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37화 (260/263)

이한록 타임이다.

“차장님이 짜주신 부분이니까요. 앞부분은 차장님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현차장과 함께 짠 프레젠테이션 파트를 얘기하는 한록. 전반부에서 한록이 유머를 잔뜩 해놓고, 뒤에 가서 갑자기 ‘너희를 죽여버리겠다’라고 나오면 두 파트 모두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어, 어. 어...”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머뭇거렸다.

필름포럼 협의회.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계 회의장이다. 거기에 한록과 해외팀을 때려잡겠다고 빅6까지 몰려온 상황. 디즈니 스튜디오. 워너 브라더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설. 세계적인 영화사들을 상대로 한록과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한다. 현차장은 그 사실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곧 이어질 현차장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해보자!”

이제 현차장은 한록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현차장의 말에 씩 미소를 짓는 한록. 현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록이 바로 디즈니쪽을 바라보았다. 디즈니 역시 ‘잘 걸렸다’라는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했다.

[협의회가 CK ENM 위주로 스크린 배정을 진행했다는 오해에 대해 해명 부탁-]

[네. 맞습니다.]

[...네?]

[오해가 아니라, 협의회가 CK를 위해 스크린을 몰아주었습니다. 그 부분 CK ENM의 브리핑 시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주 명쾌하게 디즈니와의 설전을 끝내버린 한록. 디즈니쪽 사람이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제롬이 빠르게 발언권을 가져가버렸다.

[스튜디오 B 발언 시작하겠습니다.]

“팀장님, 나이스샷!”

“차장님. 지금 바로 준비해주세요.”

“그래!”

제롬이 발언하는 사이 프레젠테이션 파트를 나누는 한록과 현차장. 그렇게, 해외팀 최고의 암살단이 조직-

“팀장님!”

되는가 싶었으나.

이번엔 유선이 어딘가를 보고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또 무슨 일입니까.”

꼭 ‘이거면 됐다’ 싶을 때 일이 터지고는 하는 법. 그러나 유선이 가리킨 곳에는 아주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회의장에 막 입장해서, 기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금발 머리의 중년여자.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달린 출입기자 명찰.

“타임지 편집장이에요!”

<식물> 당시 한국에 방문했던 <타임지>의 편집장, 케이트였다.

[케이트?]

[케이트가 무슨 일이지?]

놀란 것은 CK ENM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케이트의 등장을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방문이 갑작스러운 방문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안녕하세요.]

케이트가 한록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보러 온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놀란 얼굴의 한록과 유선. 둘에게 대답을 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불렀어.”

얼떨떨한 표정의 현차장이었다.

“차장님?”

“최과장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라고 미국 언론사 명단 주고 갔는데...혹시나 해서 여기 오기 전에 자료 보내봤거든. 그간 CK가 헐리웃에서 어떤 식으로 활약했는지 보내고, 그걸 이번에 여기서 발표할 거라고. 근데 진짜 올 줄은...”

그러니까, 케이트는 현차장이 불러서 CK의 활약상을 보러 왔다는 것. 현차장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보낸 메일이 ‘그’ 타임지의 편집장을 소환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잘만하면 CK의 헐리웃 일대기가 타임지에 실릴지도 모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한 건이긴 했다.

“아니? 아닌가? 내가 착각한 건가? 우리를 보러온 게 아니라...”

“그, 그럴까요? 디즈니를 취재하러 온 걸 수도...”

“아닙니다. 제일 먼저 우리한테 인사했잖아요. 차장님 메일을 보고 온 것 맞습니다.”

셋 중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중인 한록. 한록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큼 차장님 메일이 매력적이었던 거예요. 차장님. 지금 바로 가서 인사 나눠주세요. 그리고 CK의 발표 차례에서는 계속 케이트 곁에서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그래! 그럼 내 파트 발표는 어떡하지?”

“어쩔 수 없죠. 빼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가자.”

“...잠시만요!”

그렇게 결정을 내린 해외팀. 그러나, 이번에도 누군가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한록과 현차장을 멈춰세운 사람은 바로 유선이었다.

“현차장님 파트, 저도 다 외웠습니다!”

그리고 유선은 엄청난 얘기를 건넸다.

자기가 담당하지도 않은 영어 프레젠테이션 대본. 그걸 다 외웠다고 말하는 유선. 거기에 유선이 ‘저도 외웠다’고 말할 정도면 그냥 내용만 외운게 아니라 완벽하게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었다.

“...왜요?”

유선의 말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한록. 그 말에 유선이 답했다.

“팀장님이...늘 너무 멋있어서요. 발표하실 때마다 저도 집에서 계속 연습했어요.”

“...발표할 때마다 라는 건...”

“이번 것만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 하셨던 자료들 전부 외우고 있어요.”

‘한록이 발표한 모든 대본을 외우고 연습했다’라는 유선.

‘한록처럼 되고 싶다.’는 유선의 말은 말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현차장님 파트 할 수 있어요.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당연히 괜찮죠. 잘해왔을 거 아니에요.”

한록의 얼굴에 떠오르는 기쁨. 한록은 뿌듯한 미소를 계속 억누르며 현차장과 유선에게 말했다.

“차장님. 케이트 담당해주세요.”

“어, 그래.”

“유선씨는 저랑 같이 발표 해주시고요. 전반부요.”

“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자기 몫을, 아니, 누구도 해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일들을 해주는 현차장과 유선.

둘을 바라보던 한록이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고, 또 그동안 서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감동하기엔 일렀다.

[CK ENM. 다음 순서 준비해주세요.]

진짜 활약은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까.

[CK ENM. 준비 끝났습니다.]

[네.]

“유선씨, 갑시다.”

“네!”

한록의 말에 유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록을 따라 회의장 앞으로 이동했다.

회의장 맨 앞의 단상에 선 한록. 전 세계에서 온 카메라와 세계를 주름잡는 영화사들. 그들의 앞에 선 한록. 그러나 한록의 눈에 보이는 건 케이트 옆에 앉은 현차장과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유선뿐이었다.

모든 이의 꿈이라 할 수 있는 헐리웃. 그 곳에 함께 선 나의 동료들.

[CK ENM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자, 봐라.

내가.

[안녕하십니까. CK ENM, 유선킴입니다.]

아니, 우리가 왔다.

**

[‘수면’, ‘시험’, ‘마지막 공연’. CK ENM이 최근 2년간 헐리웃에 선보인 영화입니다. 매 영화마다 관객 수가 2배씩 증가했습니다.]

유선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도 않고 발표를 시작했다.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가는 유선. 유선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PPT에 나와있는 관객 수의 막대 그래프가 쑥쑥 성장했다.

[그리고 ‘식물’에서는 직전 작품의 10배를 기록했습니다.]

그 그래프가 <식물>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천장을 뚫어버리는 쾌감.

[이대로 가면 화면이 모자르겠네요. 다행히 여태까지 중에선 ‘식물’이 마지막 작품입니다. 화면에 다 담지 못할까봐 ‘오징어 서바이벌’의 제작을 잠깐 중단했죠. 정말입니다.]

거기에 더해지는 작은 유머까지. 회의장에서 퍼지는 웃음에 유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롬이 ‘꽤 하는군’이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으쓱였다.

[아시아의 작은 영화사였던 CK가 헐리웃에서 이렇게 큰 성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모두 헐리웃의 파트너사들 덕분입니다. 넷플릭스. 유니버설. 그리고 여기 필름포럼 협의회까지.]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얘기한다고 했죠? 빨리 말하세요.]

[질문은 브리핑이 끝나고 받겠습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디즈니의 공격도 잘 막아내는 유선. 그러나 디즈니가 여기서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까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말해주세요.]

[질문 시간에 말씀해주세요.]

[지금 당장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디즈니는 끝까지 유선을 물고 늘어졌다. 빅6는 그간 유선의 말처럼 ‘아시아의 조그만 영화사’인 CK ENM에게 여러 번 공격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그걸 두고 보지 않겠다고 빅6 측에서도 이를 갈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좋습니다. 그럼 지금 말씀드리죠.]

“팀장님.”

“들어가세요, 유선씨.”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네, 디즈니 스튜디오의 길버트 제임스. 질문 하시죠.]

여태까지 CK에게 지적을 하던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얘기하는 한록. 그러나 디즈니의 길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히 내 이름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듯한 얼굴. 괜히 빅6의 사람이 아니었다.

[<식물>에 배정된 협의회의 스크린은 총 3천개였습니다. 협의회가 보유한 스크린 중 70%가 <식물>에 배정된 거죠. 그 때문에 협의회 소속 다른 영화들은 평균적으로 5% 정도의 스크린만 배정 받았습니다. 기존에 10%를 배정받은 거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들었군요. <식물> 때문에 다른 영화들이 스크린을 뺏겼다. 이게 협의회에서 한 회사의 편의를 봐주고 스크린을 독점한 게 아니면 뭔지 알고 싶군요. 이건 협의회가 <식물>을 위해 스크린을 낭비한 겁니다.]

길버트의 말은 괜한 트집이 아니었다. 확실히, <식물>의 스크린에서 지적이 나올만한 부분을 아주 정확히 공격한 길버트의 발언.

[유리. 사진 찍어.]

[카메라 들고 미리 기다리고 있어.]

[사이드로 옮겨. 디즈니랑 CK 한 컷에 담기게.]

길버트와 한록의 등장에 회의장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셔터를 눌러댔고, 다른 회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길버트와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제 수치에 틀린 부분 있습니까?]

[지금이다. 찍어.]

빅6와 CK가 제대로 한판 붙는 순간이었다.

[아뇨. 정확합니다.]

길버트의 말에 다시 한번 아무런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그 말에 길버트가 날카로운 눈으로 한록을 노려보았다.

[이번 <식물>에서 CK가 협의회의 특혜를 받았다는 점, 인정합니다. 스크린 독점은 영화계를 위해 꼭 개선해야 하는 문제란 점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록이 화면을 가리켰다.

[그래서 우리 CK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확실히, 특정 회사들에게 스크린이 몰려있는 구조였습니다.]

그 곳에 나온 것은 올해 협의회의 스크린을 사용한 회사들. 스크린 사용수 상위 회사는 꼴찌 회사들과 자그마치 300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회사들의 이름은...

[디즈니 스튜디오. 20세기 폭스. 콜롬비아 픽쳐스.]

빅6의 이름이었다.

CK보다 2배는 높은 스크린 점유율. 그 중에서도 가장 높게 올라가 있는 디즈니의 이름. 자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화면 속에 보이는 자신의 회사에...

[고작 이겁니까?]

길버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빅6는 원래 3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배정받습니다. 특혜가 아니라, 원래 필름포럼 규정이 그렇다는 거죠.]

한록의 말에 길버트가 막힘없이 답했다. 스크린 이용률이라니.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이미 예상한 공격이었다.

‘이 정도에 놀아나다니.’

제롬과 넷플릭스, 유니버설 모두가 우스웠다.

그런 생각에 길버트가 턱을 괴고 한록을 바라보았고...

[고작 이건데, 조금 더 궁금한 부분이 있더군요.]

그때부터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목한 부분은 여기입니다. 스크린 이용수. 그리고...실제 관객수.]

한록이 다음 화면에 가져온 것은 ‘스크린 당 관객비율.’

[협의회에서 나눠준 스크린에 실제로 관객이 얼마나 들어왔냐죠.]

한마디로 정말 그 스크린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자료였다.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길버트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료를 조사하고,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다.

[제롬 앤더슨! 이건 내부 자료입니다!]

[국회에서 받은 자료입니다. 공익을 위해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길버트의 말을 딱 잘라버리는 제롬. 길버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한록이 말을 이었다.

[<식물>은 협의회가 배정해 준 스크린 중 90%를 매진시켰습니다. 여태 기록 중 가장 높은 수치지만, 100%를 채우지 못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그럼 디즈니를 볼까요. 매진을 만든 스크린이 20%군요.]

<식물>과 디즈니 영화의 어마어마한 격차.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어느 쪽이 더 스크린을 줄만한 곳이었는지 드러난 상황이었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 협의회를 등에 업은 회사. 주제에 맞지 않게 스크린을 독점한 회사. 그걸 낭비한 회사.]

한록이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똑똑히 말했다.

[그건 당신입니다.]

한록의 말에 길버트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길버트와, 숨죽이고 있는 빅6.

‘그렇다면 지금부턴 진짜 이한록 타임이다.’

[길버트. 제 수치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아까 길버트가 했던 질문.

[...]

[대답 하세요.]

[이 부분은, 차후에...]

[지금 당장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길버트가 했던 말.

-파바바박!

조용해진 회의장에 끝없이 울리는 기자들의 셔터소리.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단상 위의 한록.

[이한록 팀장이라고 했나요.]

플래시 속 한록의 모습. 그리고 케이트의 질문. 그 두가지를 지켜보며 현차장은 생각했다.

[저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더 듣고 싶군요.]

‘됐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