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22화 (245/263)

첫 관객과 오랜 약속.

“한록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정감독이랑 얘기했어.”

한록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온 임감독. 한록의 입에서 정감독이란 말이 나오자 임감독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록이 모든 일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었다.

“정감독이 형 시나리오 가져갔다는 증거 가져왔어. <밤사냥>이 형 시나리오였단 거 밝히고, 정감독이 다시는 영화계에 발 못 붙이게 하자.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마.”

모든 일의 해결책을 가져온 한록. 실제로 한록은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형도 마음을 바꿀 거다.’

이제는 임감독도 영화를 찍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한록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임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임감독은...

“한록아. 시나리오 뺏긴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정감독한테 판 거야.”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했다.

*

10년 전 어느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혹평을 받고 몇 달 후. 임감독의 집이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가는 시점. 임감독이 정감독, 아니 정교수의 압박 아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을 때. 임감독에겐 모든 일이 최악의 상황이 되어가고 있을 때.

-한록아. 블로그에 시나리오 수정한 거 올렸어. 한번 봐봐.

-응, 형.

하지만 그럼에도 한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새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때...

-정교수님 새로 영화 들어가신다더라.

-그래? 무슨 내용이래?

-뭐라더라...

-밤에만 활동하는 멧돼지 사냥꾼 얘기라던데.

<밤사냥>에 대한 얘기가 임감독의 귀에 들어왔다.

멧돼지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 임감독의 시나리오였고, 정감독에게 과제로 제출했던 시나리오기도 했다.

‘정교수님이 내 시나리오를 가져가려 한다.’

첫 영화의 실패. 어려워지는 집안 사정. 학교에서의 은근한 따돌림. 그리고, 교수의 도둑질.

모든게 임감독을 짓눌렀고, 임감독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감독은 곧장 정감독을 찾아갔다.

-교수님. 이거 제 시나리오 아닙니까.

-성우야. 뭐 하나 물어보자.

그리고 정감독은 오히려 임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네가 이렇게 나와서 뭐가 바뀔 거라 생각해?

정감독의 질문에 임감독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정감독은 꽤나 인정받는 감독이었다. 영화판에서 이름 없는 작가들이 시나리오를 뺏기는건 너무나 흔한 일이다. 임감독이 뭐라 말하든, <밤사냥>은 정감독의 영화가 될 것이다. 임감독도 모두 아는 사실들. 그러나 임감독은 애써 입을 열었다.

-바뀌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이 시나리오가 제 거라고 꼭 밝힐 겁니다.

-하나 더 물어볼까. 너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평가 기억하지.

아픈 과거를 들쑤시는 정감독. 그러나 임감독은 정감독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정감독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떻게 나오더라도. 내 시나리오를 지키고 말 것이다. 이게 내 시나리오라고 모두에게 말할 것이다. 임감독은 이미 그렇게 다짐한 상황이었다.

-네가 이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그 말에는 정말로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대학영화제에서 꼴등이었지. 이제 아무도 너한테 감독 일을 맡기지 않을 거야. 작가도 마찬가지지. 모두가 그 영화를 봤어. 누가 너랑 영화를 만들고 싶어할까? 누가 너한테 투자할까? 그래, 그건 나중 얘기라고 치자. 투자가 들어와. <밤사냥> 만들어. 그러면 네가 나보다 <밤사냥>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보통이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따위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첫 영화의 실패. 스스로가 망친 영화를 지켜보고,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혹평을 받는 과정까지.

[최악이었습니다. 대학영화제에 올라올 수준이 아니었어요.]

[무슨 생각으로 편집도 안 된 영화를 올립니까?]

[다른 후보작들한테 민폐일 정도입니다.]

매일 꿈에 나오는 비난들에 임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 영화의 주인이다.’ ‘내가 당신보다 더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다.’

‘나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도저히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정감독이 임감독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가난한, 그리고 아직 어린 신인감독. 정감독은 이런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일을 겪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지도.

-성우야. 시나리오 그냥 가져갈 생각은 아니었어. 요즘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다고, 장학금 추천서 받으러 왔다면서.

정감독이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임감독에게 물었다.

-돈 필요 없니?

그 말에 임감독이 고개를 들고 정감독을 바라보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임감독의 눈을 본 순간 정감독은 이미 이 일의 결론을 알 수 있었다.

-<밤사냥>이 부모님보다 중요하진 않을거 아냐.

임감독이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란 것을.

**

정감독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는. 돈 때문에 시나리오를 판 자신. 영화를 잘 만들 자신도, 영화감독이라 말할 자격도 없는 자신.

그날 임감독은 정감독의 연구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아, 그래.

나는 평생 영화를 만들 수 없겠다.

**

“그래서 정감독한테 팔았어. 꽤 많이 받았어. 남은 학기랑 기숙사도 전부 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게 해줬고.”

한록이 알지 못하던 진짜 진실. 임감독은 시나리오를 뺏기지 않았다. 정감독에게 시나리오를 판 것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형을 협박한 거잖아.”

한록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감독은 임감독의 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마음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게 임감독이 영화를 그만둬야 할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내가 선택한 거지.”

그러나 임감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다고.”

임감독의 말은 단호했다. 그 말에 한록이 물었다.

“거짓말 하지마. 매일 블로그에 시나리오를 올렸잖아. 형도 다시 만들고 싶어했잖아. 나 그거 전부 봤어.”

“...너, 그거 언제까지 봤어?”

블로그. 그리고 시나리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몸을 움찔하는 임감독.

‘...이걸 왜 물어보지?’

그러나 한록의 의문도 잠시. 임감독은 바로 말을 돌렸다.

“그건 이 일이 있기 전이지. 그때는 나도 다시 만들고 싶었어. <밤사냥> 이후는 아니었고.”

“진심이야?”

“당연하지.”

“그래서 연락을 끊은 거야?”

“응. 너랑 있으면 계속 그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할테니까.”

임감독은 한록의 말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성이 계속 높아지고, 의미 없는 질문과 답변이 둘 사이를 오갔다. 한록이 다시 임감독에게 물었다. 다른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라, 정말로 하고 싶던 질문이었다.

“형. 정말 포기할 수 있어?”

그러자 임감독은...

“아니. 아무것도 포기한 게 아니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 지금 한달에 삼천씩 벌어. 세상 사람들 전부 다 내 드라마를 보고 있어. 나 성공했어. 정교수님도, 누구도, 나한테 함부로 못해. 드라마 쓰는 거 재밌어. 이번엔 작품성도 좋은 거 하나 써봤어. CK가 300억짜리로 만들어준대. 그런데 내가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해. 내가 왜 또 그런 일들을 겪어야해.”

“형.”

“내가 왜. 난 그렇게 상처받으면서 까지 영화 만들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분노와 고통이 담긴 임감독의 말.

“그럼 우리 약속은.”

한록의 질문.

“미안.”

임감독의 말.

“그게 무슨 뜻이야.”

한록의 질문.

그리고.

“잊은지 오래란 말이야.”

임감독의 답.

**

“...간다. 다음에 다시 올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임감독이 말했다.

“다시 찾아오지 마.”

**

자신의 차로 돌아온 한록. 한록은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진심이 아니다.’

한록은 임감독이 오늘 한 말이 대부분 진심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말들이 진심이라기엔, 그간 임감독의 실은 언제나 미련과 후회를 보여주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아주 만약에...

-내가 왜 또 그런 일들을 겪어야해.

그 말이, 아주 조금이라도 진심이라면....

‘정말로...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무엇도 돌아보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형.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한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오늘 임감독의 행동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돈을 받고 시나리오를 팔았다. 다시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한록과의 약속은 잊은지 오래다. 한록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대답들. 그리고...

-...너, 그거 언제까지 봤어?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응.

‘...그 질문이 갑자기 왜 나온 거지?’

임감독의 반응에 갑자기 의아함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형 블로그는 10년 전에 사라졌는데.’

‘블로그 얘기에 왜 그렇게 반응한 거지?’

‘블로그를 다시 만들었나?’

일기. 그리고 자신의 시나리오를 올리던 임감독의 블로그. 그러나 임감독의 블로그는 임감독이 한록과 연락을 끊은 시점에서 동시에 사라져 있었다.

거기에, 무언가...

‘거기에 뭘 올리고 있나?’

임감독이 숨기고 있는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록은 곧장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주소를 주소창에 입력했다.

[http:blognet.directorlim.com]

임감독의 블로그 주소. 분명, 10년 전에 사라졌던 그 블로그가...

[임성우의 블로그]

다시 만들어져있었다.

‘블로그가 살아있어. 분명 뭔가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임감독의 블로그를 살피는 한록. 그러나 임감독의 블로그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10년 전 그랬던 것처럼 멈춘 날짜. 멈춘 게시글. 멈춘 방문자. 아니.

[sf89013]

누군가의 방문기록.

‘아.’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이 직감 하나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이거다.’

이 방문자가 바로 임감독이란 직감이었다.

한록은 방문 목록을 눌렀고, 방문자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수백 개의 비밀글.

[암호를 입력하세요.]

그리고 게시글에 걸린 비밀번호.

거의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작성된 수백 개의 비밀글. 그걸 보는 순간 마치 운명처럼 떠오른 말들.

-형. 이거 비밀 번호가 뭐야?

-아.

-우리 영화 제목.

[암호를 입력하세요.]

[password]

[password__영화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리고 확인버튼을 누른 순간.

모든 게시글을 비밀번호가 해제되었고, 한록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감독의 것처럼 보이는 블로그. 그 곳에 작성된 수백 개의 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작성된 글. 바로 어제도 올라온 글. 그 글들은 전부.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20221220 수정]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20221219 수정]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20221218 수정]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20221217 수정]

.

.

.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20150924 수정]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시나리오였다.

**

한록은 생각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다시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단 말. 상처받고 싶지 않단 말. 그렇게까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 꼭 다시 만들어 줘.

-응, 그래.

그 말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임감독은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한록보다도 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잊고 싶어도. 그래도 잊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어. 형.”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한록을 돌려보낸 임감독. 임감독은 그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은 건지.

그때의 마음이 변한 건지.

정말로 모두 잊은 건지.

오늘 한록이 했던 수많은 질문들. 그에 대한 임감독의 답은 하나였다.

잊고 살 수 있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형. 문 열어.”

한록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

“돌아가.”

“나 지갑 두고 갔어. 열어줘.”

“...”

한록의 말에 문을 열어준 임감독. 그러나 한록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한록은 들어오자마자 임감독에게 아까처럼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거짓말하지마. 제대로 대답해.”

한록이 임감독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 블로그 봤어.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시나리오.”

‘...봤구나.’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대답을 시작했다.

“그냥 조금 다듬기만 했어.”

“아닌 거 알아.”

“그래. 미련이 남았어. 그런데 그 정도야.”

“형.”

“마음은. 마음은 다시 만들고 싶어. 하지만 다시 만들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말해. 형.”

“정말이야. 나는.”

“형. 정말로 다 잊어버렸어?”

한록의 질문에 임감독은 자신이 해야할 답을 알 수 있었다. 대답해야 한다. 잊을 수 있다고. 잊고 살아왔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야한다. 그때처럼 그렇게 말해야한다.

“아니.”

그러나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꿈. 추억. 약속. 너무나 소중하지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버려야하는 것들. 누군가는 그것들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못 잊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영화를 만들고 싶어.”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

“그럼 다시 만들자. 이제 할 수 있잖아.”

드디어 나온 임감독의 솔직한 대답. 그 말에 한록이 물었다. 그러나 임감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나. 내가 영화를 만들 자격이 되나. 내가 영화를 만들 능력이 있나. 내가. 내가. 내가 과연 감독이 될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나.’

그 질문에 다시 처하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화를 그만둔 이유. 정감독도, 돈 때문도 아니다. 오직 이것 때문이다. 또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또 영화를 망칠 것 같아서.

나를 믿을 수 없어서.

임감독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도 쉽게 하지 못한 답.

‘...나는 못해.’

그리고 10년이 지나 돌아온 답은...

“형. 나는 이제 할 수 있어.”

임감독이 아닌 한록이 한 것이었다.

“난 알아. 형이 멋진 영화를 만들 거고. 내가 그걸 사람들한테 알릴 거야.”

그 말에 임감독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나는 못해.’

10년이 지나도 용기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자신도. 염치도. 자격도 없었다. 다시 영화를 만드는 것.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 그리고 사랑받게 만드는 것. 자신은 그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록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임감독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과거와 상처, 그리고 부족함을 마주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후회보다 지금 당장의 괴로움이 더 컸다. 그걸 알기에 임감독은 영화를 그만두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한록은 임감독에게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할 수 있어, 형.”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한록이라면.

“한록아. 내가 할 수 있을까.”

-한록이란 사람이.

-내 친구가.

“언제나 할 수 있었어.”

-내 첫 관객이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첫 관객과 오랜 약속.

몇 십년이 지나더라도 잊을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임감독은 생각했다.

“그래. 해보자.”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고.

**

임감독의 말을 들은 한록. 한록이 잠긴 목소리로 임감독에게 말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임감독이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다렸어, 형.”

아주 다정한 목소리였다.

**

그리고 며칠 후, 어느 아침.

“...형.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한록의 차를 타고 출근을 하던 영도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한록이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생각하는 일이 이뤄질 거 같아서.”

“그게 뭔데?”

<식물>이 곧 추가 촬영에 들어간다. 정감독을 물리칠 방법도 생각해뒀다. 무엇보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다시 만들 수 있다. 한록이 오래 꿈꿔오던 일들이 전부 이뤄지게 생긴 지금. 하지만 한록은 아직 영도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비밀.”

왜냐면 아직 해치워야할 단계가 남아있으니까.

“무슨 일이지, 이한록 팀장?”

한록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최경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최경준의 질문에 답했다.

“곧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식물> 얘기인가?”

“아뇨. <식물>의 10배는 될 영화입니다.”

“그거 재밌겠군. 어떤 영화인지 들어나 볼까.”

“대신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부탁인가.”

한록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이제는 한록의 당황스러운 부탁 따위 익숙하다는 뉘앙스였다.

“본부장님의 프로젝트를 양보해주셨으면 합니다. 방송국의 프로젝트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역시나 한록의 제안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최경준. 그런 최경준에게 한록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징어 서바이벌>. 영화로 만들겠습니다. 제게 넘겨주십시오.”

300억짜리 예산의 드라마. 최경준이 직접 선택한, 방송국의 운명을 결정할 드라마. 그 드라마를 자신에게 넘기란 제안. 그 어느때보다도 당황스럽고.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당당한 한록.

“...자네는 언제나 날 곤란하게 해.”

그 말에 최경준이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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