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34화 (257/263)

우리팀 잘 부탁해요.

“드디어!”

<삼일의 삶>이란 말에 현차장이 반갑게 외쳤다. 현차장만이 아니라 유선과 하대리 역시 흥분한 표정이었다. 부산영화제에서 <삼일의 삶>이 큰 성공 이룬 이후 마케팅 부서 전체가 ENM의 유력 부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극장 개봉도 어려운 인디 영화에서, 그해 CK ENM의 자부심이 된 영화 <삼일의 삶>. 그러나 한록은 어찌된 일인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삼일의 삶>의 해외개봉을 미뤄왔고, 판권조차 팔지 않았다.

“이제는 때가 된 거야?”

“네.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입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원래는 알렉산드로 감독이 있는 스튜디오 B에게 판권을 넘길 거였지만...’

처음 한록은 스튜디오 B에게 <삼일의 삶>의 판권을 넘길 생각이었다. <삼일의 삶>은 대단한 영화인 동시에, 아주 작은 규모의 다큐멘터리 영화이기도 했다. 그런만큼 능력 있는 배급사가 붙어야 <삼일의 삶>을 제대로 마케팅할 수 있었다.

한편 스튜디오B는 <삼일의 삶>에 큰 관심을 보인 알렉산드로 감독이 있고, 천재 마케터 닉 해리스가 있으니 <삼일의 삶>을 흥행시켜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스튜디오 B 정도는 되어야 <삼일의 삶>을 넘길 수 있다.’

...라는 계산을 하던 한록.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삼일의 삶>을 유통할 수 있다.’

이제는 CK ENM에게도 미국에서의 입지, 유통망, 스크린 수, 관객들에 대한 분석 등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한 많은 요소들이 주어진 상황. 그렇다면 굳이 다른 회사에 <삼일의 삶>을 넘길 필요는 없었다.

“<삼일의 삶>이라. 반갑네. 개봉은 언제야? 6월? 이것도 협의회한테 스크린 받아올까?”

나름의 추억이 있는 영화에 의욕이 생긴듯한 현차장. 현차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협의회에 전화를 걸 기세였다.

“제가 전화해보겠습니다!”

“6월이면 스케일 큰 영화들 잔뜩 나오겠죠? 7월쯤으로 미루는 건 어떨까요?”

현차장만이 아니라 유선과 하대리 역시 들뜬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삼일의 삶>의 개봉은...

“아뇨. 9월입니다.”

“...거의 반년 뒤 아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왜 그렇게 뒤에 들어가는 거야?”

“8월에 무서운 상대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정면으로 붙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무서운 상대가 있어서 피한다고? 이거 이팀장이 한 말 맞지?”

“저도 무서운 상대는 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군데?”

한록이 <삼일의 삶>의 개봉을 미룬 이유. 지금 미국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CK ENM과,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천재 한록. 그런 한록이 피하려고 하는 상대는 바로...

“알렉산드로 감독이요.”

전설적인 거장 감독이었다.

“협의회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신작이 8월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아마 하반기는 알렉산드로 감독이 전부 가져갈 겁니다.”

회귀 전에도 알렉산드로 감독의 이번 영화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보다도 더 상황이 좋아졌다. 빅6를 잡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제롬. 그리고 무엇보다 닉 해리스의 합류까지. 알렉산드로 감독의 이번 신작은 올해를 전부 뒤흔들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개봉을 더 미루는 게 낫지 않나요? 내년이라거나...”

한록의 말에 유선이 질문을 던졌다. 아예 신작의 열기가 식은 시점에서 시장에 진입하자는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지적이었지만, 한록은 유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거장 감독의 신작. 그 영화는 분명, 아주 무섭고 피해야 할 상대지만...

“아뇨. 사람들이 그 영화를 잊으면 안 돼요.”

“왜요?”

“그게 <삼일의 삶>에 도움이 될 거라서요.”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 법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해외팀.

“유선씨. 나는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

하지만 정작 현차장이 향한 곳은 옥상이었다. 옥상 구석진 곳에서 담배 한 대를 물고 생각에 잠긴 현차장.

‘<삼일의 삶>이라.’

해외팀, 그리고 현차장을 이만큼 올려준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삼일의 삶>. 그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지금 현차장이 생각에 잠긴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었다.

“이번에 제작부 윤과장 해외팀으로 옮긴다더라.”

“왜?”

“해외팀에 최윤일 빠졌잖아.”

“아, 그랬지. 요즘 인사이동이 너무 많아서 잊어버렸네.”

바로 지금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 이 얘기 때문에.

현차장이 있는 곳은 옥상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 사람들은 현차장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금 해외팀에 누구 있더라?”

“송과장. 양차장. 그리고...현차장.”

“아, 나쁘지 않네.”

“그치. 다 괜찮아. 근데 최윤일 정도는 아니긴 해.”

“그건 그렇지.”

사람들의 대화 속에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 그리고...

“하필 이 시기에 최윤일이 빠지다니. 해외팀도 브레이크 좀 걸리겠다.”

해외팀에 대한 우려.

팀의 주요인력이 빠진 상태로 이전만큼, 아니, 이전보다 더 멋진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건 지금 해외팀이 가진 숙제였다.

‘내가 최과장만큼의 몫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현차장.

“담배 끊으시라니까요.”

그때, 현차장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팀장.”

한록이었다.

현차장처럼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들고 있는 한록. 한록 역시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얘기를 들었든, 말든,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최과장이 사라진 해외팀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으니까.

“차장님.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현차장이 부담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말한 한록. 그러나 현차장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현차장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한록에게 말했다.

“사실 최과장이랑 나가기 전에 술 한잔 했거든.”

현차장이 말하는 것은 최과장이 떠나기 며칠 전에 있었던 얘기였다.

‘차장님. 술 한잔 사주세요.’

어느 날 현차장에게 먼저 대화를 요청한 최과장. 둘은 함께 회사 근처 술집으로 향했고, 최과장은 현차장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차장님. 제가 예전에 차장님을 좀 가볍게 생각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는 차장님이 존경할만한 분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최과장은 과거 자신이 현차장을 무시했던 시절의 얘기를 꺼냈고, 사과를 건넸다.

‘에이, 괜찮아. 그때는 그럴만 했어.’

현차장은 아주 흔쾌히 최과장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현차장은 예전에 최과장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무능하고,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최과장만이 아니라 예전의 자신을 보고 회사 모두가 했던 생각이었다. 오히려 현차장은 최과장이 그걸 직접 사과한다는 점에서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고, 그걸 인정하고 사과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나가는 마당에 뭐 그런 걸 신경 써.’

‘나가는 마당이니까 해야하는 말이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현차장에게 또 다른 용건을 꺼내는 최과장. 오늘 최과장이 현차장을 부른 이유는 사과말고 다른 이유도 있는 모양이었다. 최과장이 현차장의 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협의회가 중간에 꼈으니까, 광고 업체들이랑 컨택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예요. 요즘 보니까 하대리님이 잘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차장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언론 쪽은 차장님이 알아서 잘 해주실 거니까 넘어갈게요.’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서 하나하나 얘기하는 최과장. 최과장은 한참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했다. 최과장의 진지한 얼굴에 현차장 역시 사뭇 진지한 태도로 최과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장님.’

‘응.’

최과장이 지금 이렇게 현차장을 붙잡고 얘기하는 이유. 그리고 그가 오늘 현차장을 부른 이유는-

‘우리팀 잘 부탁해요.’

자신이 떠난 뒤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

“최과장이 나한테 우리팀을 부탁한다고 하더라고. 웃기지. 그런 말을 나한테 하다니.”

한록에게 최과장과의 대화를 전해주는 현차장. 최과장은 현차장이 자신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현차장에게 팀을 부탁했다. 예전 같았으면 현차장이 ‘난 그런 거 못한다’라며 손사레를 쳤을 일이었다.

“그런 말을 나한테...”

하지만 지금 현차장의 모습은 좀 달랐다. 현차장은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최과장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고, 다정하고, 소심한. 언제나와 같은 현차장의 모습.

하지만 그 눈에는 이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다.

현차장의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과연 최과장이라는 슈퍼플레이어가 사라진 해외팀이 괜찮을 것인가. 해외팀의 ‘괜찮지만 최윤일 정도는 아닌’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꿀 수 있을까. 해외팀이 또 이한록 원맨팀이 되는 게 아닐까. 지금 해외팀은 아주 큰 숙제를 마주한 시점이었고, 한록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 팀은 잘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이팀장. 걱정하지 마. 내가 잘 해볼게.”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현차장의 달라진 모습에 한록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

그날 저녁. 한록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한.]

한록이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스튜디오B의 제롬이었다.

[<식물>이 아직도 박스오피스를 차지하고 있군요. 역시 한은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여러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는 제롬. 최근 제롬은 빅6 위주로 움직이는 영화계를 바꾸려는 중이었고, 그걸 위해 협의회를 통해 <식물>에게 스크린을 내주었다. 그리고 <식물>의 성공 덕분에 제롬의 계획들 역시 잘 이뤄지는 중이었다.

[최경준 본부장이 아니라 한과 연락하는 건 오랜만이군요. 어떤 용건입니까. 아마 마케팅에 대한 거겠죠.]

제롬은 단번에 한록의 용건을 파악했다. 제롬과 최경준은 지금 신생영화사의 대표들로서 많은 만남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최경준이 아닌 한록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럼 영화 외에 다른 용건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맞습니다. 올해 ‘삼일의 삶’을 개봉하려 하는데, 알렉산드로 감독의 새로운 영화도 8월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튜디오 B와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역시.]

한록의 말에 제롬이 웃으며 답했다.

[그런데 한. 미안하지만 개봉 일정을 조율해보자는 얘기를 할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협상은 필요 없어요. 한이 원하는 아무 때나 <삼일의 삶>을 개봉하세요.]

제롬의 웃음소리가 낮아졌고 싸늘한 말이 이어졌다.

[난 한이 어떤 영화를 가져오든 이길 자신이 있거든요.]

‘너흰 내 상대가 안 된다’는 제롬의 말. 하지만 한록은 제롬의 말에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신작이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한록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전화를 한 겁니까?]

<제가 하려는 협상은 다른 거라서요. 저는 알렉산드로 감독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삼일의 삶’은 9월에 개봉할 겁니다.>

[...그럼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한록은 전략은 제롬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록은 애초에 알렉산드로 감독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신작이 하반기를 집어삼킬거다. 알렉산드로 감독도 엄청난 관심을 받겠지.’

싸워서 이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상대. 그런 상대가 있다면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알렉산드로 감독의 신작 마케팅과 유통을 돕겠습니다. 특히 한국 시장에 진출하는 부분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외에도 원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와 손을 잡겠다 이겁니까?]

<네, 맞습니다.>

[그래서 ENM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입니까?]

그건 상대와 맞서 싸워서 패배하는게 아니라-

<알렉산드로 감독이 ‘삼일의 삶’ 광고에 출연해주었으면 합니다.>

그 사람과 한 편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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