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33화 (256/263)

선을 넘은 말(2)

“<시험>의 아이디어는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국다운 좀비영화는 뭘까?’”

“모두가 21세기에 무성 영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죠. 전 이미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상황이었지만, 그 어떤 회사도 무성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CK가 유일하게 그걸 허락한 거죠. 그렇게 <마지막 공연>이 탄생했습니다.”

“<식물> 삼부작을 동시에 개봉하기로 결정한 건 CK의 결정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죠. 지금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수면>. <마지막 공연>. <식물>. 최근 헐리웃을 휩쓸고 있는 한국 영화에 대한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번 촬영. 촬영은 감독들, 그리고 마케팅 책임자인 한록의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좋아. 좋아요.]

레이커는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특히 레이커는 한록의 인터뷰에 아주 좋은 반응을 보내주었다.

[잠깐, 미스터 이. <식물>의 동시개봉을 결정한 부분에 대해서 더 말해주세요. 실패할 거란 걱정은 없었나요?]

[<마지막 공연>을 무성영화로 결정한 것도 이한록 팀장의 결정이었다고요?]

[<식물>의 탈출 게임은 어디서 모티브를 얻은 거죠?]

[이 마케팅이 전부 본인 아이디어라는 거죠? 다른 영화의 마케팅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있나요?]

[다음 영화는 뭘 준비하고 있나요?]

[<식물>을 동시개봉하기로 결정한 건 이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해야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차례로 개봉된다면 더 안정적이었겠죠. 하지만 관객들이 지금처럼 주인공과 똑같은 상황을 느끼진 못했을 겁니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혼란이요.]

몇 번이나 한록에게 추가 질문을 던지는 레이커와, 그에 대답하는 한록. 그때마다 레이커는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최과장이 얘기했던 ‘능력은 현장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보여주는 레이커.

“이팀장. 이 정도면...꽤 괜찮지?”

“네. CBN측이 생각보다 협조적이네요.”

그렇게 모두가 안심하려는 때. 최과장의 말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미스터 이. 인터뷰가 아주 흥미롭네요. 여태 CK의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당신의 역할이 아주 큰 것 같군요.]

레이커가 한록의 얘기에 큰 흥미를 느꼈으며...

[당신과 CK에 대한 인터뷰를 추가하고 싶은데요.]

현장에서 바로 인터뷰의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다.

**

[CK에 대한 인터뷰를 추가하겠다고요?]

[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요.]

갑자기 인터뷰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말하는 레이커. 한국영화뿐만이 아니라 CK에게까지 조명을 비춰주겠다. CK와 한록의 입장에서는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려면 추가로 인터뷰할 사람이 필요해요. 헐리웃과 한국 영화계 양쪽에서 근무한 사람의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한록의 마케팅을 설명해줄 사람이요.]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또 새로운 게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윤일이면 딱 좋겠는데...윤일은 정말 어려운 겁니까?]

[출국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아마 지금 공항에 있을 겁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요. 누구 없습니까?]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레이커의 말에 갑자기 새로운 게스트를 찾게 된 해외팀. 그러나 지금 당장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록. 섭외는 아직 입니까?]

[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안에 섭외는 가능한 겁니까?]

[확실히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내일은 <식물>의 촬영지로 촬영을 가야해요.]

한록의 말에 인상을 쓰는 레이커. 아무래도 스케쥴이 빠듯한 모양이었다. 레이커는 노트를 펼치고 작가와 함께 촬영일정을 확인했다.

[내일 조금 더 촬영을 하는 건?]

[어려워요. 이동 시간을 생각해야 하잖아요. 내일 바로 출국까지 해야해요.]

[으음. 그렇네.]

작가와 얘기를 나누던 레이커가 펜을 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가에게 말했다.

[마케팅 얘기는 빼고 원래대로 가야하려나?]

CK. 그리고 한록의 마케팅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 그걸 눈앞에서 놓치기 직전이다.

[잠시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한록이 얼른 레이커에게 말했다.

[게스트 섭외가 가능한 겁니까?]

[한 번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알았어요. 게스트가 오려면 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합니다.]

레이커는 조금 더 시간을 주었고, 해외팀은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붙잡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윤과장님. 이한록 팀장입니다.”

“강차장! 나 현주훈인데!”

“네, 오팀장님. CK ENM 송과장이에요.”

“어. 민주야. 나 유선인데!”

“이팀장. 강차장 지금 장모님 댁이래!”

“샬롯테 오팀장도 안 된대.”

“유부장님 전화 안 받으세요!”

“레이커가 장과장님은 경력이 너무 짧대요!”

다급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해외팀 팀원들. 그러나 레이커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으며...

[어쩔 수 없네요. 그냥 원래대로 진행하죠.]

레이커가 아쉽다는 듯 한록에게 말했을 때.

[잠시만요. 여기 게스트 도착했습니다.]

레이커의 말에 누군가 대답했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한록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팀장님. 내가 연락하라 그랬잖아요.”

최과장이 한록에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

[오, 윤일!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레이커랑 일할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레이커. 빨리 인터뷰 진행할 수 있을까요?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

[그거 좋지. 우리도 바쁘다고.]

최과장은 카페에 등장하자마자 바로 인터뷰에 돌입했다.

[사실, 몇 년전까지 헐리웃에서 한국 영화는 비인기 장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장르를 박스오피스까지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역시 마케팅의 힘이 컸죠. <식물>의 마케팅이 공개된 후 헐리웃 사람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묻더군요. ‘저거 또 너희 회사냐’라고요.]

갑작스러운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최과장은 준비된 것처럼 답변을 이어나갔다. 최과장의 멋진 인터뷰에 레이커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벽해. 이대로 갑니다!]

빠르게 종료된 최과장의 인터뷰.

“죄송합니다,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최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향했다. 한록이 최과장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최과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공항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헬프 요청이 들어와서요.”

한록의 질문에 최과장이 가리킨 것은 유선이었다.

“...죄송합니다!”

한록의 시선에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선. 그 모습에 한록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유선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과장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출국은요?”

“공항으로 가다가 급하게 들렀어요. 지금 바로 가봐야 합니다.”

“시간 괜찮겠어요?”

“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밟아봐야죠.”

“몇 시 비행기인데요?”

“9시요.”

그렇게 말하며 차에 올라타는 최과장. 그 모습에 한록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공항까지 도착하기에 아주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시간이 없었다. 대신 한록은 최과장의 차 문을 닫아주며 말했다.

“과장님.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그 말에 최과장이 미소를 지었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싫어요. 저도 이 정도는 해주고 싶어요. 이유는 알죠?”

그리고 한록 역시 최과장의 답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 한때는 한록이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한때는 한록의 라이벌이었고, 한때는 한록의 동료이며, 부하이고, 같은 팀이었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다른 회사로 가게 된 최과장. 오늘 그가 여기까지 달려와 준 이유는, 그 긴 시간동안...

“우리 이제 친구하기로 했잖아요.”

그들이 결국 친구가 됐기 때문에.

친구. 아무런 이득이 없더라도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사이. 회사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관계이며, 한록은 꿈도 꾸지 못하던 일. 그러나 오늘 최과장이 한록에게 해준 말.

자신의 손목에 단단히 묶인 채 빛을 뿜고 있는 최과장의 실에 한록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과 보냈던 시간도, 함께 겪었던 일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고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뿐이었다.

“고마워요, 친구.”

이제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의 인사.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고, 한록에게 답했다.

“다음에 또 봐요, 친구.”

그 말과 함께 최과장의 차가 인천공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식물>을 동시개봉하기로 결정한 건, 이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해야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차례로 개봉된다면 더 안정적이었겠죠. 하지만 관객들이 지금처럼 주인공과 똑같은 상황을 느끼진 못했을 겁니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혼란이요.]

그리고 일주일 뒤. 미국 시간으로 화요일 새벽 1시. 한국 영화 특집으로 기획 된 <나잇 앤 데이>가 방영되었다.

[kelsy : 어제 <나잇 앤 데이> 본 사람?]

[cho: 오랜만에 재밌는 에피소드더라고. 확실히, 요즘 영화 트렌드는 한국 영화지.]

[orion: 드디어 사람들이 한국영화의 진가를 알아가는군. 난 <시험>때부터 한국 영화의 팬이었어.]

[victor: ㄴ그때면 1년 전 아니야? 난 5년 전부터 서감독의 팬이었는데.]

[romeo: 정말 한국영화가 유명해졌나봐. 나만 좋아하는 장르였는데.]

[bren: ㄴ너 어제 <식물>로 한국 영화 처음봤다고 글 쓰지 않았어?]

방송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호의적이었으며...

“하정엽.”

“네, 회장님.”

“이 뒤에 뭘 준비 중이냐.”

“스크린 max관이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오징어 서바이벌>이 조만간 촬영을 시작합니다.”

“그래. 제대로 보여줘라.

이제 정말 때가 왔다.”

영화계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

<나잇 앤 데이>가 방송된 지 이틀 후. 해외팀 정기회의에 참여한 한록이 평소보다 더욱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나잇 앤 데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식물>과 한국영화 에피소드가 최근 방송 중 가장 시청률이 높은 회차였다고 합니다.”

<식물>의 엄청난 기록. 헐리웃에서 CK의 입지. 한국 영화에 대한 시장의 관심.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는...

“다음 영화는 <삼일의 삶>입니다.”

이 때를 위해 아주 오래 아껴온 온 영화를 보여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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