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21화 (202/263)

물어라.

사무실에 단 둘이 남게 된 한록과 정감독. 한록이 소파에 앉은 정감독을 바라보았다..

‘도둑놈.’

예전 같았으면 여태 무슨 짓을 해왔는지. 누구의 시나리오를 뺏었는지 정감독의 멱살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한록이 아니었다.

‘정감독은 어려운 상대지. 하지만 자네는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오늘 미팅 전. 최경준이 했던 말.

‘할 수 있다.’

한록 역시 최경준과 같은 생각이었다.

‘임원으로서 움직일 때는 말이야. 자네만의 무기가 필요해.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고, 상대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전략 말이야.’

한록이 유선에게 프레젠테이션을 가르쳐줬던 것처럼 한록에게 임원으로서의 전략을 알려주는 최경준. 최경준의 장점은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는 그의 업적. 그리고 엄청난 카리스마와 연륜이었다.

임원의 무기. 특별함. 누구라도 이성을 잃고 설득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압도적인 매력과 힘.

‘자네는 이런 걸 쓰기엔 아직 너무 어리지. 자네가 카리스마로 사람을 누른다라. 택도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자네의 힘은 다른 곳에 있지. 자네가 가장 잘하는 것 말이야.’

그래서 최경준이 한록에게 한록만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금.

‘해보자.’

한록이 얼굴에 미소를 걸고 대화를 시작했다.

“감독님. 신작 준비하고 계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아, 이거 민망하네. 샬롯테랑 작업중인 거 알잖아요.”

“네. 좋은 작품을 뺏겨서 아쉽습니다. 다음 작품은 저희에게 기회를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허, 참. 잘생긴 사람이 말도 잘해.”

“감독님만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화배우처럼 생겨 놓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독님 영화라면 꼭 출연하고 싶군요.”

아무런 의미 없이 오가는 한록과 정감독의 대화. 그러나 한록의 말에도 정감독의 실은 한록에게 뻗어오지 않았다. 정감독의 실은 계속 그의 등 뒤에 머물러 있었다.

한록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보여주지 않는 실. 정감독이 얼마나 교묘한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모습이었다.

“<식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만들었더라고. 단편 때부터 좋게 봤지.”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듯,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대화가 몇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록은-

“감독님. <식물>에 참여해주시겠습니까.”

미끼를 던졌다.

신인 감독의 영화에 원로 감독이 멘토로 참여한다. 영화를 뺏어가기 딱 좋은 구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식물>이란 말에 밧줄처럼 생긴 정감독의 실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한록에게 다가왔다.

마치 먹이를 탐색하는 뱀 같은 정감독의 실. <식물>이 탐이나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도와주고 싶은데 말이야. 내가 <오늘까지만>을 작업 중이라. 나도 두 개를 한꺼번에 맡긴 어려워.”

그러나 정감독은 단 번에 한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역시 예상대로였다. 정감독은 교묘한 사람이고, 절대 쉽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감독님. 뭘 우려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감독님을 충분히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한록이 자신을 안심시켜주기 전까진.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한록의 말에 정감독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아직 이르다.’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말을 이었다.

“감독님이 고생하시는 만큼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멘토 같은 건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으니까요.”

“후배들 도와주는 일이야. 굳이 그런 걸 따질 생각은 없어. 시간이 안 될 뿐이지.”

“감독님은 생각이 없으셔도 저희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음, 이팀장. 이런 얘기는 불편하네. 그래서 뭘 어쩌겠단 거야? 억지로 내 이름을 크레딧에 넣겠다고? 도대체 뭘로? 이감독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

한록의 말에 오히려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정감독. 누군가 본다면 정말 한록만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고 할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한록은 자신의 말이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바라는 거 없어. 이감독 도와주고 싶어. 근데 바쁘다니까.”

정감독의 실이 아주 주의깊게 한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놈을 어떻게 삼켜버릴 수 있을까.’

마치 그렇게 말하듯 한록의 주위를 맴도는 정감독의 실. 그 실을 똑바로 노려보며 한록이 말을 이었다.

“감독님 이름을 <식물>의 공동감독으로 올리겠습니다. 그걸 원하실 테니까요.”

공동 감독.

<식물>을 만든 이감독과 똑같은 수준으로 영화에 기여했다고 언급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감독은 아직 데뷔도 못한 신인감독이고, 정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사람들은 <식물>을 감독님의 영화로 기억하겠죠.”

정감독에게 <식물>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휘릭!

한록의 도발에 정감독의 실이 순식간에 한록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어떤 놈이냐.’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냐.’

‘진심이냐. 나를 떠보는 거냐.’

‘혹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정감독의 실. 그러나 정감독의 얼굴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정감독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태연해 보였다.

“겨우 멘토 역할 하는 것 정도로 공동감독이라니. 너무 과하단 생각이 드네.”

정감독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만한데, 정감독은 절대로 한록의 수에 넘어오지 않았다. 능구렁이. 늙은 너구리. 꿍꿍이가 가득한 노인. 정감독은 30대 초반의 젊은 팀장 따위는 자신의 손바닥 위라는 듯한 태도였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간 영원히 정감독의 입을 열지 못할지도 몰랐다.

“<밤사냥>. 감독님의 시나리오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결정타가 필요했다.

정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밤사냥>를 언급하는 한록. 한록의 말에 정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생의 시나리오를 가져왔단 사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무례한 말을 하는군. 이만 가봐야겠어.”

“감독님. 이미 피해자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감독과 한록이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얼핏 들으면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정감독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당신의 편이다.’라고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댁이 신경 쓰든 말든 상관 없어. 그쪽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까.”

“어차피 신인감독이 <밤사냥>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어도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진 못했을 겁니다. 시나리오가 주인을 찾아간 거죠.”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안 하는군. 이럴 거면 뭐 하러 불렀어?”

정감독의 말을 들으며, 한록은 방금 전 최경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네의 힘은 다른 곳에 있지.]

“감독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보세요. 쓸데 없는 소리면 말고.”

-물어라.

“<식물>은 3부작으로 제작됩니다. 그 중 2편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공동감독이 아닌 감독으로요.”

“또 이 헛소리인가?”

-물어라.

“<식물>은 이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감독들의 연작으로 알려지게 될 겁니다. 그 중 감독님이 손을 댄 2편이 가장 유명해질 거고요.”

“이팀장. 당신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유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식물>이 신인감독이 아니라 감독님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게 더 마케팅에 유리할 테니까요. <식물>같은 영화. 그리고 감독님. 그 조합이면...”

-물어라.

[누구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자네의 매력. 자네가 누군지 보여주고, 자네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무기.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무기. 자네한테 그 무기는.]

“저는 이 영화를 역사에 남을 영화로 만들 수 있습니다.”

[자네의 능력이야.]

그 말에 정감독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30대 초반. 하지만 지금 한국 영화계, 아니 전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 중 한명이라고 불리는 남자. 그런 한록이 자신에게 건넨 말.

‘저는 이 영화를 역사에 남을 영화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임감독의 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최경준의 말처럼, 이한록이란 사람이 가진 압도적인 강점에 저도 모르게 이성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임감독의 실이 마치 유혹 당하듯 한록의 얼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록이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니라 정말 역사에 남을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정말 그 파트너로 자신을 선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 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한록을 바라보는 정감독. 그리고, 한록의 손목에 닿은 정감독의 실.

그 실을 보는 순간 한록은 생각했다.

“이팀장.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

-물었다.

**

“전편 공동감독. 한 편은 단독 감독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감독도, 공동감독도 필요 없어.”

“네. 압니다. 다만 저희는 그렇게 챙겨드릴 겁니다.”

“사람 말을 전혀 듣질 않네. 난 이감독한테서 <식물>을 뺏을 생각이 없다니까.”

“두달 안에 다시 촬영을 시작할 겁니다. 그때쯤이면 합류가 가능하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대화인지도 모르겠군. 날 붙잡고 대체 뭘 하자는 건가?”

“단독 감독은 2편이 좋겠군요. 2편이 가장 임팩트 있을 테니까요.”

정감독은 미끼를 물었다. 그런 확신 아래 자신의 할 말만을 내뱉는 한록.

그리고.

“그래.”

정감독의 인정.

**

“1편부터 단독으로 내 이름이 올라갈 수 있으면 더 좋고.”

한번 물꼬가 트이자, 정감독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정감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2편에서 이감독의 이름을 빼겠다고 말했고, 아예 <식물> 전체를 가져가겠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한록 팀장과는 생각이 잘 맞는군. 다음에도 불러줘.”

그리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한록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끝난 정감독과의 대화.

정감독은 <식물>을 약속받고 자리를 떠났으며, 한록은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하...”

오랜만에 겪는 치밀한 전략과 암투. 대화가 끝나자 밀려오는 피로감에 한록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기댄채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위로 던졌다.

[1편부터 내 이름이 올라갈 수 있으면 더 좋고.]

녹음기였다.

**

그날 저녁.

“형.”

“어? 무슨 일인데 전화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한록이 임감독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온 임감독에게 녹음기를 건네며 말했다.

녹음기에 담긴 정감독의 본색. 그리고 진실을 밝힐 증거들.

“이제 가자.”

이제는 임감독의 영화들이 세상으로 나올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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