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17화 (198/263)

인사는 이쯤하고. 서로 솔직해져 봅시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나.”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바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답했다.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인 최경준. CK ENM의 숨은 실세에게 한록이 바라는 것은 바로...

“제롬 앤더슨을 상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롬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말이지?”

“제롬의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다른 빅6들을 향한 폭로들도 이어지고 있지. 빅 6가 눈치를 보는 틈을 타서 시장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야.”

“맞습니다. 정확히는, 빅6에게 불리한 안건들이 통과되도록 회사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합니다.”

“빅6가 헐리웃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 구조를 바꾸는 안건이겠군.”

“네, 맞습니다.”

현재 헐리웃 시장은 영화관도, 법안도 모두 빅6 위주인 상황. 빅6만이 일정 수 이상의 영화관을 가지고 있었고, 광고를 위한 자리 역시 대다수 독점하고 있었다. 제롬은 필름포럼 차원에서 그걸 공평하게 바꾸는 안건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빅6가 제롬의 계획에 반대하지 못할 겁니다. 안 그래도 폭로가 터지고 있는데, 영화계 독과점을 고치려는 시도에 딴지를 걸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래. 그럴거야. 그래서 원하는 건 뭔가?”

“영화사 스크린 쿼터를 없애고 싶습니다.”

영화사 스크린 쿼터. 포럼에 가입한 영화사들은 꼭 따라야하는 제도로, 영화사마다 일정 수준의 스크린을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원래는 많은 영화사들에게 극장 개봉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지만 지금은 사실상 빅 6에게 영화관의 자리를 몰아주기 위해 작동되는 상황.

“<식물> 3부작을 동시 개봉하려면 되도록 많은 스크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빅6가 아닌 다른 곳들은 스크린에 제한이 있습니다. 제롬이 이 안건을 올려서, 스크린 쿼터를 없애도록 유도해주십시오.”

“좋아. 그러려면 대가가 필요하겠지.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뭔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제롬에게도 도움이 되는 안건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 본부장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하.”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한록을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뉴욕 영화계의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라. 그러면서 아무것도 건네주지 말라.”

한록의 무리한 부탁. 그 요구에, 최경준이...

“그 정도야 쉽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

다음날. 제롬과 통화를 하는 최경준.

[제롬 앤더슨입니다. 용건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번 워너 브라더스와의 일에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아닙니다. 워너 브라더스가 CK를 부당하게 공격하고 있으니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경준과 제롬은 정중하게 대화를 주고받았고-

<인사는 이쯤하고. 서로 솔직해져 봅시다.>

갑자기 최경준의 말투가 바뀌었다.

[...무슨 말입니까?]

<스튜디오B가 말하지 않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최경준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스튜디오 B가 우리를 도운 이유는 빅 6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가 <마지막 공연>과 <마법사의 전투>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상황에서 폭로를 시작하고 싶었겠죠.>

[다 아는 얘기를 하는군요.]

최경준의 말에 제롬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이 바닥. 제롬은 자신의 계획을 숨길 생각도 없었고, 이 사실은 CK와 스튜디오 B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죠.>

-하지만 아주 소수만 알고 있는 진실이 더 있었다.

<워너 브라더스. 그리고 스튜디오 B의 공통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한국 영화시장을 노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국영화. 그리고 한국 시장.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사중 하나인 워너 브라더스가 고작 동네 가게 수준의 CK를 공격한 것. 빅6가 CK를 견제한 것. 제롬이 CK의 편의를 봐준 것. 그 모든 것의 뒤에는 한국 시장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한국 영화는 작품성 측면에서 점점 세계의 인정을 받아가고 있었고, 특히 최근 CK가 아주 양질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헐리웃에 여러 한국 영화의 판권을 사가고, 리메이크에 돌입하는 상황.

세계 4위의 시장. 거기에 원작으로 활용할 양질의 컨텐츠.

기업인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 시장을 삼켜보자.’

<워너 브라더스는 우리를 무너뜨린 후 CK를 인수하려 했겠죠. 반대로 스튜디오 B는 우리와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해서 한국 시장에 접근하려는 방식일 거고요.>

최경준의 말에 제롬은 잠시 답이 없었다. 최경준에게 감탄을 했기 때문이었다.

‘...본인 나라도 아닌 곳에서 이 정도 시야라니. 시야가 엄청나게 넓다. 이 사람은 기업가가 맞아.’

한록과 달리 정말 기업과 시장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최경준. 최경준은 이미 세계적인 기업가들의 마음을 눈치채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제롬이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들켰군요.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 좋습니다. 우리를 이용하겠다는 건 스튜디오B에게 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앞으로 스튜디오 B가 헐리웃을 바꾸는 걸 돕겠습니다. 또한, 스튜디오 B가 한국 영화계와 컨택하는 것 역시 CK가 도울 겁니다.>

그리고 최경준의 대답은 역시나 기업가의 그것이었다. 최경준의 말뜻을 파악한 제롬이 답했다.

[그쪽도 용건이 있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뭡니까.]

<협의회에서 영화사 스크린 쿼터를 폐지해주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올해 안에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 입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많이 있습니다.]

빠르게. 오로지 용건만을 주고 받는 둘의 대화.

<아니. 우리보다 중요한 사안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경준의 자신감.

<한국 시장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절반은 제가 만든 곳입니다.>

교만도, 과장도 없이 그저 사실을 전하는 최경준. 제롬 역시 최경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시장은 내 겁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나 외의 선택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네, 알고 있습니다.]

제롬이 흥미로운 대화에 약간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러자 최경준이 말을 이었다.

<설명은 모두 됐을거라고 봅니다. 빠르게 답을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경준은 제롬이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 또 대단한 사람을 보냈군요.’

전화를 끊고 최경준에 대해 생각하는 제롬.

헐리웃의 정신적 지주 중 한 명인 제롬 앤더슨. 그런 자신의 패를 모두 간파하고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전략가다. 그리고 협상가야. 합치면 제대로 된 보스군.’

-이 시장은 내 거다,

-나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다.

오늘 최경준은 자신의 말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몸소 증명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 영화를 만든 사람이군.’

그렇다면 제롬은 그에 마땅한 대우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

그날 밤. 제롬의 사무실. 제롬이 자신의 앞에 앉은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제 한을 데려오는 건 포기해야할 것 같군요.]

상대는-

[우리 보스가 포기를 한다고?]

알렉산드로 감독.

[제롬 앤더슨이 인재를 놓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은퇴를 한 닉을 데려온 것도 당신이었잖아.]

알렉산드로 감독이 흥미로운 얼굴로 제롬에게 물었다.

꽤 오랜 시간 한록을 지켜보고 러브콜을 보내오던 제롬. 알렉산드로 감독은 제롬이 언젠가 한록을 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롬이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니 의아해진 것이었다.

[그쪽도 상당한 전략가가 있더군요.]

[전략가라면...아. 본부장 최경준 말인가.]

[맞습니다.]

[그렇지. 거물로 보였어. 한국 영화계에서 입지가 상당하던데.]

제롬의 말에 알렉산드로가 동의했다. 해외에서도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최경준. 부산 영화제 당시 알렉산드로를 섭외한 것이 바로 최경준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헐리웃의 속내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워너 브라더스가 왜 CK를 공격했는지. 우리가 CK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원하는 대로 손을 잡아줄 테니,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이번 분기에 개봉하고 싶은 영화가 많으니 영화사 쿼터를 풀어달라고 하더군요. 한이 원한다고.]

[...판을 다 읽고 있군. 그걸 이용할 줄도 알고.]

[네. 전략이 통하지 않는 상대입니다.]

[그리고 한을 아끼고.]

[상사라면 누구나 아낄 수 밖에 없죠.]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자신을 아끼기까지 한다라. 보스 말이 맞아. 한은 절대 우리에게 오지 않을 거야.]

[그럴 겁니다. 한이 이곳에 온다면, 아마...]

제롬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를 이기기 위해서겠죠.]

제롬이 자신 역시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내뱉었다. 한록에게는 멋진 동료와 영화들이 있다. 이한록은 한국 영화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한록이 헐리웃에 오는 것은 오로지 이 시장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이기기 위해서다.

어쩌면 조금 먼 얘기.

하지만, 언젠가 현실이 될 얘기.

[그때가 오기 전에 미리 처리할건가?]

알렉산드로 감독이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며 가위를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제롬이 짧게 웃고 답했다.

[아뇨.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제롬이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헐리웃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돌아올 한록. 그리고 그런 한록과 싸울 자신.

서로가 가진 가장 멋진 영화로 상대에게 대적한다. 사람들은 극장에 찾아오고, 어떤 영화를 볼지 황홀한 고민을 한다. 뉴스와 방송에서는 하루 종일 CK와 스튜디오B의 영화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주 오래 기억될, 영화계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때를 생각하면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나 짜증이 아니라...

[오히려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지죠.]

기대감이었다.

[한의 제안을 들어줘야겠습니다.]

제롬이 알렉산드로에게 말했다.

**

그리고 한달 후. 제롬에게서 걸려온 전화.

[영화사 스크린 쿼터가 포럼 차원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제롬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덧붙였다.

[앞으로 CK와 좋은 협업이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내주지 않고 원하는 것만 받아온 최경준. 최경준이 상황을 만들어주었으니 이제는 제작에 들어가야 했다.

한록은 곧장 <식물>의 이감독과 만남을 가졌다.

“그러니까, <식물>의 엔딩을 세 가지 버젼으로 만들고, 그걸 동시에 개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제가 <식물>의 엔딩을 세 개 사이에서 고민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작 초기에 회사에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은 회귀 전에 보고 온 거지. 감독님이 나머지 엔딩에 미련을 가져서 속편으로 개봉하셨단 것도 그때 들었고.’

“그렇군요. 그때 고민이 많긴 했습니다.”

다행히도 한록의 거짓말은 잘 먹혀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만큼 이감독 역시 <식물>의 다른 엔딩에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식물>은 이 세 가지 엔딩으로 완성된다. 이게 동시에 개봉하기만 하면 <식물>은 회귀 전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게 될 거야.’

아마 한국 영화, 아니, 세계 그 어떤 영화도 이뤄보지 못한 성과.

그만큼 <식물>은 한록이 기대하고 또 기다리던 영화였다.

“하지만...저는 장편 영화는 <식물>이 처음입니다. 초보 감독인 제가 세 영화를 동시에 만들 수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개봉 시기는 감독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개봉을 늦춘다고 해도 5년 이상 걸릴 겁니다.”

“혼자라면 그러시겠죠. 이 프로젝트에 합류할 다른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이죠?”

“서감독님. 그리고 <후계자의 식사>의 정감독님입니다. 감독님의 권한은 전적으로 보장될테니 그 부분은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감독. 그리고 정감독.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감독의 이름에 이감독의 눈이 흔들렸다.

이제 막 입봉한 신인감독. 혹시 영화가 망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매일 밤 잠을 설친다. 그런데 거장 두명이 함께 영화를 만들어주며, 자신의 권한까지 보장된다.

‘무엇보다...아이디어가 너무 좋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세가지 엔딩을 동시에 개봉하자는 제안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성공만 한다면 정말 대박이 날거다. 그런데 내가 이걸 컨트롤 할 수 있을까. 난 아직 장편 영화는 만들어 본 적도 없는데, 영화 세 개를 동시에 만들라니. 하지만 이대로 놓치기엔 아까운 기회인데. 그래도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세 영화 다 망할 수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감독.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이 아껴두었던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이감독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네.

-네. 그래도 잘 말해보겠습니다.

-내가 좋은 방법을 말해줄까.

-어떤 겁니까?

한록이 이감독을 만나기 전 최경준에게 들었던 조언. 그리고 감독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 그건 바로...

-자네가 전적으로 마케팅을 담당하겠다고 말하게.

이한록이라는 사람의 존재.

“감독님. 영화만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영화계의 역사에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진...”

“아뇨.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이감독의 표정이 변했다.

천만 영화 <부산행>과 퀸. 한국 영화를 미국에 알린 <시험>과 <수면>. 무성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마지막 공연>.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이 남자. 영화감독들이 너무나 원하는 사람.

“저와 함께하시죠, 감독님.”

아마, 영화 감독중에서...

“...네. 좋습니다.”

그 사람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감독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한록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

“-이렇게 된 상황입니다. 합류해주시겠습니까, 감독님.”

이감독에게 허락을 받고, 서감독에게 전화로 상황을 전달한 한록. 서감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곧 보겠다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좋습니다.]

‘역시.’

회귀 전 <식물>에 큰 관심을 보였던 서감독. 서감독의 섭외는 쉽게 완료되었다.

하지만 한록이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팀장님과 다시 작업할 일이 생기길 바랬습니다.]

바로 서감독의 흔쾌한 결정에는 한록 역시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저 말고 다른 감독님은 누구입니까?]

“<후계자의 식사>의 정감독님입니다.”

[<마지막 공연>을 고쳐주셨던 임감독님은 어떠십니까.]

서감독이 임감독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공연> 이후 임감독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서감독. 그러나 임감독이 이를 원치 않았고, 한록이 중간에서 상황을 잘 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감독은 여전히 임감독이란 사람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임감독님과 다시 얘기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한록은 적당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영화 얘기는 천천히 해볼 생각이었는데.’

임감독이 영화 얘기에 큰 상처가 있는 것 같아, 천천히 얘기를 진행해보려던 한록. 하지만, <식물>에 임감독을 합류시키자는 것 또한 너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형도 시간이 필요할텐데. 계속 드라마만 만들다보니 감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 그것 때문에 또 실패하면 타격이 클 거고. 어떻게 해야 하려나.’

한록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날 점심. 최과장이 놀라운 소식을 가져온 것이었다.

“팀장님. 올해 한 번도 안 우셨죠?”

“네.”

“그래서 저도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 가져왔습니다. 현차장님 울려주신 보답입니다.”

결국 현차장과 광고 업무를 나눠맡게 된 최과장. 그에 대한 보답이라며 최과장이 한록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임감독님 새로운 드라마 대본이요. 얼마 전에 1화 나왔다고 합니다.”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전의 인수전으로 최경준이 관리중인 CK방송국. 임감독이 그 곳과 계약중인 새로운 드라마 대본이었다.

최경준이 CK방송국을 인수하며 ‘드라마판을 장악하겠다’고 진행중인 거대 프로젝트.

완전히 극비리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로 임감독이 한록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대본이었다. 그러나 최과장은 다른 곳에서 대본을 입수해온 것이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가져오신 겁니까?”

“저 CK 방송국에서도 좀 근무했거든요. 그런데 필명이 또 바뀌셔서 좀 힘들었어요.”

“과거가 많으시군요.”

“멋진 남자라면 그래야죠. 나중에 전기영화 만들려면 이 정도 과거는 필요하니까.”

“진심이십니까?”

“어느정도는요.”

“꼭 만들어지시기 바랍니다.”

최과장의 실없는 소리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본을 건네 받았다.

‘이번엔 무슨 드라마려나.’

시청률 1위를 달리는 막장드라마의 제왕 임감독. 그가 새로운 필명으로 집필한, 극비리에 제작중인 거대 드라마.

‘...어.’

그 드라마의 대본을 보는 순간 한록은 생각했다.

‘이 사람의 재능은 절대 녹슬지 않았다. 이 사람은 영화계로 돌아와야 한다. 반드시. 반드시 형을 데려와야 한다.’

그 드라마의 제목은.

<2024년 CK 드라마 라인업>

<작가: 송병우>

<가제: >

<오징어 서바이벌>

세계에서 가장 히트한 드라마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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