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한록에게 꿈이 생긴 날이었다.
<오징어 서바이벌>. 21세기 가장 성공한 드라마 중 하나.
엄청난 몰입도와 재미에 영화계 모든 사람들이 <오징어 서바이벌>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걸 영화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모두가 <오징어 서바이벌> 작가의 차기작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작가는 <오징어 서바이벌>의 성공 이후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지금. 한록은 그 대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의 작가는 자신의 아주 오랜 친구였다.
‘역시. 성우형의 영화는 틀리지 않았어.’
한록은 이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마지막 공연>. 그리고 <오징어 서바이벌>까지. 한록이 영화를 사랑하게 만든 임감독. 그의 재능은 절대 빛을 잃지 않았다. 아직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만이 아니야. <오징어 서바이벌>도 영화로 만들 수 있다.’
임감독과 함께 할 나날이 절로 머리에 그려지는 한록.
문제는, 당사자인 임감독이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이유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록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방법이 있었다.
“고마워요, 최과장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딱 봐도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최과장을 돌려보낸 한록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임감독에게 전화를 걸고 말했다.
사람의 솔직한 마음이 나오도록 하고, 동시에 이성을 흐려지게 하는 방법.
“형. 오늘 술 마시자.”
바로 술이었다.
**
그날 밤 한록의 집에서 만난 둘.
“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바쁘다고 얼굴도 안 보여줬...”
“형. <마지막 공연> 봤어?”
“아니, 나도 좀 바...”
“바빠도 본다며.”
“...미안하다, 미안해! 오늘 내가 거하게 산다.”
“집에서 먹는데 뭘 사.”
“그럼 오늘 말고 다음 주에 산다.”
“그 시간에 영화 봐.”
“어디 보자, 안주는 뭐야?”
한록의 공격에 말을 돌리는 임감독.
임감독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공연>을 보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 더 보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한록 역시 임감독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놓은지 매우 오래된 지금. 자신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져서 나왔을지 두려운 것이리라.
한록 역시 그 마음을 알고 기다리려 했지만, 이제 시간이 없었다.
‘<오징어 서바이벌>이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로 가져와야해.’
그래서 한록은 이제 강수를 둘 생각이었다.
“안주, 형이 좋아할만한 걸로 준비했어.”
“뭔데?”
“<마지막 공연>.”
한록이 그 말과 함께 거실의 TV를 틀었다. 그러자 TV에서 <마지막 공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록이 회사에서 파일을 받아온 것이었다.
“야, 다음에 본다니까.”
“지금 봐.”
“아, 이거 내 취향 아니야. 안 볼래.”
“내가 참여한 건데?”
“...”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던 임감독이 한록의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물었다. 영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한록의 말. 그리고 한록은 임감독의 결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 보자.”
임감독은 언제나 한록에게 약했으니까.
**
“야, 한록아. 그만 따라.”
“형. 크게 말해. 잘 안 들려.”
“바로 옆에 있는데 안 들리긴 뭐가 안 들려?!”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는 한록과 임감독.
그러나 둘의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임감독이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나오는 <마지막 공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술을 마시며 <마지막 공연>을 지켜보는 임감독. 많은 감정이 오가는 듯, 임감독의 표정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하나있었다.
“멋지다, 한록아.”
한록에 대한 자랑스러움이었다.
‘날 정말 아끼는구나.’
부모처럼, 형제처럼 한록을 자랑스러워 해주는 임감독. 임감독의 실은 영화를 지켜보는 내내 한록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마치 어깨를 토닥여주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실이 단 한번 다른 곳을 향한 순간이 있었다. 바로 임감독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나오자, 임감독의 실은 TV화면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슬픔이 담긴 표정으로 TV를 바라보는 임감독.
점차 화면에 다가가는 실.
그리고...
어느 순간, 누가 자르기라도 하듯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임감독의 실.
임감독의 미련. 그리고 포기가 느껴지는 장면.
그 모습에 한록 역시 마음이 아팠다.
“형.”
그래서 한록이 임감독에게 말을 걸려 할 때. 그때,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한록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이한록 팀장. 정우택 입니다.]
바로 서감독과 함께 식물의 자문을 맡게 될 정감독이었다.
-잠시만.
한록은 임감독에게 입모양으로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문자 확인했어요. <식물>에 참여하길 바란다고?]
“네, 맞습니다. 엔딩 3개를 동시에 개봉할 예정이어서, 촬영부터 편집까지 도움이 필요합니다.”
[엔딩 세 개라. CK가 또 이상한 일을 하는군.]
한록과 <식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정우택 감독. 정우택 감독은 유명한 원로 감독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해외로 진출한 사람이자 한국 영화계의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그거 재밌겠네. 내일 다시 전화하지.]
다행히 정우택 감독은 <식물>에 합류하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네, 감독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한록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오자 임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야?”
“새로 만드는 영화 때문에. 단편 영화를 장편으로 만드는 건데, 감독님이 신인이야. 그래서 정감독님이랑 서감독님이 제작에 참여할 거야.”
“...”
한록의 말에 임감독은 답이 없었다. 답을 기다리다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한록이었다.
“형도 참여해줬으면 좋겠어.”
“생각 없어.”
“형.”
“서감독이 있잖아. 그 사람이 있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해.”
아니나 다를까 임감독은 한록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일단 얘기를-”
“싫어.”
그러나 한록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 있었다. 바로 임감독이 생각보다 더 격렬하게 한록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요 놈 봐라. 너는 욕심이 너무 많아. 서지훈 감독이 있는데 나는 또 왜 필요하다고!”
단호한 거절이 미안했던 것인지, 임감독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술이나 먹자, 술!”
“...그래.”
한록은 임감독의 격렬한 반응에 대 더 캐묻지 않고 술을 따랐다. 여기서 더 물어봤자 소득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록아. 너 이렇게 마셔도 내일 출근할 수 있어?”
“안 하면 되지. 나 팀장이야. 나한테 뭐라 할 사람 없어.”
“와...방금 좀 멋있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술잔을 비우는 한록과 임감독.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진심들 사이로 빈 술병만 쌓여간다.
“나 토할 것 같은데...”
“하고 와.”
그렇게 임감독이 크게 취했을 때. 한록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내일은 어렵겠고. 내일 모레 전화하지.]
[-정우택 감독]
방금 전화를 한 정우택 감독이었다.
한록의 화면에 뜬 정우택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보자 임감독이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뭔가 있다.’
그리고 한록은 임감독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할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한록은 임감독을 아주 오래 알았고, 임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임감독이. 임성우란 사람이 이렇게 겁쟁이가 된 이유. 영화를 그만두고, 영화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상처를 받게 된 이유. 그건 임감독이 실수란 걸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임감독이 잘못된 선택을 했던 이유는...
“한록아.”
“응.”
“이 사람 조심해.”
지금처럼 한록을 걱정해서였다.
**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
아직 한록이 청소년일 때. 그리고 임감독이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
-한록아. 우리 영화 만들자.
임감독이 한록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한록아. 전화 되지? 시나리오 수정한 거 블로그에 올렸어. 한번 봐봐.”
[응.]
“어때?”
[...좋아.]
“솔직히 말해!”
[얼마나?]
“제일 솔직하게.”
[전 시나리오가 나은 것 같아.]
“으아아악!”
한록은 춘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임감독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그렇게 블로그와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는 둘.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고, 다듬고, 친구들을 모아서 촬영을 하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야, 임성우. 너 요즘 촬영 하고 다닌다며?”
“그래. 영화 만든다.”
“5분짜리 단편이면서 영화는 무슨. 그 시간에 공부나 해라.”
그리고 임감독이 방학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엔...
“한록아. 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영화가 완성되어 있었다.
**
영화의 주인공. 울적한 얼굴을 한 소년.
소년은 기분을 바꾸기 위해 영화관에 향했고, 영화를 한 편 관람한다.
우울한 일만 가득한 소년의 삶과는 달리 너무나 행복한 일이 벌어지는 영화 속 영화. 소년은 영화를 다 본 후 영화관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년에게 영화 속에서 있던 행복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료수의 할인 행사.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던 것처럼 자신의 앞에 멈춰서는 버스.
갑작스레 떨어지는 비와, [아무나 사용하세요]라며 정류장에 놓인 우산.
그리고 먼 곳에 출장을 간 아버지의 전화까지.
그렇게 소년은 알 수 없는 행운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불에 누워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불행과, 우울한 일상. 그리고...
‘그래도 오늘은 즐거웠어.’
영화 속 하루처럼 행복하던 오늘.
소년은 밝아진 얼굴로 눈을 감고 그렇게 잠에 빠진다.
그렇게 영화는 끝나는가 싶으나,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 된다.
영화관을 나서는 소년. 그리고, 그 뒤를 몰래 따르는 사람들. 그들은...
-소년의 앞에서 차를 세우는 버스기사. 영화의 주인공.
-소년을 위해 음료수에 할인 스티커를 붙이는 편의점 주인. 영화의 히로인,
-소년을 위해 우산을 두고가는 할아버지. 영화의 악역.
-소년을 위해 소년의 아버지에게 아들 얘기를 꺼내는 여자. 영화의 조연.
오늘 소년이 본 영화의 등장인물들이었다.
오늘 본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소년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닌다. 오로지 소년을 위해. 소년의 미소를 위해. 오늘만큼은 소년이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위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활약을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미소에 등장인물들이 뿌듯한 미소를 보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끝난 임감독의 첫 영화. 아니, 영상.
한록은 아직도 그 날을 기억했다.
“...어때?”
추운 겨울.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는 임감독.
영상이 모두 끝나서 검은 화면만 보이는 컴퓨터와, 그 컴퓨터에 비친 자신.
임감독의 컴퓨터 화면에 뜬 영화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짧은 영상.
그 영상 속의 모두가 주인공을 위해, 한록을 위해.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 그리고 말한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이.
-오늘만큼은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따뜻한 위로에 한록은 그저 화면을 바라보았다. 임감독이 모든 장면을, 모든 순간을,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영화. 이 영화가 한록에게 조금이라도 행복을 줄 수 있길 바라며 만든 영화.
‘어떻게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마움. 애틋함. 그리고, 행복. 한록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코끝이 시큰 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고마움을 표현하기에는 모든 말이 부족했다.
한참동안 말을 고르던 한록이 임감독에게 답했다.
“형. 꼭 감독이 돼서, 이거 제대로 된 영화로 만들어줘.”
임감독은 한록의 말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 그리고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걸 보면...그날은 어떤 일이 있었어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
바로 이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거니까.
“응, 그래.”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거다.’
한록을 보며 다짐하는 임감독. 그리고-
‘이 영상이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한록.
추운 겨울. 임감독의 방에서 첫 영화를 본 날.
‘사람들에게 성우 형의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 날은 한록에게 꿈이 생긴 날이었다.
**
방학이 끝난 후 임감독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그때 만든 영상을 학교 영화제작 수업에 과제로 제출했다.
“이게 성우가 만든 거라고?”
“진짜? 프로 감독이 만든 게 아니고?”
“너무 좋은데?”
“1년 동안 만들던 게 이거였냐? 보람이 있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반응은 임감독이 상상하지도 못한 극찬이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임감독 특유의 차분한 연출과, ‘끝난 영화가 처음부터 다시 재생 된다’라는 재능있는 학생의 패기와 열정이 돋보이는 구성까지.
<영화관을 보는 사람들>을 본 모두가 임감독에게 칭찬을 보냈고, 그건 영화제작 수업의 교수인 정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본 학생 단편 중에 제일 좋네.”
교수이면서 동시에 영화계에서 크게 인정받는 감독인 정교수의 말. 그 말에 임감독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정교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거 대학영화제에 출품해라.”
대학 영화제. 데뷔도 못한 대학생들의 작품이 나오는 것 치고는 상당한 관객이 모이는 영화제였다. 무엇보다 영화 관계자들이 신인 배우와 감독을 발굴하기 위해 대학영화제에 모인다. 대학 영화제는 사실상의 영화 공모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감독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멋진 입봉의 루트.
“대신 내용을 좀 바꾸자.”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네, 교수님! 어딜 바꿀까요?”
영화의 내용이 제작사나 영향력있는 사람에 의해 바뀌는 건 흔한 일이었다. 임감독 역시 처음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
“...결말이요? 어떻게...”
그러나 이윽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대학 영화제에서 상 타고 싶으면 임팩트가 있어야지. 비극적인 결말로 바꾸자.”
그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해피엔딩에서 비극으로 결말을 바꾸는 건 좀...”
“성우야. 우리 학교에서도 수상실적 하나는 있어야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행복해지길 바라며 만든 영화.
아니-
“교수님. 이 영화가...제 친구를 모델로 만든 영화라서요.”
한록을 위한 영화.
정교수의 제안은 그 영화의 결말을 비극적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조언은 감사하지만, 이 영화는 엔딩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제 친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영화예요. 그런데 엔딩을 비극적으로 바꾸는 건...그 친구한테 못할 짓 같습니다. 영화의 의미도 없어질 거고요.”
필사적으로 정교수를 설득하려는 임감독. 그러나 정교수는 임감독의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임감독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다는 뜻이었다.
“성우야.”
“네.”
“내가 우리 학교에서 수상실적 하나 만들자고 했잖아. 그렇지.”
“네.”
“그런데 넌 싫다고 했고.”
“...네.”
“이게 참, 이해가 안 가네.”
정교수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감독 될 생각 없나 보다.”
**
그날 밤. 임감독의 자취방.
임감독은 불이 꺼진 방에서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감독의 모니터에 떠있는 것은 임감독이 시나리오를 올리던 곳이자, 오랫동안 일기장으로 사용하던 블로그. 그 곳에 오늘 자신이 작성한 일기였다.
그 일기의 마지막에 쓰인...
‘내 말 들어. 네가 이 바닥에서 내 도움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협박. 아니. 사실에 가까운 정교수의 말.
그 말이 도무지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야. 너 병신이냐? 이걸 놓칠 거야? 정교수님 말대로 해!
고민 상담을 한 모두가 임감독에게 정교수의 말을 따르라고 했다. 하지만 임감독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 영화는 한록이를 위해 만든 영화야.’
영화를 보며 위로받는 자신의 친구. 그 친구가 행복해지기 위해 만든 영화. 한록도 분명 완성된 영화를 볼 것이고, 그 영화가 자신의 얘기라고 느낄 것이다. 그런 영화를 자신의 욕심 때문에 비극적으로 만들 순 없었다.
‘...일단 한록이한테 물어볼까? 한록이는 오히려 별 생각 없을지도 몰라. 이건 그냥 영화니까.’
그런 생각에 임감독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냐. 물어보는 거 자체가 상처가 될 거야.’
‘아니지. 그건 모르는 거지.’
‘그걸 왜 몰라. 걔가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끊임없이 쌓여가는 임감독의 고민.
‘...이거 말고 다른 기회가 있을까?’
영화감독이라는 좁은 문.
‘정교수님...많이 화나셨을까?’
정교수의 협박.
‘이 기회를 놓치면...조감독에서 입봉까지 10년은 걸릴 거야. 그 전에 취직을 해야할 거고.’
이미 가세가 기울어가는 집안.
‘내가 감독이 되어야 좋은 영화를 만들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자기 합리화.
‘안 돼. 이 영화는 한록이를 위한 거야. 엔딩을 바꾸는 건 걜 배신하는 거야.’
친구에 대한 애정과 걱정.
‘그래. 그만하자. 사람들을 위로하는 감독이 되고 싶은 거잖아.’
그리고...
‘하지만.’
‘나는.’
‘나는...’
‘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감독이 되고 싶은데.’
‘감독이 되고 싶은데.’
너무나 강렬한 꿈.
“감독이 되고 싶어.”
임감독이 컴퓨터 화면 앞에서 중얼거렸다.
**
그리고 다음날. 임감독이 부은 눈으로 정교수의 앞에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대학 영화제에는 출품하지 않겠습니다.”
그 모든 고민 속에 임감독이 내린 결론은 결국 한록을 위한 것이었다.
“기대가 많았는데 실망을 시키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더 좋은 영화를...”
“아니야, 성우야. 나가봐.”
임감독의 말에 정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정교수의 미소에 임감독은 직감했다.
‘내 영화 인생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정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정교수는 절대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임감독이 하는 모든 일에 불이익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감독은 한록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 그게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니까.
‘괜찮아. 이게 맞는 결정이야.’
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임감독.
그리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임감독이 실수로 공개로 올려버린 어제의 일기.
“...성우 형.”
그 글을 발견한 한록.
**
일주일 후.
[형.]
“응, 한록아.”
[요즘 왜 연락이 안 돼. 아주머니가 걱정하셔.]
“...좀 아팠어.”
[그래.]
“무슨 일이야?”
한록이 임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일 확인해 봐. 내가 시나리오 수정해서 보냈어.]
그리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냈다.
한록이 보낸 것은 오로지 임감독을 위한 시나리오.
임감독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교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대학 영화제 포기하지 마.]
감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시나리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