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은 말(1)
영화계에서 ‘박스 오피스를 차지했다’란 말의 의미는 남다르다.
첫 번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 영화가 재밌다는 걸 대중에게 입증했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한국영화의 돌풍]
[한국의 공포가 미국을 삼키다.]
[박스 오피스에 ‘미국’은 없다.]
바로 언론의 조명을 받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초 1,2,3편 동시개봉.]
거기에 ‘최초’까지 더해지면 얘기는 한층 달라진다.
[오늘은 헐리웃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영화, <식물>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최근 한국영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죠. 특히 <식물>은 역대 가장 성공한 공포영화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식물>이 개봉 3주차에 1주차의 기록을 넘어섰군요.]
[세 편을 동시에 개봉했고, 세 편 모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지금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미국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다고요.]
[요즘 영화계는 전부 <식물>에 빠져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오늘 식물을 본 사람은 내일 식물의 2편을 보고, 그 다음날은 식물의 3편을 보니까요. 다른 영화를 볼 틈이 없어요.]
[최근 극장가를 점령한 사람을 모셔볼까요. 오늘의 게스트, 한국의 이도윤 감독입니다.]
하루 종일 <식물>에 대해서 떠드는 미국의 연예방송들.
박스 오피스 독점. ‘영화계 최초’로 삼부작 동시개봉. 거기에 영화의 완성도까지. 모든 언론이 <식물>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고, 3월 미국 영화시장은 완전히 <식물>이 집어삼키게 되었다.
“와, 씨. <식물> 지금 한 달 째 1위인데?”
“나 꿈꾸는 거 같아. 한국 영화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 2위, 3위래.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식물> 때문에 요즘 미국에서 미팅 요청 들어오더라. <식물> 같은 거 어디 없냐고 계속 물어봐.”
“어, 나도 어제 미국이랑 미팅하고 왔는데. 이 새끼들, 두 달 전까진 우리랑 미팅도 안 해주더니.”
“우린 CK랑 이한록한테 고마워해야해. 거기 덕분에 미국 분위기 엄청 바뀐 것 같더라.”
“하...진짜. 그 놈의 이한록. 이제 밉지도 않아. 그 놈은 우리가 미워할 레벨도 아니야.”
헐리웃의 달라진 태도에 깜짝 놀란 한국 영화계 사람들. 확실히, <식물>은 이전까지의 영화와는 반응이 달랐다.
<시험>과 <수면>. <마지막 공연>까지. 해외팀의 모든 영화가 성공했으나, 미국에서 먼저 영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미국 영화 위험합니다. 정말이에요. 미국이 문화침공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점입니다.]
[대체 언제부터 미국인들이 외국 영화에 이렇게 관대했던 거죠?]
이제 정말로 한국 영화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미국.
그 결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팀장님. 미국에서 <식물> 관련 섭외 들어왔습니다.”
“또 이감독님인가요? 아니면 은성씨?”
“아뇨. 탈출 게임을 기획한 사람이랑 얘기해보고 싶대요.”
“그 말은...”
“팀장님 인터뷰 요청입니다.”
이한록이라는 이름이 헐리웃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거절해주세요.”
하지만 한록은 들어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한국 영화가 정말로 헐리웃의 새로운 물결로 취급받기 시작한 지금.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 흐름을 이어갈 마지막 한방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최과장이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고 말할만큼 열심히 준비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건 바로...
“팀장님. 잠깐 얘기 가능하신가요?”
“말씀하세요, 과장님.”
“나잇 앤 무비에서 연락 왔습니다. 한국영화 특집 방영확정이래요.”
미국의 지상파 데뷔였다.
**
나잇 앤 무비.
미국의 영화 프로그램으로, 여러 감독들이 영화계의 최근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엄청나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미국 탑4의 지상파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영화 프로그램. 외국 영화로서는 이곳에서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최과장이 자신의 인맥을 통해 그 프로그램에 제안한 기획이 바로 [한국영화의 모든 것]. <식물>을 비롯해 최근 헐리웃을 뒤흔들고 있는 한국 영화에 대해 다뤄보자는 기획이었다.
최과장이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면서 만들어온 기회. <식물>이 헐리웃 최초의 기록을 쓰는 와중에, 한국 영화에 대해 다룬 방송이 나온다. 전 세계에 ‘이제 한국 영화가 영화계의 새로운 대세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이제 해외팀은 <식물>에 이어 <한국 영화의 모든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그런데 <식물>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잘 진행되던 일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팀장님.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요.”
월요일 아침. 한록의 사무실을 찾아온 최과장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좋은 소식은 나잇 앤 무비측에서 편성시간을 늘려주겠대요. 변경 전 10분에서 변경 후 20분으로요. 두배나 늘어났어요.”
“나쁜 소식은요?”
“그렇게 되면 편성 스케쥴이 밀린다고 하네요. 촬영도 2주 밀려서 4월 3일에 한국으로 오겠대요.”
“3일이면...”
“제가 나간 후죠. 그것도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지금부터 3주 뒤에 CK제당으로 거처를 옮기는 최과장. 특히, 4월 3일이면 최과장이 컨퍼런스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짜와 완전히 겹친다. 이렇게 되면 최과장이 촬영 현장에 전혀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당이랑 입사날짜를 조절해볼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회장님도 나잇 앤 무비에는 기대가 크시니까. 하지만 컨퍼런스도 중요한 일정이긴 해서 조절이 가능할지 확실하지는 않아요.”
‘촬영을 위해 입사 날짜를 조율해볼 수 있다’고 말하는 최과장. 미국 방송국과 일을 진행하는 것은 한록 역시 처음이니, 한록에게도 나름대로 좋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컨트롤 할테니 과장님은 예정대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이미 입사 날짜 정해졌잖아요.”
“음, 이 정도 제안은 못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최과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최과장은 ENM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하태준 역시 그걸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사 일정을 조절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잇 앤 무비 피디가 레이커라는 사람인데, 능력은 있지만 협조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워낙 괴팍해서 현장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라요. 기획 자체도 제가 그쪽이랑 아는 사이라서 진행된 거니까 아무래도 제가 있는 편이 나을 거예요.”
“네, 압니다. 과장님 없으시면 저희가 고생 좀 하겠죠.”
“그런데 왜 남으란 말을 안 해요?”
“그래도 우리끼리 해결해볼 수 있습니다. 어렵긴 하겠지만 못할 일도 아니에요.”
그럼에도 한록은 최과장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분간은 제당에 계실 텐데 첫인상부터 나쁘게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 이유는 오로지 최과장을 위해서.
“...저 걱정해주는 거예요?”
“네.”
생각지도 못한 한록의 배려에 최과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한록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돌아올 거고,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왜냐면은-”
“우리 팀이니까?”
“네. 그거.”
최과장이 자주 했던 말을 하는 한록. 그 말에 최과장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이 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해주고 가야죠.”
최과장의 말에 이번엔 한록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팀’. 회사에서 이보다 더 든든한 말이 있을까. 언제 들어도 참 기분 좋고, 고마운 말이었다. 최과장은 여태까지, 그리고 지금도, 몇 번이나 한록에게 그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한록은 이번에는 자신이 최과장에게 보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앞으로는 제당 일에만 신경 쓰세요. CBN이랑 대화했던 내용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나잇앤무비는 제가 컨트롤하겠습니다.”
“으음. 이렇게 되면 생색은 제가 다 내고, 팀장님은 힘든 부분만 맡는 건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장난스레 웃으며 묻는 최과장.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오히려 한록이 바라는 것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왜요? 우리 팀이니까?”
“아뇨. 그동안 고마웠으니까.”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놀란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반면 한록은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과장님한테 고마운 게 많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준 것. 항상 한록에게 가장 든든한 사람이 되어준 것. 그리고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 최과장에게 고마운 게 정말로 많았지만, 한록은 그걸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최과장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의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최과장도 더 이상 한록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쑥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한록에게 말했다.
“팀장님.”
“네.”
“팀장님이랑 조금 더 친해지고 싶었어요.”
상사와 부하. 그보다는 조금 더 친밀하고, 조금 더 허물없는 얘기.
“다음엔 볼 땐 우리 친구해요.”
어쩌면 조금 선을 넘었을 지도 모르는 최과장의 말에...
“네, 그럽시다.”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윤일 대신 당신이 인터뷰를 진행하겠다고요? 인터뷰에서 무슨 얘기를 할 겁니까? 방송에 내보낼만한 얘기는 있어요?]
최과장이 빠지고 한록이 대신 프로젝트를 진행할거란 소식을 들은 나잇 앤 데이의 PD 레이커. 그는 처음에는 한록의 등장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으나...
<‘식물’의 삼부작을 동시에 개봉하기로 결정한 이유. ‘마지막 공연’의 무성 영화 제작 결정. ‘식물’ 마케팅 과정. 모두 제가 결정한 일이고, 이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얘기들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아니, 잠시만요. 당신이 그 사람이에요? 싫다고는 안 했어요. 좋아요. 당신 인터뷰도 나쁘지 않겠어요.]
한록의 무용담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우와, 레이커 그 사람 진짜 다루기 힘든데. 어떻게 바로 설득했대요?”
“생각보다 쉽던데요.”
그렇게 나잇 앤 데이는 한록의 손으로 돌아왔고, 최과장은 <식물>의 마무리를 담당했다. 그리고 3주 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최과장은 깔끔한 인사를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밖에서도 가끔 연락해요, 팀장님.]
[참고로 내가 더 나이 많은 거 알죠?^^]
물론, 한록에게는 거기에 몇 가지 인사가 더 추가되었다.
“뭐야. 최과장 왜 아직 출근 안 했...아. 이제 갔지.”
그렇게 최과장이 사라진 회사.
“송과장. 나 벌써부터 최과장이 그리워.”
“나도.”
“최과장이 참 일은 잘했는데...”
“성격도 좋았지.”
“영어도 잘하고...”
“다른 팀 커트도 잘해주고...”
“야근도 본인이 자원하고....”
“잠깐. 나 말하다 울 것 같아.”
“울지 마. 나잇앤무비에서 전화 왔어.”
“...최과장! 돌아와!”
최과장의 존재감이 어찌나 컸는지,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최과장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는 했다.
하지만 최과장의 빈자리를 슬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앞으로 다가온 나잇 앤 무비 촬영을 위해 해외팀 전직원이 야근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나잇 앤 무비의 레이커 에르헴입니다.]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나잇 앤 무비의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CK ENM 건물 근처의 카페를 빌려 <한국 영화의 모든 것>의 촬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