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의 결정.
[kate: 미국은 개봉을 안 한다고? 이유 아는 사람?]
[joshua: 다른 지역은 다 개봉하는데. 미국만 안 한다는 거 맞아?]
요 몇 주 미국에서 가장 많은 광고를 한 영화 <식물>. 어느 정도 사람들의 기대가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그 영화가 갑자기 개봉을 취소하겠다고 한다.
[may: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무조건 이걸 봐야 한다고!]
미국의 시네필들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상황이었다. 인터넷 반응들을 지켜보던 유선이 놀란 얼굴로 한록에게 말했다.
“갑자기 취소 되니까 반응이 엄청나네요.”
[ANNE: 지금 장난 치는 거야?]
[OMAHA: 이럴 거면 광고는 왜 했어?]
[YALE: 이 정도는 미리 결정하고 광고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엄청난 것 같기도 하고요...”
거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미국인들. ‘줬다 뺏기’의 효과가 너무 강력해서 위험할 정도였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 지났을까.
[alex: 미국에서 개봉 안 할 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 )
[clare: 그 동안 너희 영화 좋게 봤는데. 정말 실망이야.]
미국의 시네필들의 분노가 정점에 이르고 이 얘기가 어느 정도 퍼져나갔을 때...
<알겠어요. 스크린을 내줄테니까 이제 그만해요.>
협의회에게서 한록에게 전화가 도착했다.
**
그날 저녁. 협의회의 회장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유니스 콜먼. 그녀는 협의회 일 때문에 제롬, 그리고 닉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CK.>
CK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유니스. 그녀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다.
<부정적인 방향이긴 하지만, 개봉도 안 한 영화가 이 정도로 언급량이 생기다니. 제롬의 말이 맞았어요. 과연 CK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줄 아는군요.>
<그게 내가 CK를 협의회 회원으로 추천한 이유입니다.>
유니스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협의회는 빅6 위주로 움직이는 정부 정책들을 바꾸려는 상황. 그러기 위해서는 중소 영화사들의 활약을 보여줘야 했고, 그 타자들 중 하나로 외국기업이자 신규주자인 CK는 아주 적합한 회사였다
<다만 아직 걱정되는 부분이 남아있어요. 관객들이 화가 많이 났어요. 이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이번에 유니스에게 대답한 것은 닉이었다.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방금 전 CK가 미국에서도 개봉하겠다고 다시 공지를 올렸어요.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 미국인들을 잘 파악하고 있군요.>
닉의 말에 유니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하루 미국의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시아의 한 영화사. 심지어 그들이 말하는 영화는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다.
그들이 최소 3천개의 스크린을 보장 받았을 때. 그리고 협의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때 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정말로 기대되네요.>
그런 상상에 유니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
그렇게 당초 약속한 3개월보다 훨씬 빨리 3천개의 스크린을 얻어낸 한록.
“해외팀이 스크린 3천개 받았다고? 진짜로?”
“최소 3천개야. 협의회 말고 AM씨어터랑 계약한 스크린도 있으니까.”
여태 CK가 보유했던 스크린 중 가장 많은 스크린을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얻어냈다. 그야말로 쾌거였지만, 너무나 대단한 성과다보니 약간의 부작용도 존재했다.
[Phoenix: 그래서 이 영화 개봉이 언젠데?]
[freddy: 올해 안에 개봉하는 거지? 빨리 보고 싶어.]
바로 시네필들이 목이 빠지게 <식물>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심이 꺼지기 전에 빨리 개봉을 해야합니다. 개봉이 늦어지면 영화를 기다리다가 피로감이 생길 거예요.”
CK는 하루 빨리 <식물>을 개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맞게 마케팅도 최대 속도로 달려야 하는 상황. 그리고 해외팀에는 이 속도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미국 지역별 영화 장르 선호도랑, 최근 관람객 연령대 추이입니다. 일단 뉴욕에서 먼저 개봉해서 매진 만들고, 다른 주로 이어나가는 게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회의 중 한록에게 파일을 하나 내미는 최과장. 최과장의 전매특허인 데이터와 분석이 잔뜩 담긴 파일이었다.
거의 영화 사상 최초로 삼부작을 동시에 개봉하는 <식물>. 사실상 관객들이 3부작을 모두 봐야 제대로 된 매출이 나오는 상황이다.
‘정교하게 접근해야한다. 실패는 최대한 줄여야 해.’
한록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다보니 아주 조심스럽게 <식물>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록의 초반 전략은 ‘초반부터 압도적인 매진을 보여줘서 동시 개봉의 장벽을 낮춘다.’
“스크린 당 관객수 평균은 협의회에 자료가 없고, 영화사별로 각자 산출하는 거래요. 일단 스튜디오B랑 91필름에 요청 넣어봤습니다.”
“네. 답변 오면 알려주세요.”
그리고 최과장은 그걸 위해 식물을 가장 사랑해줄 지역들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거 최과장 없었으면 누가 해. 앞으로도 여기 꼭 붙어있어야 해, 최과장.”
질렸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말하는 송과장. 송과장의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데이터와 분석에 기반한 마케팅이다보니, 이 일에서는 유독 최과장의 역할이 컸다.
“이런 건 제 전문이니까 맡겨주세요.”
거기에 본인도 재밌어하는 분야이다 보니 의욕도 넘치는 상황.
그런데...
“팀장님. 91이 자료 못 보내준다고 합니다.”
그 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냥 보내줄 수 없고, 한국 자료랑 교환하고 싶대요. 그런데 저희 그런 자료 없잖아요.”
미국과 달리 영화 마케팅이 제대로 실시된 지 20년도 되지 않은 한국. 그러다보니 미국측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춰줄 수 없는 것이었다.
“샬롯테 쪽에라도 협조 요청해볼까요?”
“샬롯테도 그 자료는 없을 겁니다.”
“그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른 자료를 취합해서 통계를 만들어야겠네요.”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십니까?”
“두 달은 걸릴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사람이 저 혼자 밖에 없으니까.”
“그건 안 됩니다. 한 달 안에 일정이 확정되어야 해요.”
“그럼 어떡할까요?”
“아쉽지만 그냥 인터넷에서 투표를 올려서 개봉 순서를 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투표는 허수가 너무 많아요.”
“압니다. 하지만 일정을 맞추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한록의 말에 최과장은 답이 없었다. 최과장은 무언가 좀 더 제안할 것들이 남은 듯한 얼굴이었다.
“과장님. 최대한 빨리 개봉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러나 최과장은 한록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밤. 해외팀 사무실에 혼자 남은 최과장.
최과장의 모니터에는 자신이 두달 넘게 준비한, 그러나 이제는 아무 쓸모 없어진 자료들이 떠 있었다.
“과장님.”
“아, 깜짝이야.”
그때 최과장의 뒤에서 나타난 한록. 한록이 최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 많이 하셨는데, 미안합니다.”
“뭐야, 왜 사과해요.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럼 왜 그걸 보고 계십니까.”
“참나. 절대 안 넘어가주네.”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데 어쩔 수 없죠. 그냥 좀 아쉬울 뿐이에요. 우리 팀이 조금만 더 규모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에요.”
최과장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도 원하는 걸 해볼 수 있었을 텐데.”
**
최과장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던 일이 갑자기 물거품이 되었다.
“최과장. 오늘 내가 커피 살게.”
최과장의 기분을 염려하는 해외팀 사람들. 그러나 최과장에 대한 얘기는 금방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CK그룹 전체 인사이동]
드디어 인사이동 공지가 올라온 것이다.
젊은 사람들 위주. 거기에 대부분 파트장으로 승진. 이번 인사이동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젊은 녀석들이랑 유럽 좀 확실하게 먹어보겠다.
-하고싶은 거 있으면 다 하게 해주마.
-그러니까 곧 전체 공고 올라오면 인사이동 지원해봐라.
‘한번 제대로 해보자.’였다.
“와, 회장님 불 붙으셨네.”
“그러게. 회장님이 신사업 뛰어 드시는게 얼마만이지?”
이제 은퇴가 머지 않은 하태준의 의욕이 느껴지는 사업. 워낙 보기 드문 일이다보니, 이번 신사업은 CK그룹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일이었다.
“최윤일은 아쉽게 됐네.”
그리고 자연스레 회사에서는 최과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회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해외팀에 남은 최과장.
하지만, 최과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일은 바로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기껏 남은 보람이 없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CK제당으로의 인사이동자를 모집한다는 공개 공고가 엘리베이터에 개시되었다.
그리고 ENM에는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공고 붙었더라.”
“어.”
“너 갈 거냐?”
“아니. 파트장 자리 하나 남았던데 난 가망 없지.”
“알긴 아네. 근데, 너 그거 아냐?”
“어떤 거?”
“최윤일이 그거 보고 있던데.”
최과장이 CK제당으로의 이직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
“아니, 회장님이 오랄 때도 안 갔다며. 근데 지금 인사이동 신청한다고?”
“이번에 준비하던 일 하나가 완전 날라갔다더라고.”
“아...현타 올만 하네. 근데 이제 와서 이동이 가능할까?”
“회장님이 그 녀석 엄청 예뻐하시잖아. 가능하겠지.”
“하. 나도 유학 다녀올 걸.”
회사에 은밀히 도는 최과장에 대한 소문. 그 소리는 자연히 한록의 귀에도 들어갔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리고 한록은 누구보다 빨리 이 상황을 예상한 사람이었다.
‘최과장님은 해외팀이 마음에 안 찰 거다.’
한록만큼, 아니 한록보다도 더 야망이 넘치고 거기에 능력까지 있는 최과장.
하지만 해외팀은 아직 성장 중인 신생 팀이었고, 최과장이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우리 팀이잖아요.
그럼에도 팀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해외팀에 남기로 선택한 최과장. 그는 자신의 야망과 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래도 여기 남으시겠지.’
그 선택은 아마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한록의 선택.
-우리 팀이잖아요.
-저도 팀장님이 바라는 거 다 이뤄주고 가고 싶어요. 특히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은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몇 번이나 한록에게 고마운 말을 해준. 그리고 자신의 야망과 팀에 대한 애정 중 후자를 선택해준 최과장.
한록 역시 이제는 선택을 해야했다.
‘나는...’
그리고 한록의 생각이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 전화가 한통 도착했다. 하정엽의 비서인 유비서가 건 전화였다.
“이한록 팀장님. 회장님 한시간 후에 도착 예정이십니다. 사장님께서 미리 사장실 앞에 대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하태준이 정기보고를 듣기 위해 ENM에 방문하는 날. 보고를 위해 사장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장실로 향했다.
**
한록은 사장실로 향하는 동안 오늘 오후 정부장이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이한록. 최윤일에 대해서 얘기가 좀 돌던데.
-네.
-내가 너라면 절대 회장님 귀에 안 들어가게 할 거다. 네가 무능해보이기 딱 좋은 내용이야.
-알고 있습니다.
팀장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끝낼지 결정지었다.
**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하정엽과의 대화를 마치고 한록을 사장실로 들인 하태준. 하태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그래서. <식물>은 잘 되고 있어?”
최과장이 하태준의 스카웃을 거절하고 담당중인 영화 <식물>. 그 영화가 얼마나 잘 되고 있고, 최과장을 데리고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이 순간. 한록은.
“회장님. 최과장을 데려가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팀장으로서의 결정을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