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임성우! 이거 왜 이래!]
“어...이 영화, 좋긴 좋은데...편집이 좀 이상하지 않아?”
“정교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의 난도질이 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과, 임감독에게 쏟아지는 시선들. 그러나 임감독은 꿋꿋히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이제 스크린 속 장면은 엔딩을 넘어서고 있었다.
단편버젼과는 다르게,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뒷부분이 스크린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으며 잠든 소년이 아침에 눈을 뜨는 장면이었다.
영화를 보고 위로를 얻은 날.
그리고, 이어지는 삶,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년.
평소보다 밝아진 얼굴로 가방을 챙겨 짐을 나서는 소년.
등교를 위해 버스에 타는 소년.
소년을 노려보는 같은 반 학생들.
-소년과 학생들 사이에 손잡이를 잡고 서는 한 남자.
그 남자를 보고 영화제 객석에 앉은 누군가가 말했다.
“저거 <파일럿> 아냐?”
그 사람의 말처럼 남자는 <파일럿>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노란 머리에 가죽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소년의 하루에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다.
-소년이 버스에서 내리다 넘어지려 할 때. 소년을 부축해준 여자.
“저건 <시월> 같은데.”
영화 <시월>에 나온 여자주인공처럼 양갈래에 옛날 교복을 입고 있다.
-소년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남자.
“<달려라 페달>.”
-지각을 할 뻔한 소년을 위해 교실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동급생.
“<지금 우리 학교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어제처럼,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소년의 삶에 들어온다.
소년에게 과자를 주는 어린아이.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는 편의점 사장. 소년에게 장갑을 건네주는 여자. 넘어진 소년을 일으켜주는 할머니.
잠든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소년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등장인물의 모습에 한록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한록은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임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한록만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꿈꾸듯 행복한 삶과 영화 속 등장인물들. 소년의 하루만이 아니라 일주일을. 한달을. 일년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그들은 바로.
“성우형.”
“응.”
“우리가 봤던 영화구나.”
한록과 임감독이 함께 본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임감독은 오로지 한록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오로지, 한록이...
“응. 그때 너 웃고 있었거든.”
이 영화를 보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래서.
영화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고, 스크린에선 <파일럿>의 주인공이 소년의 집 문앞에 편지를 남겨두는 장면이 상영되었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그 편지를 집어 읽기 시작했다.
<파일럿>의 주인공과 영화에 나온 모든 등장인물. 그들이 소년을 위해 쓴 편지가 나레이션이 되어 흘러나온다.
[이토록 버거운 삶.]
[그래도 네가 행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 장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임감독이 가장 만들고 싶었던 장면.
그 곳에선 소년이 불이 꺼진 영화관에 앉아있었다.
[이 영화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기를.]
그리고 소년의 곁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함께 앉아있었다.
**
그렇게 끝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이게 끝인가?”
“뭐야...좋은데, 좀 이상해.”
“편집이 왜 저런 거지? 화면은 좋던데...”
관객들은 당황한 채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편집이 말도 안 되게 엉망인. 그러나, 내용이 너무 훌륭한 영화. 그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록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나오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한록은 그저 멍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게 영화라면.
-그렇다면.
나는 평생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한록의 인생을 바꿔버린 영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러나 영화가 아닌 현실은 냉정했다.
영화가 모두 끝난 후 임감독은 심사평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임감독에게는 혹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본도 안 된 영화입니다. 잘도 이런 걸 영화제에 가져왔군요.”
“대학 차원에서 걸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편집으로 난도질이 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그에 대한 평가는 뻔했다.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나올 때 임감독은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임성우. 네 이름 기억하마.”
그리고 무대 아래에서 만난 정교수의 말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한록에게로 향한 임감독. 임감독에게 한록이 물었다.
“형. 이 영화 꼭 다시 만들자. 사람들한테 꼭 다시 보여주자.”
임감독에게 ‘약속’을 하는 한록.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한록도, 임감독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약속은 아마 지켜지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다시 만들어지지 못할지 모른다.
어쩌면 임감독은.
“응. 꼭 그러자.”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할 지도 모른다.
**
그때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한록.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를 떠올리던 한록이 눈앞의 임감독을 바라보았다.
영화계의 거장에게서 등을 돌린다. 업계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 편집도 되지 않은 졸작을 선보인다. 임감독은 가끔 이런 실수를 했다. 말도 안 되는 피해를 입을 걸 알면서도,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정우택 감독. 위험한 사람이야.”
한록이 너무나 걱정되기 때문에.
“응. 고마워, 형.”
임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조금 안심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나 들어가서 잔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혼자 남겨진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정우택.’
정우택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임감독이 망설이면서도 한록을 위해 해준 말. 그 말을 들으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한록은 임감독이 졸업한 학교의 홈페이지를 뒤져보았고...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겸임교수]
[정우택]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 정감독이 형한테 영화를 수정하라고 말한 교수였다.’
정감독은 임감독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임감독의 교수가 맞았다. 임감독에게 영화를 수정할 것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앞길을 막겠다고 협박했던 사람. 그게 바로 정감독이었던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닐 거다. 정감독과 성우형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있었을 거야.’
그리고 둘의 악연은 여기서 끝이 아닐게 분명했다.
‘정감독은 위험한 사람이다. <식물>에 투입할 수 없어.’
다행히 임감독의 얘기 덕분에 <식물>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걸 잡아낸 상황. 한록은 곧장 정감독을 <식물>에서 제외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성우형과 정감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낸다.’
이제는 정말로 과거의 악연을 끝낼 생각이었다.
<식물>. <오징어 게임>.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임감독과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이 모든 것은 영화계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걸 위해선 반드시 정감독과 임감독 사이의 일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정감독이 너무나 훌륭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는 상황.
‘나도 정감독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영화계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는 한록조차 정감독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아마 정감독은 철저하게 자신의 비밀을 숨겨왔고, 그만큼 그 비밀은 위험한 것일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록에게는 이 일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헐리웃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록. 그런 한록보다 업계를 잘 알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인 정감독. 그런 정감독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본부장님. 이한록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경준 본부장이었다.
**
며칠 후. 한록을 사무실로 부른 최경준.
“정감독에 대해 알아봤네. 나도 모르는 일이 있었더군.”
역시나 그는 며칠만에 정감독의 실체에 대해 알아냈다.
“정감독의 <들개>와 <밤사냥>이 본인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이 있어.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뺏은 것 같군.”
‘역시...’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 혹은 업계 선배에게 시나리오를 뺏기는 것. 이 바닥에서는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빈번한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은 작가와 감독들이 자신의 시나리오가 남의 이름으로 영화화 되는 것을 보았고, 그것 때문에 펜을 꺾었다.
‘성우형이 왜 <식물> 얘기에 나오니 조심하라고 말했는지 알겠어.’
임감독이 <식물>에 반응한 것 역시 이 때문이리라. 이제 막 장편영화를 처음 만드는 신인 이감독. 임감독은 이감독이 자신처럼 영화를 뺏길까봐 걱정을 한 것이었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도 한 감독이 학생들 시나리오를 뺏는 사람이었다니.”
최경준이 작게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감독이 정말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영화계의 거장이란 사실은 한록과 최경준 역시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결국 남의 시나리오로 쌓은 거짓 명성이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들개>. 천만 관객을 이룬 <밤사냥>.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작품이 다른 학생들의 것이고, 임감독의 것이었을까?
“자네는 어디서 이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나도 모르던 일인걸 보면 아주 단단히 입막음을 했을텐데 말이야.”
“피해자 중 한 명과 아는 사이입니다.”
“아, 그래.”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좋은 정보를 가져왔네, 이한록 팀장. 정감독이 이번에 샬롯테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어. 제작비가 200억이라더군. 무엇보다 꽤 재밌어보여.”
정감독의 신작 영화 <오늘 까지만>. 회귀 전 올해 유일하게 천만영화를 달성한 작품이었다. 샬롯테는 CK ENM이 해외팀에 집중하는 틈을 타 정감독을 데려갔고, 2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입했다. CK가 헐리웃을 노리는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회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도전자들을 죽여 놓을 타이밍이란 뜻이야.”
그리고 최경준은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최경준. 그는 자신의 말처럼 정감독과 샬롯테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러나 최경준에게 다른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최경준. 그의 실이 한록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자네가 유니버설을 꽤 잘 요리하더군. 임원다운 모습이었어.”
최경준의 코칭 아래, 유니버설을 협박해서 원하는 성과를 얻어낸 한록. 그때 최경준은 한록이 이제 단순히 일만 잘하는 사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자네가 해보겠나.”
한록에게 한 번 더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감독을 무너뜨릴 기회를 주겠다는 최경준의 말.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많은 고민을 했을 말이었다.
“네.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 따윈 들지 않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한록은 정감독과 CK ENM에서 미팅을 가졌다.
“아, 이한록 팀장. 오랜만이야. <식물>은 어디까지 진행됐나?”
“서감독님이 합류하시는 걸로 확정됐습니다.”
정감독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한록. 정감독이 <식물>에서 빠지는 건 이미 확정이 된 상황이지만, 한록은 정감독에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정감독에게 용건이 있었으니까.
한록이 서늘한 얼굴로 정감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자세한 건 제 사무실에서 얘기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