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19화 (200/263)

이게 내가 만들고 싶던 영화야.

“네가 이걸 어떻게...”

[형 블로그 봤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메일 확인해 봐.]

임감독은 블로그란 말이 나오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록의 말처럼 지금은 시나리오를 확인해야 했다.

“야, 이거...”

한록이 보낸 시나리오를 확인한 임감독이 입술을 씹었다.

관객들의 시선을 끌만한 자극적인 내용과 평론가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비참한 엔딩. 한록의 시나리오는 정교수의 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형. 이대로 촬영해.]

한록은 임감독이 죄책감을 느끼는 걸 막아주기 위해 스스로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보낸 것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다. 난 너한테 이런 짓 못해.”

[형. 내가 괜찮다잖아.]

한록의 말을 거절하는 임감독. 그러나 한록의 반응은 단호했다.

‘괜찮을 리가 없어.’

한록은 정말 괜찮아서나, 아무 생각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한록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오로지 임감독을 위해.

[영화감독이 돼서 이런 영화 만들어주기로 했잖아.]

그리고 둘의 약속을 위해서였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일단 데뷔부터 해.]

몇살이나 어린 동생의 어른스러운 말에 임감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진리를 생각했다. 정말 원하는게 있다면. 꿈을 이루고 싶다면.

그렇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다.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노력하고.

어디까지 도전하고.

어디까지 타협하고.

또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

한참의 침묵 후 임감독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

“교수님. 교수님 말씀대로 시나리오 수정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학교 차원에서 밀어줄 테니까 어서 촬영 들어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록이 보내준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 임감독.

“임성우 대학영화제 나간다는데? 출품작 만들라고 장학금 받고 있대.”

“정교수님이 지금 한예종 이기라고 밀어주고 있대.”

“와씨. 좋겠다.”

“근데 시나리오가 괜찮긴 하더라고.”

정교수는 라이벌 학교를 이기기 위해 임감독에게 수많은 서포트를 해주기 시작했고, 임감독이 대학영화제에 출품한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학교에 퍼져나갔다.

“야, 성우야. 축하한다.”

“너 진짜 데뷔하겠다. 교수님 라인 잘 타봐.”

“20대에 데뷔라...거의 박찬욱이네.”

임감독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축하와 기대들. 그 속에서도 임감독은 계속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게 맞는 걸까?’

‘한록이한테 이래도 되는 걸까?’

‘감독이 되겠다면서, 이렇게 타협해도 되는 걸까?’

고민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성우야. CK랑 얘기했다. 단편 영화 특별전으로 극장에 넣어주겠대.”

“그러면...”

“극장개봉 확정이다.”

그 앞에 놓인 것들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래. 일단은 데뷔가 우선이야. 극장에서 개봉을 한 감독이라면 업계에서 대우가 달라진다. 일단 개봉을 하고, 투자사를 찾자. 그리고 다시 영화를 리메이크하자. 그 때가 이 영화의 진짜 완성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새로운 전략을 짜는 임감독.

그렇게 임감독의 각오는 강해졌고, 촬영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대학영화제는 가까워졌고...

“교수님. 가편집본 나왔습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가편집본이 완성되었다.

**

대학 영화제가 한달 남은 시점.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가편집본 시사회가 열렸다.

“와. 남감독님도 오셨네.”

“정교수님이 초청하셨대.”

“야, 성우야. 진짜 멋있다!”

“졸업도 안 한 새끼가...”

“성우 학생. 고생 많았어요. 정교수님이 어찌나 칭찬하시던지.”

같은 과의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정교수의 인맥을 통한 영화계 인사들까지. 30명은 되는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강의실에 모였다.

처음으로 제대로 만들어본 영화. 그 영화의 첫 상영.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타협과 굴복. 그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뿌듯함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상영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첫 상영이 시작되었다.

임감독의 원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주인공 한록이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환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한록의 수정된 시나리오. 가편집본은 한록의 시나리오대로 촬영되었다.

꿈꾸던 행복했던 하루.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행복했던 하루가 모두 환상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주인공을 두고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리고 한록의 이름을 딴 주인공은 텅 빈 상영관에 혼자 남게 된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외롭게.

“괜찮지 않습니까?”

“네. ‘영화는 환상일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영화제에서 좋아할 메시지네요.”

영화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임감독의 소망과 정반대의 내용이 되어 버린 영화.

“구조도 좋네요. 영화가 한 번 끝나는가 싶더니 처음으로 돌아가는 부분이요.”

“그것 때문에 이 녀석 영화를 선택한 거야.”

정교수와 영화계 관계자들이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보며 낮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학생들 역시 영화에 푹 빠진 얼굴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임성우라. 꽤 재능있는 학생이군요.”

재능있는 신예감독의 등장. 그걸 인정하는 사람들. 임감독이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금 이 순간.

이 황홀한 순간, 임감독은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를 보게 되었고...

‘아니야.’

‘이런 영화를 만들려던 게 아니야.’

충격에 빠진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영화와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친구의 모습.

‘한록이가 이 영화를 볼 거야.’

자신이 너무나 위로해주고 싶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혼자 영화관에 남게 될 것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려 한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야. 이런 걸 만들려고 감독이 되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임감독은 이제야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거 분명 상 타겠지? 우리 학교에서 10년만 아니야?”

“어, 남감독. 어땠어? 어디를 좀 손볼까?”

“결말을 조금 더 자극적으로 빼도 될 것 같네요. 그거 외에는 다 좋았습니다.”

“임성우 학생이라고 했던가. JP필름 강팀장입니다. 한번 연락 줘요.”

영화가 모두 끝났고, 사람들은 임감독에게 다가와 칭찬을 건넸다. 그러나 임감독에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임감독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한록: 잘 끝났어?]

[이한록: 고생 많았어.]

[이한록: 멋있다, 형.]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한록에 대한 미안함뿐이었다.

**

그날 밤. 임감독은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첫 영화. 첫 시사회. 오늘 사람들에게서 쏟아졌던 박수. 극장개봉에 대한 기대. 황홀하게 펼쳐질 앞으로의 미래.

그리고 자신의 꿈.

꿈을 위해서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노력하고.

어디까지 도전하고.

어디까지 타협하고.

또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

긴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임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겉옷을 챙겨 어디론가 향했다.

**

그리고, 한달 후-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대학영화제가 열리는 날.

한록은 임감독의 영화가 상영하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리고 네시간 동안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대학영화제가 열리는 임감독의 학교로 향했다.

임감독의 학교로 향하는 네 시간. 그 시간동안 한록은 핸드폰에 담아온 임감독의 영상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한록의 이름을 가진. 한록과 닮은 주인공.

그 주인공이 영화를 보고, 영화에 위로받는 짧은 영상.

그 영상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것이다. 결말이 바뀐 임감독의 영화를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멋있다고. 이 영화가 좋다고.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감독을 꿈을 위해. 이 정도쯤은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

임감독의 학교로 가는 길거리에 붙어있는 임감독의 포스터. 그리고, 그 옆의 임감독.

“...한록아!”

한록을 발견한 임감독이 깜짝 놀란 얼굴로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한록이 정말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 영화는 이제 한록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으니까.

‘웃자.’

그리고 한록은 임감독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한록은 임감독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영화를 보고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당신의 영화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주기 위해. 임감독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 위해.

그러나 임감독은 한록의 예상과는 다른 말을 했다.

“가자. 앞자리 하나 빼줄게.”

그 말에. 무언가...

“와 줘서 고마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한록이 영화 행사에 참여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들이 출품하는 영화제인 대학 영화제. 일반인들에게 대학영화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작은 영화제였다.

“아, 장감독님!”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청룡 영화제도 안 가시는 분이 여기는 오시네!”

하지만 영화 업계 사람들에게는 얘기가 좀 달랐다. 대학영화제는 앞으로 영화계를 움직일 미래의 인재들이 자신의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였고, 앞으로 영화계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영화제가 열리는 학교의 운동장에는 유명한 감독, 제작사 대표, 평론가 등 영화계 사람들로만 족히 500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여기 앉아.”

그리고 임감독의 덕분에 그들 중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한록.

한록이 자리에 앉자 임감독은 한록의 곁에 앉았다.

“이번에도 한예종 학생들이 수상하겠죠?”

“어유, 모르는 일이죠. 중앙대학교에 아주 괜찮은 작품이 있더라고요.”

“아. 정교수님 학생 말씀이시죠?”

“네. 그거요.”

주위에서 들려오는 임감독에 대한 얘기들. 그 얘기를 들으며 한록은 처음으로 참석한 영화제를 둘러보았다.

10월의 가을밤.

불길하고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가 담긴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본다.

어느새 해가지고, 날이 어두워졌으며...

“안녕하십니까.”

사회자가 스크린이 내려온 무대에 올라와 마이크를 든다.

“지금부터 제 62회 대학영화제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나영훈. <최고의 붕어요리>.”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정준호. <백색 남자>.”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정욱. <봄, 여름>.”

이제는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 된 사람들. 그들의 영화가 차례대로 상영되었고, 심사위원과 관계자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영화를 관람하였다.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임성우. <영화관을 가는 사람들>.”

그리고 드디어 임감독의 차례가 도착했다.

임감독과 한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심사위원석. 그곳에서 미소를 짓는 정교수.

“내 친구가 이거 봤는데 재밌대.”

“오. 드디어 성우 거다!”

“이거 기대작이라던데.”

기대작이 나타나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 사이로 한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임감독의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이 임감독의 영화를 사랑해준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괜찮을 것 같다고.

그리고 잠시 후.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상영이 시작되었다.

임감독의 데뷔작이자 정교수의 야심작. 이번 대학영화제 최고 기대작인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거 편집이 왜 이래?”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임감독의 데뷔작이자 정교수의 야심작. 이번 대학영화제 최고 기대작인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시작되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첫 영상과 똑같다.’

임감독이 보여준 첫 번째 영상과 같았다.

**

정교수가 조언한 결말과, 주인공의 좌절. 그 모든 걸 잘라내고 원안대로 영화를 만든 임감독.

이미 가편집본까지 나온 상태에서 다시 영화를 편집했다. 그러다보니 장면. 연출. 화면. 사운드 할 것 없이 영화는 모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임성우 학생. 파일 문제 없는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관계자가 다급하게 임감독에게 와서 물었지만 임감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성우야. 시사회 때랑 내용 바뀐 거야?]

[야, 임성우. 무슨 일이야! 편집 왜 이래! 파일 잘못 튼 거 아냐?]

이제 관객들까지 무언가 잘못 됐단 걸 깨달았다. 임감독의 친구들이 임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감독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임감독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로 결심한 얼굴이었다.

[임성우. 이게 무슨 짓이지?]

그리고 임감독은 정교수의 문자에 마침내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핸드폰을 끄고 오로지 스크린을 바라보는 임감독.

이제 스크린에서는 영화의 뒷부분이 상영되고 있었다. 정교수. 동기들. 그리고 한록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영화의 뒷부분. 임감독이 영화를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만들어야 했던 장면들.

한록이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 오로지 한록을 위한 영화.

“한록아. 이게 내가 만들고 싶던 영화야.”

그 영화가 500명 앞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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