B, 그리고 아시아계 대표가 있는 빅케이 엔터테이먼트와 함께 차기작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차기작은 어렵지만, 그 다음 작품은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독님 작품은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그 다음 작품이라...제가 이제 다음 작품을 얘기할 수 있게 됐네요.”
한록의 말에 윤감독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말했다. 한록을 만나기 전에는 ‘극장개봉도 어렵다’는 말을 들었던 독립영화의 감독. 그런데 이제 차기작을 넘어 그 다음 작품까지 기대받는 감독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에는 한록이 함께 있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선물은 변했지만, 한록에 대한 고마움만은 변하지 않는다. 윤감독이 한록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팀장님과 함께하면 꿈을 꿀 수 있어요”
많은 것이 담겨있는 말에 이번에는 한록도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차장님. 이거요.”
“어? 이게 뭐야?”
“윤감독님이 가져오셨습니다.”
윤감독이 떠난 후, 현차장을 찾으러 옥상으로 향한 한록.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현차장이 윤감독의 선물을 보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홍삼이라...감독님 요즘 살만하신가보다. 잘됐다, 잘 됐어.”
윤감독에 대한 응원과 자부심이 담긴 현차장의 말. 아마 해외팀 사람들 모두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현차장이 선물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이팀장. 앞으로도 잘해보자.”
현차장의 말에는 한록과 윤감독에 대한 뿌듯함, 자랑스러움, 고마움 등이 담겨있었다. <삼일의 삶> 이후 몇 번이나 들은 ‘고맙다’는 말. 그 말에 한록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삼일의 삶>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준 영화였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는 한록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최과장 떠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달이 지났고.”
“그러게요. 여기서 우리 팀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엥? 무슨 얘기?”
“최과장님에 대한 얘기요.”
“푸하! 이팀장. 그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과거, ‘현차장이 최과장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까’란 얘기를 들었던 해외팀. 그때의 얘기를 꺼내는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남들이 하는 얘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 한록이 그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던 것이다.
“우리 팀에 대한 얘기라면 기억합니다.”
“아이고, 든든해라.”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한록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때, 옥상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해외 팀에 아는 사람 없냐?”
“친한 사람은 없는데. 왜?”
“우리도 타임지에 기사 낼 수 없나 물어보고 싶어서.”
“그거는 현차장이나 이한록 팀장한테 물어봐야 할 텐데.”
“하아...현차장이라.”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화제. 거기에 낯익은 장소까지. 사람들의 대화를 듣던 한록이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현차장을 바라보았고, 현차장 역시 같은 이유 때문에 한록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불과 몇 개월 전 이 곳에서 ‘현차장이 최과장의 자리를 메꿀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사람. 같은 화제. 그리고-
“가만 보면 말이야. 현차장도 꽤 한단 말이야.”
완전히 달라진 반응.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의 반응에 한록과 현차장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들어가세요, 차장님.”
현차장은 해외팀의 사무실로, 그리고 한록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현차장과 헤어진 한록은 복도에서 최경준과 유선을 발견했다. 둘은 함께 무언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색하지만 열심히 얘기중이 유선과 유선의 얘기를 경청중인 최경준. 둘 모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많은게 변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 책상에는 오늘 윤감독이 주고 간 선물이 놓여있었다.
‘최윤일 없이 해외팀이 잘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충분했다.
우리는 잘 해낼 것이다.
어제보다는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는 내일 더.
**
자신이 생각해도 멋진 팀원들의 활약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한록. 그때 한록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아까 최경준과 유선이 나누던 얘기에 대한 것이었다.
[팀장님!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시나리오 작업 착수했습니다!-유선]
이제는, 오랜 꿈이 실현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