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38화 (261/263)

바보 멍청이들이었다고.

‘빅6, 스크린 독점 의혹.’

내일 신문 1면은 이미 정해진 상황.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롬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고, 길버트와 눈이 마주쳤다. 분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길버트. 그에게 제롬이 마음으로 속삭였다.

‘내가 말했을 텐데.’

충분히 준비하고 와라. 그러지 못할 거면 아예 덤비지 마라. 이건 적이 아니라 오랜 동반자로서 하는 충고다.

왜냐하면.

‘CK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네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당할 테니까.

**

누가 봐도 CK의 승리로 끝난 이번 회의. 한록이 단상에서 내려오자, 유선이 달려와 말했다.

“팀장님! 반응 너무 좋아요!”

유선의 손에 들려있는 수십개의 명함. 그건 CK의 인터뷰를 따려는 기자들이 주고간 명함이었다. 유선의 말처럼 회의장에 있는 모든 기자들이 디즈니의 분한 표정을 찍고 있었다.

[저쪽도 찍어. CK 말이야.]

[CK 인터뷰 땄어?]

“팀장님. 케이트가 팀장님과 바로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거기에 CK에게 쏟아지는 관심들과, 타임지 편집장의 미팅 요청까지. 한록이 이곳까지 날아온 목적은 이미 차고 넘치게 충족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록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미스 킴. 인터뷰 고맙습니다.]

[유선. 알려주신 이메일로 연락하면 될까요?]

[오늘 발표한 자료 이메일로 다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유선에게 계속 명함을 주고 가는 기자들. 그리고...

[네, 이메일로 연락주세요. 고마워요, 로버트. 요한.]

너무나 멋지게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유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오래 지켜봐온 후배. 그 후배가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도와 줄만큼 성장했다. 한록 혼자 상대방을 때려잡을 때와는 또 다른 희열이 느껴지는 순간.

‘...기분 좋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트에게 향한 한록. 프레스 존으로 향하자, 케이트와 함께 있던 현차장이 벌떡 일어나 한록을 반겼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는 현차장. 그 미소를 보니 굳이 묻지 않아도 케이트와 대담의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얘기 나누세요.>

현차장이 둘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고, 한록은 케이트와 단 둘이 얘기를 시작했다.

[좋은 발표였습니다. CK에 대한 기사를 내고 싶은데, 인터뷰 일정을 잡고 싶군요. 언제쯤 통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역시나 CK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기로 결정한 케이트. 케이트의 말에 한록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CK의 역대 영화에 대한 기사인가요?]

[네. 아시아 영화사가 헐리웃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보여주고 싶군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삼일의 삶>이 개봉할 때가 되면 더 재밌는 기사거리가 하나 생길 겁니다.]

[재밌는 기사거리요?]

[네. 영화계가 전부 주목할 만한 사건이 나올 거라서요.]

[흐음.]

한록의 말에 케이트가 눈썹을 약간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좋아요. 미스터 현의 얘기를 들어보니, CK가 또 나름 재밌는 걸 준비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내미는 케이트.

[앞으로는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케이트가 내민 것은 명함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명함이 아니라...

[케이트 유펜]

[-개인 번호이니 유출하지 마시오].]

타임지 편집장의 개인 번호가 적힌 명함이었다.

‘...대박이군.’

누군가의 명함을 받고 짜릿한 기분이 든 적은 처음이다. 한록이 아주 조심히 케이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이 아닌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마세요. 제 연락은 되도록 당신이 받아줬으면 합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타임지 편집장의 개인번호. ‘너 아니면 너희 회사 누구도 못 받아볼 번호’라는 뜻이었지만, 타임지 편집장 정도면 그런 말도 오히려 황송할뿐이다. 한록은 얌전히 케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만약, 미스터리가 아주 바쁘다면...]

그리고 둘이 대화를 마치기 전. 케이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아주 뿌듯하고...

[방금 대화를 나눈 미스터 현 정도면 괜찮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마디를.

“이팀장! 무슨 얘기했어?!”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뜬 케이트. 그리고 저 멀리서 한록에게 달려오는 현차장과 유선. 그들과 함께 만든 오늘의 성과.

오늘 너무나 멋진 모습을 보여준 그들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해외팀이 최윤일 없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현주훈이 최윤일 대신이 될 수 있을까?

-김유선? 그 계약직 여자애?

언제나 자신의 팀원들을 의심 하던 사람들.

그들은 전부...

“현차장님. 유선씨.”

“네!”

“어!”

“우리 팀이 최고예요. 알죠?”

바보 멍청이들이었다고.

“너무 잘하셨어요. 정말로요.”

한록이 현차장과 유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CK ENM, 빅 6에게 특혜의혹을 제기하다.]

[만약 ‘식물’이 빅6만큼의 스크린을 약속받았다면?]

[CK는 그 어느 영화사도 보여준 적 없는 성공을 보여주고 있다.]

[빅6. 아시아의 한 영화사를 견제하다.]

협의회 회의가 끝나자 CK, 그리고 빅 6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들.

[한편, CK는 최근 어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삼일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관심이란 언제나 최고의 선물이다. 협의회 회의와 CK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삼일의 삶>까지 옮겨졌다.

[곧 알렉산드로의 영화가 개봉할텐데요. CK가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버렸군요.]

회의가 끝나고 며칠 후. 한록과의 통화에서 제롬이 회의의 반응을 얘기하며 말했다. 그러나 한록은 이 사람의 말이 그저 하는 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의 영화가 개봉하면 이 얘기는 곧 우스워질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게 될 겁니다.]

왜냐면 곧 알렉산드로 감독은 이 모든 걸 잊혀지게할 영화를 가져올테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8월. 드디어 알렉산드로의 영화가 개봉했다.

지구가 멸망해가는 시대, 웜홀을 통해 우주 여행을 하는 우주비행사의 얘기를 다룬 영화 <인듀어런스>-

부제 <인터스텔라>.

[기대하세요. 한. 이전까지는 보지못한 SF영화를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꼭 이 영화를 본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제롬과, 제롬의 말에 살짝 들킨 기분이 되어버린 한록.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록은 이미 미래를 보고 왔고, 이 영화가 SF의 새로운 역사를 쓸거란걸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대단한 영화지. 알고 있다. 올해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기억될 영화가 되겠지.’

따라서 한록이 궁금해하는 것은 영화의 성적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대체 닉이 이 영화를 어떻게 마케팅할까?’

바로 영화의 마케팅.

한록의 우상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마케터 닉. 그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인듀어런스>를 마케팅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을 초청하려나? 제롬 정도면 스티븐 호킹을 데려오는 것도 문제는 아닐 텐데.’

‘아니면 헐리웃 스타들을 대거 불러 모을지도.’

<인듀어런스>는 알렉산드로 감독의 오랜만의 복귀작이었다. 거기에 헐리웃의 대부 제롬 앤더슨의 회사이며, 그 곳엔 세계적인 마케터 닉까지 있다. 이 엄청난 라인업으로 <인듀어런스>가 대체 어떤 마케팅을 가지고 나올지 너무나 궁금한 한록.

‘뭐가 되든 대단한 스케일을 가져오겠지. 제롬과 닉이니까.’

그리고 한록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가버렸다.

<인듀어런스>가 가져온 예고편은 과연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했다. 다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오늘 <인듀어런스> 첫 예고편 공개한다고 합니다. 다 같이 볼까요.”

“오, 좋아!”

<인듀어런스>의 예고편이 공개되는 날. 해외팀에 걸린 TV화면으로 유튜브를 튼 한록. TV아래에 해외팀 팀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체 뭘 가져왔을까 궁금하네.”

현차장의 말과 함께, TV를 모두 뒤엎는 까만 화면으로 시작되는 <인듀어런스>의 광고가 시작되었다.

까만 화면과 정적. 그 가운데에는 지구로 보이는 창백한 푸른 점이 하나 떠있다. 그 상태로 30초 후. 화면에는 딱 두 문장이 등장했다.

[인듀어런스]

[알렉산드로 로게즈.]

“...이게 끝이야?”

그게 끝이었다.

“진짜로?”

정말로.

아무 정보도 없이, 오로지 감독의 이름만 말해주는 광고.

그 광고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였냐면...

“...아씨. 너무 멋있는데?”

알렉산드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이 나올만큼 멋있었다.

영화. 그리고 감독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지는 광고.

[알렉산드로 감독 4년만의 복귀작.JPG]

[지금 공개된 <인듀어런스>예고편.]

[이거 뭔 광고임? 했는데 알렉산드로 이름 뜨자마자 예매 했다]

[SF는 좀 생소한데 그래도 믿고 볼 수 있을 듯 ㅇㅇ]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의 반응도 엄청났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온갖 광고와 마케팅을 뿌려대는 영화계. 그런데 이 짧은 광고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 점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아무 말이 필요 없는 감독.’

“진짜 멋있네.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저걸 실제로 실행하는 것도.”

“그러게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해도, 잘될까 무서워서 시도 못할 것 같은데...”

“그만큼 잘 될 거란 확신이 있었던 거죠. 아마 그냥 내보낸 게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하고 내보낸 걸 겁니다. 분명 대성공할거예요.”

한록의 예상은 적중했다. <인듀어런스>는 정말로 그 달의 극장가를 다 삼켜버렸고, 알렉산드로 감독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이 되어버렸다.

[<인듀어런스>의 흥행신화]

[알렉산드로 감독이 또 한번의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sf영화 중 <인듀어런스>의 기록을 뛰어넘은 것은 알렉산드로 감독의 전작 <판도라>뿐이다.]

[극장가의 관객들은 모두 <인듀어런스>로 몰려들고 있다. 이는 <식물> 이후 역대 최고의 관객 선호도이다.]

[올 한해 극장가에서는 <식물>과 <인듀어런스>외 다른 모든 영화가 실패했다.]

<시험>에 대한 얘기가 잊혀질 정도로 영화계를 뒤흔든 <인듀어런스>에 대한 얘기. 그러나 그럴수록 해외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릴 뿐이었다.

“지금 알렉산드로 감독 광고비가 2억부터 시작한대. 흐흐. 우린 오백만원으로 찍었는데.”

“벌써부터 ‘삼일의 삶’에 대한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CK가 준비중이고 알렉산드로 감독이 극찬했던 얘기라고요.”

왜냐면 알렉산드로 감독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삼일의 삶>에도 이득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듀어런스>는 전에 없던 흥행기록을 달성하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모든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름 한번 알리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내일부터 <삼일의 삶>광고 시작됩니다.”

이제부터는 <삼일의 삶>이 등장할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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