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문을 열고 들어온 임감독. 그리고, 임감독을 바라보는 정감독.
-휘릭!
정감독의 실이 순식간에 등 뒤로 숨어들었다. 임감독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 알겠군.”
그러나 정감독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뺏은 학생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다 끝난 일로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네.”
임감독쯤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다 끝난 일이라니 무슨-”
“대충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알겠어. 그리고 내 생각은 여전히 비슷해. <식물>. 그리고...성우였나.”
정감독이 임감독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임감독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CK와 정우택이 척을 질 이유는 없다니까.”
영화계의 거물, 정우택 감독. 그런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말. 하지만 한록은 단호했다.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임감독님과 CK 최고 규모의 영화를 제작할 생각이라서요.”
그 말에 정감독의 실이 다시 등에서 뻗어나와 임감독에게로 향했다. 타겟을 임감독으로 바꾼 것이었다.
“성우야. 그때 그 일은 미안하게 됐다. 원하는게 있으면 얘기해. 적당히 얘기하고, 서로 양보하고, 그렇게 끝내자. 그게 우리 모두한테 다 좋은 일이다.”
정감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인 감독 임감독.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인 정감독. 그리고 최고의 영화를 모아서 헐리웃에 선보이고 있는 CK. 그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은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그게 네 시나리오라고 밝힐 수는 없어. 그래봤자 아무도 안 믿을거고. 대신 인터뷰 잡아서 네 얘기를 해주마. 그러면 이번에 만든다는 신작에도 도움이 될 거다.”
“아니. 흥정 따윈 안 해.”
-하지만 그건 상대가 한록이 아닐 때의 얘기였다.
한록이 정감독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거고, 임감독님은 유명해질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감독님의 영화들이 사실 임감독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한록의 태도. 그 말에 정감독은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이한록은, 그걸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한록의 말에 오늘 처음으로 정감독의 표정이 바뀌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라는 눈빛이었다. 정감독이 재빨리 임감독에게 물었다.
“임성우.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네가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정감독의 마지막 공격. 그리고...
“물론이죠.”
임감독의 대답.
임감독의 말에 정감독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록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감독에게 말했다.
“얘기 끝났군요. 감독님, 나가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그리고 정감독에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사람을 묻어버릴 수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니라는 걸.”
**
“이한록 팀장. 또 보지.”
애써 태연한 얼굴로 자리를 빠져나간 정감독. 정감독의 퇴장에 임감독이 눈을 질끈 감고 큰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네가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이죠.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감독이 임감독에게 몇 번이나 했던 질문. 임감독은 그 말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임감독의 얼굴에는 긴장,
“드디어 얘기했다...”
그리고 후련함이 담겨있었다.
10년이 넘도록 마음에 담아온 질문. 그에 대해 드디어 떳떳한 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감독이 한록을 보더니 물었다.
“한록아. 괜찮겠지? 아무 일 없겠지?”
“괜찮아. 이제 형 못 건드려.”
“나 말고 너 말이야! 정감독 이번 영화 대박 나면 어떡해? 그래서 서감독님보다 더 유명해지면? 그럼 넌 정감독이랑 영영 작업 못 하잖아!”
자신보다 한록을 더 걱정하는 임감독. 임감독은 정감독의 이번 영화가 개봉한 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재밌겠네”
하지만 한록은 오히려 정감독의 영화가 개봉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샬롯테의 야심작이자, 수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정감독의 영화.
CK의 실세 이한록과 등을 돌렸다. 이제 정감독에게 살아남을 길은 영화를 성공시키는 것. 그래서 한록도 외면할 수 없는 거물이 되는 것 뿐이다.
정감독은 이제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매일 전전긍긍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의 결과는...
-2번을 고른다면 샬롯테와 정감독을 한 번에 보내버릴 수 있지.
최경준과 한록에 의해 이미 정해져있었다.
“기다려봐, 형. 재밌는 일이 있을 거야.”
한록이 임감독에게 말했다.
**
그날 밤. 한록은 사무실에서 혼자 보고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2022 결과보고서>
<시험>. <수면>. <마지막 공연>. 요 몇 년, 헐리웃에서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 CK의 해외팀. 그리고...
[<마지막 공연> 미국에서 상영 종료했습니다. 마지막 주에도 극장 점유율 1순위였습니다.]
최과장에게서 도착한 메시지. 최과장의 메시지는 미국에서 <마지막 공연>이 완전히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한록은 해외팀의 챕터 하나가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국 영화를 헐리웃에 선보이겠다.’ 그 목표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개봉 예정작: 오징어 서바이벌>
<예산: 미정.>
<제작 상황에 맞게 조율 가능.>
<예상 성적: >
<전미 박스오피스 1위>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영화들을 보여줄 때였다.
**
“팀장님. <식물> 1편 제작 종료했습니다!”
“<오징어 서바이벌> 캐스팅 들어가겠습니다.”
<식물>과 <오징어 서바이벌>의 제작. 그리고 다가오는 연말 시즌.
“팀장님. KBC에서 시상식 예선전 관련 미팅요청했습니다.”
“SBC에서 예선전 포맷을 사용하고 싶다고 연락 왔습니다.”
한록이 도입한 시상식 예선전이 이제 관례처럼 방송가에 자리 잡았고, 방송국들은 또 한 차례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올해의 대상은 <마지막 공연>입니다!”
“최우수 작품상은 <마지막 공연>입니다.”
“작품상. <시험>.”
그리고 이번 연말의 주인공은 바로 <마지막 공연>과 <시험>이었다.
[CK흥행의 주역, 해외팀 이한록 팀장.]
[이한록 팀장은 CK가 더 많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으며, 곧 ‘영화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방식의 영화가 개봉할 것’ 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한록 팀장은 <시험>, <마지막 공연>의 해외 개봉을 이끌었으며, KBC 예선전을 담당했다.]
[엇 이분 저번에 시상식 예선전에서 본 분이네요.]
[배우인줄 알았는데 CK직원이었군요]
[내가 직원이라고 몇 번 말했는데 아무도 안 들어먹더니 이제 와서 이러네]
[잘생겼네요 이 분이 CK 영화에 나온다는 거죠??]
[아니라고! 아니라잖아!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한록 역시 CK의 간판으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며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와, <시험> 아직도 잘 나가네. 이 정도면 재개봉 성적이 아닌데.”
원래 극장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연말. 해외팀 역시 신작 개봉은 없지만 <시험>과 <부산 열차>의 연말 재개봉, 그리고 <식물>의 제작으로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크리스마스가 한달 남은 시점.
현차장이 한록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팀장.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네.”
“이팀장 크리스마스에 휴가간 적 한 번도 없지?”
“네. 중요한 대목이니까요.”
영화관에 사람이 가장 많아지는 날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그래서 휴가는커녕, 크리스마스때는 오히려 회사에 살다시피 하는 한록. 그런 한록에게 현차장이 비장하게 말했다.
“아니. 안 돼.”
“...뭐가 말입니까?”
“올해는 쉬어!”
그렇게 이한록 휴가보내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
여름 휴가. 추석. 연말. 크리스마스. 신년. 설날.
영화관은 명절과 휴가철일수록 성수기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라 쉰다’ ‘설날이라 쉰다’라는 말은 남 일이 되어버린 CK 직원들.
영화관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날이고, 거기에 각종 이벤트. 심야 영화까지. CK직원들은 오히려 명절에 당직을 서며 가장 바빠지고는 했다.
그렇게 서로 로테이션을 돌아가며 일년에 한두번 정도 제대로 휴가를 다녀오는 CK직원들. 그러나 그 중에 입사 후 늘 이런 날에 근무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한록이었다.
“이팀장. 여자친구가 뭐라 안 해? 나라면 헤어졌어.”
“그래서 헤어졌습니다. 제대로 챙겨줄 수가 없어서요.”
“그럼 가족들은? 가족들은 보긴 하는 거야?”
“이번 주에 미리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당일에 보는 건 다르지.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부모님 서운해 하셔.”
그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한록. 회귀 전, 9년 동안 CK에서 근무하던 과거에도 한록은 이런 날 늘 회사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지금이 바쁘긴 해도 새로 개봉하는 건 없잖아. 앞으로 이런 날 몇 없을 거야. 그러니까 올해는 가족들이랑 쉬다 와.”
“이미 휴가 가시는 분들 확정 되었는데요.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 내가 이팀장 대신 근무할게.”
“차장님 가족분들은요?”
“은서한테 싹싹 빌어야지...그래도 하루니까...”
은서 얘기가 나오자 얼굴에 아련함과 공포가 오가는 딸바보 현차장.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유선이 말했다.
“괜찮으시면 두분 대신 제가 근무하겠습니다! 저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어요.”
“유선씨 남자친구는? 사귄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헤어졌어요. 제가 잘 못 챙겨주더라고요.”
“이거 봐! 유선씨가 이팀장이랑 똑같이 말하고 있잖아! 이러다 회사에 이팀장 미니미만 남겠다고!”
현차장의 질색하는 말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현차장과 동료들은 정말 친구처럼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었다. 마침 한록 역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생기는 와중이었다.
“유선씨. 정말로 괜찮겠어요?”
“네! 저도 크리스마스에 한번 근무해보고 싶었어요!”
거기에 계약직에서 전환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나름의 로망이 있는 것 같은 유선까지. 이쯤되면 아무리 한록이라도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되도록 당일에는 할 일 없게 만들어놓고 갈게요. 혹시 문제 생기면 최과장님한테 물어보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록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게 몇 년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가족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마음이 살짝 들뜨기 시작한다. 사무실로 돌아온 한록이 <식물>을 검토하다가 한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크리스마스에 내려간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한서의 답.
[장난치지마 ㅡㅡ 안 올 거잖아]
[진짜 갈 거야.]
[진짜? 정말로?]
[응. 어머니한테 말씀드려.]
[꺄!! 알았어! 언제 올 거야? 몇시? 몇 분? 저녁 먹고 올 거야? 전 날 내려올 거지?]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네. 진작 다녀올 걸.’
예상보다 더 격렬한 한서의 반응. 그 반응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한서에게 미안했고, 또...
“선물 비싼 거 사줘야겠네.”
자신 역시 크리스마스가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