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23화 (246/263)

대신 화풀이를 조금만 하겠습니다.

“300억을 들인 작품이야.”

“아직 안 들이지 않았습니까.”

“기자들에게 이미 메일을 돌렸어.”

“취소하시죠.”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록이 겨우 이 정도 말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도 아는 것이었다.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내가 방송국을 제대로 이끌 수 있단 걸 보여줄 첫 작품이네. 자네는 이 이상 무엇을 해줄 수 있나.”

본래 성격답게 깔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최경준. 기다리던 질문에 한록이 답했다.

“영화로 만든다면 드라마 이상의 흥행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그 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지.”

“아뇨,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라면?”

“‘한국’을 얘기할 때 반드시 이 영화를 떠올리도록 만들겠습니다.”

“하.”

미래를 보고 온 한록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 그러나 최경준에게는 아직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경준은 한록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대신, 한록에게 한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제가-”

“제가 이한록이니까요. 그런 말은 안 돼. 평소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건 국장으로서 내 첫 프로젝트니까.”

한록의 말을 자르는 최경준. 그 모습에 한록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최경준이 자신의 말을 미리 예상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최경준은 여전히 한록을 다 알지 못했다. 한록은 이번에는 다른 답변을 준비해 온 상황이었다.

“아뇨. 다른 얘기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뭔가.”

“제가 작가님과 얘기해서 드라마 대본을 시나리오로 바꿔 가져오겠습니다. 그 시나리오를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시나리오를 보신다면 어느 정도의 영화가 나올지 짐작하실 것 아닙니까.”

“드라마를 영화로 바꾼다니. 작가가 원하지 않을텐데.”

“작가님과 아는 사이입니다. 원래 영화를 만들던 분이라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모르던 사이에 이미 일을 꾸미고 있었군.”

최경준이 놀랐다는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원래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라. 확실히, 영화화 하면 좋을 부분들이 꽤 있었지. 시나리오를 보고 검수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 기다려보지.”

그렇게 떨어진 허락.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한록은 최경준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최경준이 한록을 보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내가 이한록이니까’에 이어서 ‘직접 보면 알 거다’라니. 거절을 못하게 할 레퍼토리가 늘었군.”

“네. 어려운 부탁이니 다른 이유를 준비해봤습니다. 어떠십니까.”

“이한록답지 않게 영악해졌어.”

장난스러운 질문에 맞게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한록. 그 모습에 최경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약간의...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군.”

기특함이 담긴 말이었다.

**

“본부장님. <식물>에서 정감독을 제외했습니다. 서감독님이 전체 총괄을 맡기로 하셨고, 임감독님이 회의에 참여하실 겁니다.”

“알았네. 처음 예상보다 시간이 좀 걸리겠군.”

그렇게 정감독을 제외하고 진행하게 된 <식물>.

-갑자기 날 제외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정감독이 몇 번이나 연락을 했지만, 한록은 정감독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식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엔딩을 세 개 찍는다라. 촬영이 끝나기까지 반년은 걸리겠군.’

이감독이 처음 생각했던 <식물>의 세 가지 엔딩. 그걸 모두 찍고, 중간중간 엔딩이 이상하지 않도록 추가 촬영까지 한다. 최경준은 <식물>이 제작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두 천재를 과소평가한 생각이었다.

“감독님. 엔딩 이전 장면들은 추가촬영을 길게 넣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촬영 위주로 빼고, 모순되는 장면은 주인공의 환각으로 처리하는게 어떻겠습니까.”

“팀장님 말대로 하면 장면 16. 18. 24. 29. 31. 이 정도만 수정하면 되겠네요.”

스케쥴 관리가 쉬운 개인. 그리고 실내 촬영 아이디어를 가져온 한록. 그리고 그걸 바로 추가촬영에 적용한 서감독.

“좋습니다!”

두 천재의 활약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던 이감독이 바로 승인을 외쳤다.

“본부장님. <식물> 추가촬영은 두달 정도면 끝날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이게 가능한 거였나.”

그렇게 획기적으로 줄어들게 된 <식물>의 제작기간.

서감독이라는 천재. 한록. 그리고, 한록이 가장 잘 아는 영화 <식물>. 그 세 가지가 만나니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식물> 추가촬영 들어갔대.”

“아, 그래? 내후년쯤 개봉하려나?”

“아니. 촬영 올해 안에 끝난다는데?”

“...뭐? 지금 추가 촬영 들어가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몰라. 이한록이 완전 칼을 갈았다던데.”

“진짜 무서운 인간이다. 해외팀 사람들 살아있긴한가.”

‘이한록이 또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한록이 그걸 또 실현시키고 있다.“

‘이한록이 또, 일을 칠 것 같다.’

그런 소문이 퍼지는 그때.

“<오징어 서바이벌> 시나리오가 완성됐습니다.”

한록의 새로운 역작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을 시나리오로 만들어오겠다’고 말한지 정확히 2주 후. 한록은 임감독과 함께 드라마 대본을 시나리오로 바꿔왔다.

“상당히 빠르군.”

사무실에서 한록에게 <오징어 서바이벌>의 시나리오를 넘겨받은 최경준.

‘그 막장 드라마의 작가가 이한록과 아는 사이고, 한때는 영화 감독이었을 줄이야. 세상 참 좁군. 아니. 그보다는 본인의 재능을 숨기지 못했던 거겠지.’

최경준은 한록에게 임감독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였다.

하지만 원래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라 해도, 드라마 대본을 영화 시나리오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최경준의 재촉에 2주 만에 시나리오가 나온 상황. 그렇기 때문에 최경준은 이번 시나리오에 큰 기대가 없었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드라마보다 나을지. 그것만 생각한다.’

“시간이 촉박했겠지. 적당히 감만 잡아보겠네.”

최경준은 냉정한 얼굴로 <오징어 서바이벌>의 시나리오를 펼쳤다. 그리고 빠른 눈으로 시나리오를 훑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록.

최경준이 시나리오를 보는 동안, 최경준의 굵은 실이 빠르게 시나리오 주위를 움직인다. 시나리오를 넘길 때마다 시나리오에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최경준의 실. 시나리오에 대한 최경준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경준이 열두 번째 페이지를 펼쳤을 때. 그때 최경준의 눈이 반짝 빛났고, 최경준의 실이 시나리오에 감기더니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절대로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최경준. 그래서 아직 한록에게도 매듭지어진 적 없는 최경준의 실. 그 실이 임감독의 시나리오를 붙잡고 있다. 한록은 이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서감독의 <수면>이 처음으로 미국에 개봉했을 때. 그때 <수면>의 포스터에 달려들던 관객들의 실. 그러니까...

“당장 보고싶어 미치겠군.”

영화에 완전히 매료되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기업의 임원. 이제는 영화인보다 기업인에 가까운 최경준. 이제 그 어떤 영화도 최경준의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눈을 뗄 수 없는 전개와 그로 인한 짜릿한 감각들.

“드라마화는 취소야. 대신 영화사업본부의 전체에게 전하게.”

그 모든 것들이 말해준다.

“우리 본부의 모든 자원을 <오징어 서바이벌> 영화화에 집중시키라고.”

이 영화는 대박이라고.

**

그로부터 다시 2주 후.

[CK ENM. <오징어 서바이벌> 제작 시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마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록은..

.

“팀장님. 정감독님 오셨습니다.”

남겨진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

한달 전 한록과 최경준의 대화.

-<식물>을 내놓으라고 말했군. 이 정도면 다시는 감독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지.

한록과 정감독의 녹음 파일을 들은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겠다.’ 한국영화의 아버지가 하는 무시무시한 말. 하지만 최경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나는 지금 녹음을 공개하고 정감독을 뒷방 늙은이로 만드는 방법. 감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어디 이름만 있는 협회 같은데에서 겨우 먹고 살게 되겠지.

-남은 하나는 뭡니까.

-<식물>과 <밤사냥> 외에도 조금 더 증거를 모으고, 적절한 시기에 터뜨려서...아예 영화계에 발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방법.

-그건 언제쯤입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정감독이 샬롯테와 함께하는 신작이 개봉했을 때 함께 터뜨려야 하니까. 수십억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망가뜨리면 다시는 재기하기 힘들겠지. 샬롯테도 타격이 클 거고.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정감독이 시나리오를 훔친 작품을 전부 알아내야 하니, 당연히 두 번째로 방법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피해자를 더 수소문해보지. 그때까지 기다리게.

-네, 알겠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대답했다. 정감독의 모든 거짓말이 밝혀지도록. 모든 피해자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을 찾을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 당장의 복수를 참는 것 정도는 쉬웠다.

하지만.

-본부장님. 대신 화풀이를 조금만 하겠습니다.

마냥 참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

“이팀장. 그간 왜 연락이 안 된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CK랑은 일 못해. 최경준 본부장에게 얘기해야겠군.”

그렇게 정감독은 한록의 사무실에 도착했고, 한록에게 대놓고 불쾌한 티를 냈다. ‘알아서 비위를 맞추라’는 듯한 정감독의 태도.

“앉으세요.”

그러나 한록의 태도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한록의 차가운 말에 정감독의 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한록의 태도가 변화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팀장. 무슨 일 있어?”

“오늘 감독님을 부른 이유는 감독님이 <식물>에서 제외 되신 이유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서 그걸 말해주겠다고?”

“감독님은 <식물>을 자기 영화로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후배의 영화를 뺏어가려는 염치도 없는 짓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영화를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팀장.”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한록. 그러나 정감독은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록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한록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떠봤군. 하지만 상관 없어.”

무서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정감독.

“잘 생각해. 고작 신인감독과 <식물> 하나 때문에 나랑 척을 질 건지. 그건 현명한 짓이 아니지. <식물>엔 손 떼겠네. 이쯤에서 얘기 끝내지.”

그는 이제 한록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 얘기는 다른 분과 하시죠.”

그러나 한록은 협상을 할 생각따윈 없었다.

한록이 오늘 정감독을 부른 진짜 이유는...

“들어오세요. 임감독님.”

말 그대로 복수를 위해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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