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26화 (24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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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직접 과장님을 부르셨습니다. 이건 다시 안 올 기회입니다.”

“그건 저도 알죠. 회장님 오른팔은 몰라도, 오른손 새끼 정도는 될 수 있을 기회잖아요.”

“그럼 왜 안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 팀에 제가 필요하잖아요.”

최과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물>은 세계 최초 3부작 동시 개봉. 거기에 임감독님이 <오징어 서바이벌>로 오랜만에 복귀 하시고. 팀장님 꿈의 영화인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도 남아있고. 저 없으면 많이 곤란하실텐데요.”

“네.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과장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여긴 신경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 안 써요. 저도 팀장님이랑 해외팀이 준비하는 거 다 이뤄주고 가고 싶어요. 특히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은요.”

“과장님. 과장님을 위한 선택입니다. 지금 당장 팀을 떠난다 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누가 절 욕하겠어요.”

“그럼 뭐 때문입니까.”

한록의 질문에 최과장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회장이 총애하는, 야망과 의욕이 넘치는 엘리트 그 자체인 최과장. 그런 남자가 이 곳에 남기로 결정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우리, 팀이잖아요.”

자신이 애착을 가진 첫 팀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팀이잖아요.

예전에도 최과장이 한록에게 한 적이 있는 말. 한록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여유롭고 철두철미한 처세에 가려져있지만, 사실 최과장은 생각보다 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둘이 회사 밖에서 만났다면. 그리고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다면.

“전 여기 남을게요. 자.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 어떠십니까.”

그렇다면 한록과 최과장은 좋은 친구가 됐을지도 모른다.

“꽤 마음에 드네요.”

“그래요? 어떤 점이요?”

“과장님을 더 오래 볼 수 있단 점이요.”

“그건 너무 닭살 돋는데.”

“그리고 과장님이랑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만들 수 있단 것도요.”

최과장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한록의 말. 최과장은 그 말에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대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네. 저도요.”

**

그로부터 며칠 후. 한록은 CK ENM의 건물에서 하태준 회장과 만남을 가졌다.

“최과장이 회장님이 주신 기회에 크게 감사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해외팀에서 최과장이 너무 큰 역할을 맡고 있어서 쉽게 이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빙빙 돌려말하는군. ENM에 남고싶다 그거잖아.”

“...네. ENM을 걱정해서 그러는 겁니다.”

“네 생각은 어때.”

“지금 ENM은 아주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해외시장에서 ENM의 위치가 결정될 겁니다. 회장님께서 이 부분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최윤일을 남겨달라?”

“네. 그렇습니다.”

깍듯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한록.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내 말에 거역하는군. 특히 최윤일 그 녀석.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르는 건가. 그렇게 안 봤는데 멍청하고 맘이 약해.”

하태준이 한록의 말에 거친 어투로 답했다. 30대의 젊은 직원 둘이 회장의 말에 반대한다. 다른 직원들이 들었으면 놀라서 벌벌 떨었을만한 얘기였다.

하지만 한록과 최과장은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만한 위치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한록은 하태준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하태준의 실이 아주 차분하게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그래. 그 어린 놈 하나 없다고 문제될 것도 아니고, 알았다.”

한록의 예상처럼 하태준이 수락하는 의미의 답을 내놓았다. 한록과 최과장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 이상으로 해외팀을 좋게 보고 계신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의 각별한 총애와 배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뿌듯함을 느낄만한 일에 한록이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

그날 밤. 한록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혼자 야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 한록이 하는 고민은 늘 일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최과장이 ‘남겠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하태준이 ‘최과장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했을 때. 그때마다 들던 생각.

‘...최과장님이 이 기회를 잡게 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최과장 인사이동 안 한대. 해외팀에 계속 남는다더라.”

“휴! 최과장 빠지면 해외 컨택은 대체 누가 하나 했네. 우리 최과장 없으면 큰일 나.”

다음날 아침. 송과장에게 최과장에 대해 얘기하는 현차장. 현차장의 말에 송과장이 한시름 놓았다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소식을 전한 현차장의 표정은 미묘했다.

“현차장. 표정이 왜 그래?”

“음...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복잡한 얼굴을 짓고 있는 단 두사람. 현차장과 한록.

그러나 두 사람의 고민은 오후에 전해진 더 큰 소식에 금방 묻혀버리고 말았다.

[한. 제롬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제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제롬. 바쁘실텐데 무슨 일이십니까.>

한록이 <식물>과 <오징어 서바이벌>의 제작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제롬과 스튜디오 B.

최근 스튜디오 B에서는 알렉산드로 감독의 <인터스텔라, 유니버스>가 개봉하였고, SF 영화로는 전무후무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CK에서 영화 3부작을 동시에 개봉한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스크린을 많이 확보해야하겠죠.]

<네. 제롬이 힘써준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협의회에서는 특정 영화사의 독점을 막기 위해 영화사마다 한 해에 가져갈 수 있는 스크린 수를 제한하고 있었고, 이를 영화사 쿼터라고 했다. 하지만 제롬의 도움으로 협의회에서 영화사 쿼터를 해제했고, 이제 스크린을 확보하는 건 온전히 CK의 노력에 달린 상황.

[CK에게 그 이상의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협의회가 보유한 스크린 갯수가 있는데, 협의회의 허가 하에 이걸 영화사들에게 할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에게 스크린들을 넘겨줄 수 있다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식물>의 개봉관을 늘려주겠다는 얘기였다.

[빅 6에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한. 뭘 걱정하는 겁니까.>

한국 시장을 삼키기 위해 CK를 견제하고 있는 빅6. 그러나 한록의 질문에 제롬은 짧게 웃으며 답했다.

한록이 협의회의 힘을 모르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제롬.

<곧 협의회에서 전화가 올 겁니다. 그쪽 말을 따르면 됩니다.>

제롬이 아주 여유로운 말투로 전화를 마쳤다.

**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실제로 필름포럼 협의회에게서 전화가 도착했다.

<필름포럼 협의회는 CK에게 3000개의 스크린을 배분해줄 수 있습니다.>

스크린 3000개. 거의 대규모 영화관 체인 하나와 독점 계약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규모였다. 대신 협의회는 한록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3000개는 다른 영화사의 스크린까지 전부 CK에게 몰아줬을 때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CK는 우리가 그쪽에게 스크린을 몰아줘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주기 바랍니다. 그것만 증명된다면 모든 스크린을 CK에게 주겠습니다.>

[우리가 증명한다 해도 빅6가 허락하지 않을텐데요.]

<이 부분은 빅6가 아니라 필름 포럼 협의회에서 결정하는 내용이니 상관 없습니다.>

‘너희가 스크린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라.’ ‘스크린 배분은 빅6가 아니라 협의회의 결정이다.’

그 말들을 들으니 지금 헐리웃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제롬이 빅 6에 대항해서 협의회 소규모 영화사들과 연합을 맺고 있군.’

빅6의 독과점에 대항하는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는 제롬. 아마 협의회에서 <식물>에게 스크린을 내주겠다고 결정한 것 역시 CK를 통해 빅6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상관 없다. 이건 우리한테도 이득이니까. 확실히 협의회에 가입하니 좋은게 많군.’

하지만 CK 역시 협의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오히려 감사한 상황. 한록이 협의회가 내건 ‘조건’을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식으로 증명을 원하는 겁니까.]

[아, 그렇군요.]

그리고 협의회의 조건. ‘이 영화를 유명하게 만들어라’라는 건...

[쉬운 일이네요.]

언제나 한록이 가장 자신있는 일이었다.

<...정말입니까? 스크린을 결정하려면 3개월 안에 성과가 나와야...>

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한록의 말에 오히려 당황한 상대방. 그 말에 한록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 충분합니다. 그럼 3개월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부탁이나 흥정없이 전화를 마쳤다.

**

협의회와의 통화를 마친 한록은 <식물>의 시나리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3개월 안에 영화를 유명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스크린 3천개를 주겠다.

<식물> 3부작은 아직 제작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 하지만 <식물>이 모두 완성되길 기다렸다간 협의회에서 제시한 일정에 맞추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직 영화도 다 제작되지 않은 상황이야. 영화의 내용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순 없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마케팅은...

‘그래. 이걸로 가자.’

보통 하나뿐이었다.

**

“<식물>마케팅 들어가겠습니다.”

“벌써요? 아직 제작도 안 끝났는데요?”

“지금부터 해야합니다.”

그렇게 제작도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식물>의 마케팅에 돌입한 해외팀.

[<식물>, 전 세계 최초 3부작 동시 개봉.]

[서지훈 감독이 멘토로 참여한 <식물>이 내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식물>에 대한 기사들.

<디렉터 서. 지금은 어떤 영화를 작업하고 있죠?>

<지금은 제 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를 돕고 있습니다.>

<디렉터 서가 돕는 영화라니 궁금하네요. 그건 어떤 영화죠?>

서감독의 해외 인터뷰.

[최과장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최대한 많은 곳에 <식물> 예비 포스터 걸어주세요.]

미국 전역에 뿌려지는 <식물>의 포스터까지.

[내년 상반기? 곧이네?]

[이거 근데 제작이 끝나긴 한 거임??]

[1,2,3편이 동시에 개봉한다는 거 맞음?]

[ALEX: 3부작 동시개봉이라니! 이런 건 처음이야 XD]

[PETER: 또 공포 영화인가? 한국이 공포영화 강국이긴 하군.]

[TOM: 서지훈의 공포 영화라. 빨리 보고 싶네.]

서지훈 감독. 한국 공포영화.

[ROSA: 3부작 동시개봉 이란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GRACE: 3편을 한꺼번에 개봉한다는 것 같은데.]

[JOHAN: 완전 미친 짓이군.]

[KEN: 완전 미친 짓이지.]

[JAMES: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했을까.]

그 중에서도 3편 동시 개봉이라는 신기한 소식이 미국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HANNA: 아, 어떤 미친 영화일지 빨리 보고 싶어.]

그렇게 미국 시네필들 사이에서 <식물>에 대한 기대가 살짝 올라오고,

<...겨우 이 정도 반응으로 자신있다고 한 건가?>

협의회가 한록의 성과에 실망했을 때.

“유선씨. 공지 올려주세요.”

한록의 본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CKENM: <식물> 개봉 안내.]

그날 저녁. CK ENM의 공식 트위터와 유튜브 계정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CKENM: <식물>은 전 세계 동시개봉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제작사의 사정상 개봉 지역이 변경되었습니다.]

영화도 다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케팅. 그 마케팅의 정확한 명칭은, 이름하여-

[@CKENM: 따라서 <식물>의 개봉에서 미국은 제외되었음을 알립니다.]

‘줬다 뺐기.’

**

마케팅에서 많이 사용되는 심리학 용어가 하나 있다. ‘손실회피성향’.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는 기쁨보다 무언가를 잃는 슬픔을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많은 마케터가 이 손실회피성향을 이용했고, 사람들에게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무언가를 잃게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마케팅을 하곤 했다.

이걸 영화개봉에 적용해버린 한록.

전 세계에서 오로지 미국만 개봉을 제외하겠다는 CK의 공지와 미국인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줬다 뺐기’.

그 공지에 미국인들이...

[ANDREW: WHAT???????????????????????????]

미쳐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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